최초이자 하나뿐인 평전
『장기려 평전』은 『한국의학 인물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과 의사 8인 중 한 명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가 과학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하여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2018)한 성산 장기려(張起呂, 1911-1995) 평전이다. 정부보다 10년 앞서 의료보험(현 국민건강보험)의 성공적 실시로 가난한 환자를 위해 살다 간 장기려 관련 저서는 2023년 7월 현재 32권(성인 16, 아동 16)이 검색된다. 『장기려 평전』은 아무런 정치적 고려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장기려를 서술했다. 이전의 연구나 전기들이 지나쳤거나 외면했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사안에 따라서 그의 선택이나 결정을 문제 삼았다. 그의 유족, 의사 제자, 그의 이름이나 아호를 앞세운 유관 단체의 일관되지 못한 행태 비판했고, 우리나라 의학사나 기독교 현대사의 장기려 서술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2007년에 출간된 『장기려, 그 사람』의 전면 개정판이다. 2004년 가을 성산 장기려 기념사업회로부터 평전 의뢰를 받았고, 2019년 말부터 전면 개정에 착수했으니 초판 출간으로부터 따져도 15년만에 개정판을 내놓는다. 장기려 타계 이후 28년만에 전면 개정을 했기에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게 제기된 ‘의료보험의 아버지가 박정희다, 아니 민중이다, 민중도 박정희도 아니고 장기려이다’는 논란, 과도한 이념과 세대 갈등, 코로나 사태 이후 일부 개신교가 보여 준 독선적 행태를 소개하거나 의식하며 장기려에게서 대안을 모색했다. 이런 시도는 이 책이 전기가 아니라 평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던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 ‘바보 의사’, ‘작은 예수’ 등으 로 불리며 우리 곁을 살다간 장기려는 일본 신사 참배에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고 독재자 김일성과 전두환 앞에서 소신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의사였다. 힘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헌신하지만 권력과 돈 앞에 비굴하거나, 민주화 투쟁에 헌신하지만 공동체 내에서는 독재자로 군림하는 인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북한에서 장기려는 번번이 길가는 거지들을 불러 와서 겸상 차려 함께 먹었다. 그의 아내가 굶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남한에서도 지갑을 두고 나왔다고 생각해 그냥 지나쳤다가 병원에서 월급 받은 게 생각나서 되돌아가 거지에게 수표를 주었다. 그가 수표를 쓰려다 경찰에 체포되었기에 장기려의 수표 선행이 드러났다. 차남 집에 머물 때는 가정 일을 돕는 아주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웬 차별이냐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전쟁 이후 장기려는 무료 병원을 고집했고, 부산대학교 뒤편 창고에 방치된 행려병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의료봉사를 했다. 부산 뇌전증 환자 모임인 장미회 초대 회장이 되어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매월 나가서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기려는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대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룬 의사로서의 성과나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었던 사랑도 귀하지만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대한 의사였다는 사실만큼 찬란하랴.
전문가주의 경계한 의학도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에서 10주기를 기념하여 지강유철에게 평전을 의뢰한 이유가 있었다. 이전에 나온 장기려 관련 책들이 선행 봉사 에피소드만 부각시킬 뿐 그가 평생 얼마나 의학 공부에 매진했고 어떤 신앙과 사상으로 세상을 살다 갔는지를 심도 있게 연구해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북한에서 1947년에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 장기려만 영어 원서로 학생을 가르쳤고, 러시아어를 못 배우고 의대 교수가 됐으나 한국 전쟁 직전에는 대학 당국이 첨단 외과학을 번역하라고 휴가를 줄 정도로 러시아 실력이 뛰어났다. 월남하여 제3 육군병원에 근무할 때는 북한에서부터 외우고 있었던 오가와(小川) 교수의 <외과학> 덕분에 군의관 교육에 막힘이 없었다.
장기려는 1943년에 우리나라 외과 의사로는 처음으로 간암의 설상 절제술에 성공했다. 간 수술은 당시 최고 외과 의사였던 오가와 교수가 2년 전에 실패한 수술이었다. 모두 말렸지만 의사 면허를 받은 지 겨우 2년된 서른두 살의 장기려는 과감하게 도전해 불가능한 장벽 하나를 무너뜨렸다. 1959 년에도 또다시 ‘간암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했다. 이 역시 대한민국 외과 수술 역사상 최초 기록의 기록이었다. 대한간학회에서는 2000년에 장기려의 간암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한 날을 기념해 ‘간의 날’ ( Liver Day )로 지정했다. 『장기려 평전』은 단순히 이런 업적만을 중계하지 않고 장기려의 수술과 의학에 기여한 학문적 성과를 소개했다. 장기려는 70이 넘어 자신의 전문지식이 크게 뒤진다고 판단하자 ‘우리나라 도규계 (刀圭界)의 일인자라는 타이틀을 내팽개치고 대학원생과 함께 후배 교수의 수업에 참가하였다. 뇌혈관 장애로 쓰러쳐 치료를 받던 1992년에는 1965년에 공저한 외과학 교과서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편지를 관계자에게 발송했다. 문제가 된 부분이 딱 한 문장이었는데 말이다.
