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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의 '종횡서해'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간 탐구

by 한종호 2015. 5. 7.

꽃자리의 종횡서해(10)

구로사와 아키라의 인간 탐구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는 <라쇼몽>으로 1951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제 24회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해 일본 영화를 처음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한 20세기 일본 영화계 최고의 거장이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적인 감독이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서전 비슷한 것》은 한마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구로사와를 세계적인 영화감독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가족, 친구, 그리고 스승에 관한 이야기다.

 

4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난 구로사와는 어린 시절 네 살 위의 형 헤이고(소학교 1, 2학년 무렵)가 학교에서 평균대 위에서 추락해서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온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사고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제일 밑의 작은누나(넷째누나) 모모요가 갑자기 “안 돼! 내가 대신 죽을래”라며 울음을 터뜨린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구로사와는 작은누나를 회고하며 “우리 집안에는 감정 과다에 이성 결핍이라고 할까, 쉽게 감정이입을 하고 사람만 좋으며 감상적인, 좀 엉뚱한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긴급 상황에서 어린 소녀가 울면서 남동생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구로사와는 작은누나가 누나들 중에서 제일 예뻤고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고 회상한다. 유리같이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작은누나는 그 후 16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한다. 《자서전 비슷한 것》에서 구로사와는 “작은누나에 대해 쓰다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몇 번이나 코를 풀고 있다”고 고백한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소녀의 내면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속(代贖)’ 관념이 깃들어 있었던 것일까? 물론 구로사와 집안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구로사와는 셋째 누나 다네요에 대해서도 애틋한 추억을 갖고 있다. 구로사와는 1945년 5월에 결혼했다. 미군의 공습이 행해지고 일본이 패전을 향해 치닫던 비상시국이었지만, 영화제작사 사람들은 촬영소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영화제작에 열심을 내고 있었다. 구로사와는 간신히 틈을 내서 공습을 피해 아키타에 피난 중이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도착한 건 한밤중이었다. 쾅쾅 하고 대문을 두드리자, 두 분을 돌보려고 가 있던 다네요 누나가 대문 틈새로 내다보고 “아키라다!”하고 외치더니, 밖에 있는 구로사와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부엌으로 뛰어가서 서둘러 쌀을 씻기 시작했다. 구로사와는 어이가 없었다. 재미있지만 웃지 못 할 이야기였다. 제대로 쌀 구경도 못했을 동생에게 빨리 쌀밥을 먹이고 싶은 누나의 눈물겨운 마음씨였다.

 

일본인의 집단주의에 의문을 품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경험담도 나온다. 구로사와가 13세 때 겪었던 일이다. 지진이 나자 정전으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민들이 많이 사는 상업지대인 시타마치에서 화재가 발생해 밤인데도 어둡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타마치의 화재가 잦아들고 집집마다 초가 떨어지면서, 밤은 말 그대로 암흑의 세계로 변했다. 그러자 어둠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무서운 선동자들의 포로가 되어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말처럼 무분별한 행동에 나섰다. 구로사와는 “어둠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지 상상도 안 가겠지만, 그 공포는 사람의 이성을 빼앗는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안감은 사람을 미치도록 당황하게 만든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조선인 학살사건은 이런 어둠에 겁먹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한 선동자의 소행이라고 지적한다. 화재로 집을 잃은 친척을 찾아서 구로사와 가족이 우에노에 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단지 수염이 길다는 이유로 조선인으로 몰려 몽둥이를 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구로사와는 조마조마해서 함께 있던 형을 쳐다보았다. 형은 히죽 히죽 웃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심한 놈들!”하고 버럭 호통을 쳤다. 그러자 둘러싸고 있던 패거리가 슬금슬금 흩어졌다.

 

구로사와는 이보다 더 터무니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네에서 어느 집의 우물물은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우물 바깥 담장에 분필로 쓴 수상한 기호가 적혀있는데, 그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표시라는 것이었다. 구로사와는 어이가 없었다. 그 수상한 기호라는 게 자기가 쓴 낙서였기 때문이다. 그는 군중심리에 휘둘리는 그런 어른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것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로사와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 패전하던 무렵의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는다. 1945년 8월 15일, 구로사와는 천황의 조칙을 라디오 방송으로 듣기 위해 촬영소로 갔는데, 그때 걷던 길가의 정경을 잊을 수 없었다. 집에서 기누타 촬영소까지 가는 동안 구로사와가 목격한 상점가의 모습은 일본인 모두가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한 듯이 비장한 분위기였다. 심지어 일본도를 가지고 나와 칼을 뽑아든 채 칼날을 노려보고 있는 가게 주인도 있었다. 천황의 조칙이 분명 패전 선언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구로사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일본은 어떻게 될까?’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패전 조칙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상점가 사람들 모두가 축제 전날처럼 신나는 표정으로 부지런히 일하고 있었다.

