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히들 말하는 모태신앙 가정에서 태어나서 예수를 섬기는 대열에 서긴 했지만 나를 예수 사람으로 기른 사람은 목사인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내인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내게 성경 이야기를 해주었고, 내가 성경을 직접 읽도록 가르쳤고, 예수를 내게 소개했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했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도록 이끌어주었고, 기도할 수 있게 했고, 끝내 나를 목사가 되도록 안내하였다.
내가 비록 목사인 나의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나는 아버지의 교인이 아니라 어머니의 교인이었던 셈이다. 나의 아버지 목사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교회를 떠났던 교인들이 나의 어머니의 위로와 격려에 설득되어 다시 교회 출석을 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목사 아버지가 친가 친척을 전도하지는 못했는데, 그것에 반해, 어머니가 외가의 이모들 외삼촌들과 그 가족들을 모두 기독교로 전도했다면 목사보다는 목사 부인의 능력을 더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설교를 들을 때, 혹은 읽을 때, 그것이 심판의 메시지든, 구원의 메시지든,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든, 책망의 메시지든, 내가 더 가혹한 벌을 받아도 싸다고 생각되고, 칭찬을 받아도 황송하다고 생각되는 체험을 하곤 했다. 보혜사 성령님 덕분에 다양한 형태의 성경 말씀을 늘 새롭게 만나게 되고, 내가 참고한 주석이나 해설과는 다른 자료를 설교자를 통해 들을 때는 성경 말씀의 또 다른 심오한 세계로 황홀한 진입을 하곤 했다.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읽으면서, 성경 말씀에 관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회개할 용기를 갖게 되는 감동이, 대오각성하여 거듭나는 희열과 함께 오곤 했다.
꽃자리 발행인은 나에게 세 여성 설교자의 설교 세 편씩 모두 아홉 편의 설교를 논평해보라고 보내왔다. 나는 아홉 편의 설교를 정독하면서 큰 기쁨, 미처 몰랐던 것에 관한 큰 배움, 내가 너무나도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큰 뉘우침, 여기에 더하여, 지금 한창 활동하고 있는 여성 설교자들이, 암담한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하려고 하는지, 이 시대에 회개와 구원과 성도의 실천적인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깨우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여성 설교자들이 젊은 날에 내가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나는 설교에 실패했다
나는 설교에 실패했다. 설교자로 부름을 받은 나 자신의 자화상이 보일 때가 있다. 나는 햇볕 내리쪼이는 한낮에 마른 뼈들이 널려 있는 적막한 곳에 홀로 서 있다. 사방이 조용하다. 이곳 이름이 처음부터 킬링필드는 아니었다. 비옥한 계곡이 사망의 골짜기로 바뀌는 동안 나는 귀먹고 눈먼 짐승 흉내를 내고 있었다. 광야의 마른 뼈들이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조용한가? 그 절규의 메아리마저 오래전에 사라지고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이명(耳鳴)마저 어디론가 가버렸다.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뼈들이 하는 말도, 뼈를 향해서 전해야 할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전히 귀먹고 눈먼 짐승은 무덤에서 돋는 연한 풀, 그것이나 뜯어먹으려고 아무 데나 주둥이를 내민다. 어쩌면 나는 희생되기로 예비 된 양이었는데, 애잔한 목소리로 태어났어도 들려온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광야의 소리였어야 했는데, 스스로 실성(失聲)하여 침묵(沈默)한 덕분에 운 좋게도 도살만은 피했는데 직무를 유기한 희생양이 그 세상에서 환대까지 받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군사독재 시절, 유신독재시 절에 설교자는 이렇게 목숨을 부지했다.
거부당하는 설교자였다
나는 거부당한 설교자였다. 사람들은 나를 설교하라고 초청해놓고, 자기들 듣고 싶은 말이 아니다 싶으면, 눈 감고 자는 척 외면하거나, “목사님이 신도들에게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지요.” 하며 화를 내거나, 더 험악한 말을 하며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경우를 포함해서 나는 내 평생에 세 번, 설교하다가 제지당한 적이 있다.
어느 해 5월 “이스라엘의 가정교육”이라는 제목까지 주면서 두 주 연속 주일 오후 예배 설교에 초청해놓고 한 주 들어보더니 예정된 다음 주일 오후 예배 설교를 그날로 당장 취소해 버리는 교회, 어느 신학대학교 학생회 주최 채플에 설교 강사로 초청받았는데, 학교 당국이 나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 학생들이 예배 장소를 서울 변두리 어느 기도원으로 옮겨, 예정에도 없던 1일 부흥회를 한 적도 있다.
또 한 번은 감리교재단에 속한 어느 고등학교 교사 예배 설교자로 초청받았는데, 교목을 통해서 설교원고를 미리 달라고 하는 학교도 있었다. 언짢았지만 미리 제출했다. 교장과 교감이 원고를 검열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라고 허락이 나서 갔는데, 50여 명, 교사들은 설교자가 교장 안내받아 예배실에 들어서도 눈길 한번 안 주고, 다들 눈 감고 팔짱을 끼고 앉아 있다. 억지로 끌려온 청중이다. 설교가 시작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어느 열성 교사가 나 대신 설교를 시작한다. “목사님, 그런 소리 하려거든 그만두세요. 여기 오셨으면 복음만 전하세요!” 하며 소리치자, 그때까지 팔짱 끼고 눈 감고 있던 50여 명, 교사들이 모두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 앉고, 20분 동안 설교를 경청하더니, 설교가 끝나자 모두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교사들이 학교 채플을 거부하는 것이지 강사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기독교 학교의 반 기독교 정서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70년대 80년대 교회들은 이런 나를 왜 설교에 초청했는가? 당시 TV나 라디오나 강단이 나 같은 설교자를 초청했던 것을 보면 내가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여론에 굴종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평생 이렇게 살아왔으니, 내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여생을 말 못 하고 지낸다 해도 이 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새 시대 새 설교>를 읽으면서, 여성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설교를 윤색(潤色)하지 않는 용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구약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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