장기려는 ‘전문’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면서 끝내 전문의 자격증을 거부하고 대한외과학회 명예 회원으로 남았다. 같은 이유에서 장기려는 무료 병원으로 시작한 복음병원이 현대식 시설과 규모를 갖추면서 점점 ‘전문화’되는 것을 온 몸으로 막다가 조기 퇴직을 당했다. 장기려는 1951년에 복음병원을 시작하면서 직책이나 나이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월급을 지급하여 복지 분야에서도 시대를 앞서 나갔다. 그 결과로 병원장과 식구 수가 같은 앰뷸런스 운전기사의 월급이 같았다. 장기려의 가난한 이웃 사랑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12 년이나 앞서서 의료보험을 성공적으로 실시한 사실에서도 빛났다. 주무 부처 장관이 영세 사업자를 위한 의료보험 포기를 선언했음에도 장기려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끝내 23 만 명의 회원을 둔 의료보험조합으로 키워냈다. 21년간 축적한 민간의료보험의 데이터와 노하우는 정부에 인계했다.장기려는 그런 의사였다.
이 평전이 주목한 장기려의 위기
이 평전은 장기려가 평생 맞닥뜨렸던 절체 절명의 위기 순간을 주목했다. 많은 이들이 장기려 직면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에 관심이 없다. 흘러간 옛 노래처럼 몇 가지 미담만을 반복 재생한다. 『장기려 평전』은 한국 전쟁 직전 장기려가 극도의 긴장과 불안으로 구토를 할 정도로 공산당의 감시에 위기감을 느꼈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다뤘다. 두 차례나 미 공군의 대규모 평양 공습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차남을 데리고 평양을 떠나 걸어서 서울까지 내려오는 길을 사실 대로 서술했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양과 부산에서 어떻게 UN군과 국군의 병원에 취직했는지를 추적했다.
빨갱이로 몰리면 즉결 처분 당하던 전쟁의 와중에 특무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일도 그 시대의 눈으로 파헤쳤고, 부산대학교 총장 선거에 홀로 반대표를 던져 또 다시 정보기관에 끌려가 제거될 수 있음에도 비굴하게 물러서지 않았던 사건도 빠뜨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평생 고통스럽고 슬프게 만든 분단의 아픔에 한발 더 다가서기 위해 한국 전쟁을 과하다 싶을 만큼 상세하게 다뤘다. 70대 중반에 제도권 교회를 떠나 이름도 없는 종교 단체에 의탁하기 위해 수년 간 고민하고 따져 보았던 세월도 상세히 추적했다. 이런 위기와 선택의 순간에 장기려의 진정한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장기려란 거울에 비친 우리 사회
전기가 한 인물의 평생을 그려내는 일에 집중한다면 평전은 그 인물을 평가할 뿐 아니라 그의 시각으로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전기가 ‘추앙’에 무게를 둔다면 평전은 장기려의 시선과 문제 의식으로 오늘 우리를 달리 보게 만든다. 교회 개혁은 일평생 장기려의 중요 관심사였다. 1940년에 김교신과 함석헌을 만나면서부터 개인 구원 차원의 신앙을 극복하는 데 매진했다.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 함석 헌, 퀘이커 등을 통해 장기려는 사회 구원에 필요한 영감을 얻었고, 1958년부터 30년 동안은 일요일 오후에 <부산 모임>이라는 작은 성서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 ‘부산 모임’은 장기려에게 사실상 교회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10월 유신 선포 당시 부산 계엄 분국이 주일 모임을 금지했을 때 일제 강점기하에서 목숨 걸고 신사 참배 강요에 저항했던 신앙인들처럼 행동하지 못한 것을 그렇게 통렬하게 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더욱 근원적인 교회 개혁의 가능성을 ‘종들의 모임’에서 발견했다. 그 이후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불완전한 개혁이라 거침 없이 주장했고, 30 년을 계속해 온 ‘부산모임’을 해산했다. 제도권 교회도 떠났다. ‘종들의 모임’의 복음 전도 방식이 예수가 의도했던 본래의 교회이며 그렇게 믿고 사는 게 진정한 교회 개혁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이후 우리 사회의 남남 갈등, 세대 갈등, 성별 갈등이 매우 심각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상대나 이념이 다른 집단을 악마화하기 위해 가짜 뉴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다.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극 보수 교단 소속의 장기려와 대표적인 반정부 진보 인사였던 함석헌의 평생 친분을 떠올렸다. 너무 다른 생각을 가졌지만 두 사람은 1940년에 만나 1989년에 함석헌이 타계할 때까지 매달 부산모임으로 만나 공부하고 교제했다. 이들의 친분엔 흔들림이 없었다. 주변 인물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평생 동지로 남았다. 함석헌과 장기려는 자기 주장이나 취향을 숨기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존중하며 연대했다. 아수라로 변해버린 정치판과 지엽적인 차이로 상대의 인격까지 부정하는 현실에 이 평전을 통해 우리 사회가 두 사람의 공존에서 더 많이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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