 

구로사와는 일본인의 민족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건 일본인의 유연성일까 아니면 허약함일까? 구로사와는 적어도 일본인의 성격에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양면성은 구로사와 자신 속에도 있다고 보았다. 만일 패전 조칙이 아니었다면, 아니 만일 그것이 국민 모두에게 자결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면, 그 거리의 사람들은 거기에 따라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구로사와 자신도 그랬을 것이다. 자아를 악덕으로 보고 자아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양식 있는 태도라고 배운 일본인은 그 가르침에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구로사와는 그런 자아를 확립하지 않는 한, 자유주의도 민주주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게 투신하기 전 청년 시절의 구로사와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 시절 구로사와는 고흐 등의 화집을 본 뒤 모든 것이 고흐의 눈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몹시 불만스러웠다. 그는 ‘나만의 눈’으로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구로사와는 “어떻게든 나만의 시각을 가지고 싶어 안달”했다. 자아와 개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은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것이었지만, 특히 학생 시절 구로사와의 게걸스러웠던 독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구로사와는 “외국문학, 일본문학, 고전, 현대물을 가리지 않고 마구 읽었다.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읽고, 걸으면서도 읽었다”고 회상한다.

 

소학교 시절의 선생님과 친구

 

소학교 시절 구로사와는 늦된 아이였다. 친구들에게서 울보라고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성장을 도와준 선생님이 있었다. 담임인 다치가와 세이지 선생님은 지능 발달이 더디어 주눅 들어 있던 구로사와를 감싸서 처음으로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마운 분이었다. 미술 시간이었다. 다치가와 선생님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한 장 한 장 칠판에 붙이고 자유롭게 감상을 말하라고 했다. 구로사와가 그린 그림 차례가 오자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하지만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로 아이들을 둘러본 다음 열심히 구로사와의 그림을 칭찬해주셨다. 구로사와는 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문지른 부분을 선생님이 무척 칭찬하셨다고 회고한다. 구로사와는 학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뒤로 미술 시간이 있는 날이면 그 시간이 기다려져서 서둘러 등교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졌다. 그러자 그림 실력이 쑥쑥 늘었다. 동시에 다른 과목의 성적도 급속히 오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학급 반장이 되기까지 했다.

 

같은 반에는 구로사와보다 더 울보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라는 친구였다. 그 친구의 존재는 마치 거울을 들이댄 것처럼 구로사와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말하자면 구로사와는 자기와 비슷한 그 아이를 보고, 나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우에쿠사는 걸핏하면 넘어져서 울었다. 질퍽거리는 길에서 넘어져 깨끗한 옷이 엉망진창이 된 채 울고 있는 우에쿠사를 구로사와가 집까지 데려다 준적도 있었다. 운동회 때 웅덩이에 자빠져 새하얀 체육복을 시커멓게 물들이고 훌쩍거리는 우에쿠사를 달랜 일도 있었다. 두 울보는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끼며 다가갔고, 언제나 둘이 함께 놀았다.

 

다치카와 선생님은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는 반장인 구로사와를 교무실로 불러, 부반장을 두면 어떻겠냐고 의논하듯 물었다. 구로사와는 자기가 반장으로 부족해서 그런가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선생님은 그런 구로사와를 가만히 보면서 물었다. “너 같으면 누굴 추천하겠니?” 구로사와는 공부 잘하는 동급생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선생님은 좀 이상한 말씀을 했다. “나는 좀 부족한 녀석에게 부반장을 시키고 싶은데.” 구로사와는 깜짝 놀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우에쿠사한테 부반장을 시켜보면 어떨까?” 구로사와는 그 순간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아프도록 알 수 있었다. 그는 감격해서 다치카와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등 뒤에 마치 후광이 비친 듯했다. 선생님은 우에쿠사를 ‘부족한 녀석’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은 우에쿠사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재능에 주목하신 것이었다. 우에쿠사는 결국 나중에 다치카와 선생님도 깜짝 놀랄 만큼 멋진 소설가가 되었다.

 

세월이 흘렀다. 우에쿠사가 시나리오를 쓰고 구로사와가 감독을 맡은 영화 <멋진 일요일>이 1948년 개봉되었다. 두 친구의 나이 38세 때였다. <멋진 일요일>이 개봉되고 며칠 뒤, 구로사와는 한 장의 엽서를 받았다.

