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4)
‘거룩’이 깡패다
얼마전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에게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옹호했던 저의 군 복무 시절 이야기였습니다. 매일아침 성경을 읽는 부시의 판단이 “항상 옳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후세인으로부터 고통 받는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세계경찰인 미국이 나서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당시 여러 게시판에 이런 저의 비장한 입장을 적어 도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뒤에야 쪽팔림을 알고 다 지우러 다녔는데요. 어딘가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시 북한미녀로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던 조명애 씨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조명애의 아름다움 뒤 숨은 음모’라는 따위 제목으로 여기저기 게시판을 도배하였죠. 군 생활을 할 때였으니 정훈교육을 잘 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왜 저렇게 비장했을까요. 저도 10여 년 전 제자신이 이해가 안 됩니다. 천천히 복기해보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비장한 근본주의자들과 일베들의 정신구조를 보게 될지….
제 입장에 반기를 든 건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공익근무요원’이었죠. 애국심이 반분되었기에 저의 거룩한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친구의 의견은 “무고한 생명이 너무 많이 죽어간다”였습니다. 민간인 사상의 피해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전쟁고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감정에 호소하였습니다.
저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설피 들었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모든 반론을 흡수하고도 남았습니다. 예수 믿는 대통령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관철하는 데에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떠올려보세요.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은 슬프지만…”이라고 운을 뗐으나, 솔직히 말하면 하나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라라는 우상신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을 믿기 바라는 마음에 가슴이 벅찼거든요.
'북한 미녀' 조명애. 드라마 <사육신>에서 김종서의 딸로 활약했다.
세월호 유족들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갑니다. 제가 조명애를 의심했던 사람이라 압니다. 저 역시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압니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겠습니다. 304명이 죽었지만 전혀 슬프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유가족이 ‘거룩한 정부’를 뒤흔드는 세력으로 보이는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돈 받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말하는 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네 자식이 죽었어도 그럴 거냐?”라고 반문하곤 하는데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대응입니다. 사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식 죽으면 ‘돈 더 받으려고 시위할 사람들’이거나) ‘거룩한 정부’를 위해 자식 죽음에 관한 진실쯤은 땅에 묻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투사들이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지하철택배하면서 책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매형이 군대로 보내준 책들이었는데, 그중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간디 자서전》(나의진리실험이야기)은 나의 ‘종교관’ ‘신앙관’을 송두리째 뒤집었습니다. ‘종교’보다, ‘기독교’보다, 하나의 ‘생명’이 무엇보다 귀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생명보다 귀한 게 없다는 선포가 바로 복음(기쁜 소식)임을 그제야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아무 명분 없는 전쟁이었음이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어린 생명, 연약한 생명이 그렇게 숨을 멈추었습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만 4080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가늠이 잘 안 되시죠?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잘못 없이 죽었는데요. 몰랐다고요? 알았지만 ‘선교’ 관점에서 전쟁을 바라보다 보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걸 그냥 당연하다 여겼던 겁니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가 최소 10만 4080명으로 집계된다. 10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FC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이다.
사람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요?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있나요? 세월호 엄마 아빠들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 자체가 죄처럼 여겨지는 ‘유족’입니다. 자녀들의 죽음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 살아있는 것조차 죄로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글 '잔인한 장면이 필요하다' 참고)
워낙 무딘 탓에, 저는 유가족과 얼굴을 대면하고서야 슬픔이 몸으로 전해졌습니다. (욥기의 동화 같은 결말에 문제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사랑하는 자식들은 죽고 없는데, 새 자식이 많이 생겼다고 위로가 된단 말인가?) 그들의 웃음에서도, 이제는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전해져 슬펐습니다. 어쩌면 욥의 결핍도 절대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불가능하죠. 애통함의 깊이만큼 기쁨도 느꼈을 겁니다. 그러나 이내 롤러코스터처럼 추락을 경험하고 아마 그랬겠죠.
우리는 무엇으로도, 이들의 움푹 파인 슬픔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돈으로도, 벼슬로도, 힘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듯, ‘한 생명’의 공백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월호 이야기를 ‘이제 그만하라’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요. 노란리본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는 생명을 모르는 교회가 아닌가요? 복음을 모르는 목사가 아닌가요? ‘거룩’이 깡패가 되었습니다. 비장하고 거룩한 것들에 눈이 가리어진 바리새인들처럼 ‘생명’을 보지 못하니 “주여 주여”하지만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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