 

“영화 <멋진 일요일>이 끝나고 영화관 안이 밝아졌다. 관객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울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엽서를 읽던 구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울고 있는 노인은 다치카와 선생님,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를 귀여워해주고 격려해주셨던 바로 그분이었다. 엽서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프닝 타이틀에서 ‘시나리오 우에쿠사 게이노스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글자를 읽었을 때부터 스크린이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구로사와는 당장 우에쿠사에게 연락해서 다치카와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25년만의 만남이었다. 가슴 아프게도 선생님은 무척 작아지셨고, 치아도 약해서 고기도 잘 씹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구로사와가 뭔가 부드러운 걸 가져오겠다며 일어서는 걸 다치카와 선생님이 말리면서 말씀하셨다.

 

“두 사람 얼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

 

구로사와와 우에쿠사는 선생님 말씀대로 공손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두 친구를 바라보며 “음, 음”하고 겨우 신음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구로사와는 선생님을 바라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려 선생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

 

중학교 시절 역사 과목을 맡은 이와마쓰 고로 선생님도 고마운 스승이었다. 어느 학기말 역사 시험 때였다. 열 문제가 나왔는데 거의 다 모르는 문제들이었다. 구로사와는 자신 있는 마지막 문제만을 골라서 답안지 석 장을 채워 써냈다. 나중에 이와마쓰 선생님은 채점한 역사 답안지를 학생들에게 돌려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에 특이한 답안이 하나 있다. 열 문제 가운데 하나밖에 쓰지 않았지만, 이게 꽤 재미있다. 나는 이런 독창적인 답안은 처음 봤다. 이걸 쓴 녀석은 장래성이 있다. 100점이다, 구로사와!”라며 그 답안지를 구로사와에게 내밀었다. 모두 한꺼번에 구로사와를 쳐다봤다. 구로사와는 얼굴이 빨개져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구로사와는 옛날 선생님들 중에는 이와마쓰 선생님처럼 자유로운 정신을 지니고 개성이 넘치는 분이 많이 계셨다고 말한다. “정말 좋은 선생님은 선생님이란 느낌이 안 드는 법인데, 이분이 그랬다.” 그때에 비하면 요즘 교사들은 단순한 샐러리맨이, 아니 샐러리맨이라기보다 관료주의적인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런 교사가 하는 교육은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것이다. 구로사와가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만난 선생님들은 학생의 개성을 존중해주시고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신 훌륭한 스승이었다. 구로사와는 영화계에 들어간 뒤에도 야마 상(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1902-1973)이라는 최고의 스승을 만났다. 구로사와의 말대로, 그는 정말 선생님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최고의 스승 ‘야마 상’

 

구로사와는 27세 되던 1936년에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야마 상은 조감독들의 개성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개성을 키우는 일에만 신경을 썼다. 조감독들이 찍어온 필름이 마음에 안 들어도 절대 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영화관에 개봉되었을 때 우리들을 데리고 가서 “저 장면은 이렇게 찍는 게 낫지 않았을까?”하면서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조감독들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작품을 희생시켜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키워준 구로사와에 대해 야마 상은 언젠가 잡지에 쓴 글에서 단지 이렇게만 썼다. “구로사와 군에게 가르친 건 술밖에 없다.” 그런 야마 상에게 구로사와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영화에 대해 야마 상에게 배운 게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쓸 수 없을 지경이라고 말한다. 화가 지망생이던 20대 초반 청년 시절 ‘자신만의 눈’으로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안달했던 구로사와였다. 그에게 야마 상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런 야마 상도 무서울 때가 있었다. 당시는 유성영화 초창기였는데, 그 무렵 영상과 음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야마 상만큼 깊이 이해했던 감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야마 상은 구로사와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싶었던지 <도주로의 사랑>의 더빙을 맡겼다. 그러나 야마 상은 내부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더니 전부 다시 고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구로사와에게 충격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다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더빙을 할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더빙 작업을 함께해온 스태프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점은, 구로사와 자신이 뭐가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구로사와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를 찾기 위해 릴을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봤다. 마침내 그것을 겨우 찾아내 다시 작업을 했다. 수정된 영화를 본 야마 상은 간단히 “오케이”라고 말했다. 구로사와는 그런 야마 상이 얄미웠다. 뭐든지 다 시켜놓고는 마음대로 쉽게 말해버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도주로의 완성>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야마 상의 부인이 구로사와에게 말했다. “남편이 좋아했어요. 구로사와 군은 시나리오도 잘 쓰고, 이제 연출이건, 편집이건 더빙이건 다 맡겨도 괜찮다면서.” 이 말을 들은 구로사와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최고의 스승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구로사와는 야마 상을 만났을 때부터 자기 얼굴에 ‘고갯마루의 바람’이 불어왔다고 말한다. 고갯마루의 바람이란 길고 험한 산길을 오를 때 고갯마루에 가까워지면 산 저편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말한다. 그 바람이 얼굴에 닿으면 고갯마루가 가깝다는 뜻이다. 그리고 곧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조감독 구로사와는 카메라 옆의 감독 의자 옆에 앉아있는 야마 상 뒤에 서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감회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야마 상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것이야말로 구로사와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구로사와는 겨우 고갯마루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 고개 너머로 탁 트인 전망과 일직선으로 뻗은 길이 보였다.

 

〈라쇼몽(羅生門)〉과 인간의 죄

 

때는 헤이안 시대. 무사 부부가 숲길을 지나던 중 도적을 만나 변을 당한다. 아내는 겁탈 당하고 남편은 살해당한 것. 나무꾼이 이를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해 도적은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도적은 자신이 무사 남편을 살해한 것은 맞지만 무사 아내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진술한다. 겁탈 당하던 아내가 이에 저항하는 대신 자신을 받아들인 뒤 포박당한 남편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어 증언에 나선 무사 아내는 이를 완전히 부인한다. 겁탈당한 뒤 망연자실해 있던 중 도적은 이미 도망을 간 상태였고 자신을 걱정해야 할 남편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더란다. 이에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나무에 포박당한 남편을 풀어준 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절규하다가 그만 정신을 잃었단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이 검에 찔려 죽어 있다는 것이 아내의 말의 요지다.

 

무당의 몸을 빌려 진술에 나선 무사 남편의 얘기는 또 다르다. 아내는 겁탈당한 뒤 자신의 여자가 되어달라는 도적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니 도적에게 남편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태도에 두려움을 느낀 도적은 도리어 남편을 풀어주고 상황이 불리해진 아내는 도망간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남편의 말이다. 이들의 진술을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나무꾼은 모두 다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무꾼은 도적과 무사 부부가 얘기한 것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목격담을 풀어놓는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준 〈라쇼몽〉(1950)의 줄거리다. 그러나 <라쇼몽>이 제작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조감독 세 명이 구로사와를 찾았다. 시나리오가 전혀 이해가 안 돼서 설명을 듣기 위해 왔다는 것이었다. 구로사와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허식 없이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 시나리오는 그런 허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렸다. 아니, 죽어서까지 허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를 그렸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업이고, 인간의 구제하기 힘든 성질이며, 이기심이 펼치는 기괴한 이야기다. 자네들은 이 시나리오를 전혀 모르겠다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원래 수수께끼다. 그런 알 수 없는 인간의 심리에 맞춰서 읽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심(人心)의 기미(幾微)를 통찰하라는 주문이었다. 설명을 들은 세 명의 조감독 중에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시나리오를 읽어보겠다며 일어섰지만, 나머지 한 사람은 납득이 가지 않는지 화난 표정으로 돌아갔다. 구로사와는 그 뒤로도 그 조감독과는 계속 마음이 맞지 않아서, 결국 갈라서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작 초기 단계부터 〈라쇼몽〉의 영화화를 탐탁지 않아 했던 제작 회사 도에이(東映)는 개봉 이후 사장까지 나서 “영화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라쇼몽〉의 여파로 도에이에서 진행하려던 차기작 작업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영화계에 환멸을 느낀 구로사와 아키라는 연출 일을 그만둘 생각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내는 뜬금없이 축하인사를 전하며 베니스영화제에서 〈라쇼몽〉이 최고상 격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영화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된 사실도 몰랐고, 도에이 역시 〈라쇼몽〉을 출품할 생각이 없었다. 이 영화를 본 베니스영화제 쪽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의 수상을 계기로 〈라쇼몽〉에 대한 일본 내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라쇼몽〉과 관련해 구로사와는 인간성이 지닌 또 한 가지 서글픈 속성을 보게 되었다. TV에서 이 작품의 제작회사 사장의 인터뷰가 방송되었는데,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는 말문이 막혔다. 사장은 당시에 이 작품의 제작에 난색을 표했고, 완성된 작품에 대해서도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며 화를 냈으며, 제작을 추진한 중역과 프로듀서를 좌천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서는 이 작품의 제작을 추진한 건 전부 자기의 공로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구로사와는 그 인터뷰를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라쇼몽〉이라고 생각했다. 〈라쇼몽〉에서 그린 인간성의 서글픈 측면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구로사와는 인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우며,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미화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구로사와는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는 사장을 비웃을 수 없었다. 구로사와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나도 《자서전 비슷한 것》을 여기에 쓰고 있지만, 과연 나 자신에 대해서 정말 솔직하게 썼을까? 역시 자기 자신의 추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고, 많건 적건 간에 자신을 미화해서 쓴 것은 아닐까? 나는 그 점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탐구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성찰이 정점을 찍는 대목이다.

박상익/우석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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