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15)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
길을 지나다 우연히 발견한 거리 오락실! 요즘은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약 30년 전만 해도 최고 인기였습니다. 한 판에 30원하다가 올라서 50원이었죠.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모여, 게임을 구경했고, 한 게임을 하기 위해선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기라도 하면 밤이 되는지도 몰랐지요.
그러니까…, 도벽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제 나이 여덟 살 때, 오락은 하고 싶고, 돈은 없고. 월 4천 원 정도 하던 우유급식비를 삥땅쳐 모두 오락실에 쏟아 부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게임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한 시간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500원을 가져가도 10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매번 허무하게 오링이 되었죠. 아무리 오락 잘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걸 구경하는 것보다 금방 ‘Game Over’가 되어도 내가 조정하는 그 짜릿함이 좋았습니다. 동전이란 동전은 다 긁어모아 오락실로 달렸지요.
어느 날은 세 살 위 누나의 동전지갑을 털어 문방구 앞 오락기로 향했습니다. 20원 정도 저렴했거든요. 도로에 버젓이 노출되어 있었기에 위험부담이 컸지만, 가격 대비 감수할 만했습니다. (뭔가 오락실보다는 죄가 덜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역시 게임은 금방 끝이 났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뒤돌아섰을 때, 두둥. 엄마와 누나가 저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저승사자처럼요. 이후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비록 내 잘못이었지만, 어찌 그리 서럽던지 밤새 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다른 엄마들에 비하면 제 엄마는 꽤 합리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다른 현행범들은 등짝이나 뒤통수를 (후려)맞으며 게임 중간에 끌려가기 다반사였는데요. 우리 엄마는 좀 달랐습니다. 꼭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셨습니다. 이왕 돈 넣고 시작한 거 즐기라고 여유를 준 것이죠. 분노를 삭이며 기다려 준 겁니다. ‘어차피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 . .
어쨌든 오락 사랑이 곧 도벽으로 이어졌습니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일이지만 선명하게 기억하는 대화. 형과 씨름을 하며 거실에서 놀고 있었을 때, 외할머니와 엄마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얘, 서랍장에 넣어 둔 돈이 자꾸 없어진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그게 왜 없어져요?”
내가 기억하는 대화는 여기까지. 범인은 나였습니다. 외할머니는 당시 동네 할머니들과 공공근로(?) 비슷한 걸 하고 계셨고 약간의 월급이 나오면 6층 서랍장 맨 아래 칸, 안 입는 옷을 개켜놓은 곳 밑에 월급봉투를 숨겨놓았거든요. 아무도 몰래 그 봉투에서 1만원 씩 빼서 쓴 지가 못해도 1년을 넘었을 겁니다. 당시 국민학생에게 1만원은 엄청 큰돈이었고 권력이었죠.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2만원, 3만원씩 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오락 실력이 형편없음을 탓해야지요.)
형의 허리춤을 잡고 빙글빙글 씨름을 하고 있었으나 몹시 불안하였습니다. 형과 원을 그리며 돌면서 스치듯 엄마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엄마는 범인이 누군지 확신했으나 끝내 나를 의심하거나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때 엄마가 내 도벽을 알아 내어 유난히 민감한 내 수치심이 보호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이다. 하여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90쪽 (웅진닷컴, 2002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네’와 분가를 했습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내려오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엄마는 삼남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으셨는지 ‘반’지하의 ‘반’자를 강조했습니다. (‘반 지상’이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말이지요.)
평소 체벌에 관대했던 엄마가 그날은 유독 매를 들지 않았고, 곧 이사를 결심한 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엄마의 ‘신뢰’ ‘여유’가 아니었으면, 박완서의 말마따나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선과 악은 흑/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51대 49로 갈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생일대의 위기였으니까요.
이사 후 도벽을 싹 고쳤습니다.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라기보다 586컴퓨터가 생겨 오락실엔 더 가지 않게 되었거든요. (강원랜드가 저 멀리에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락중독, 도벽. 어린나이에 누구나 한번쯤 겪을 법한 일상인데요. 일상 속에서 별것 아닌 듯 맞닥뜨린 선악의 갈림(51대 49)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합니다. 특히 나의 민감한 수치심을 적나라하게 노출해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by DodgertonSkillhause
헷갈립니다. 황교안 씨 말입니다. 두드러기로 군 면제를 받았습니다. (물론 치료 증빙자료는 없습니다) 두드러기로 면제를 받을 확률은 91만 분의 1입니다. 그는 1977년부터 1979년, 3년 동안 징병검사를 연기하다 1980년 면제 판정을 받았고, 정상 생활이 불가능했다는 그 두드러기를 극복, 바로 다음 해(1981년) 사법고시에 합격합니다.
청년 황교안은 이러한 적극적 ‘선택’(갈림길)들을 거듭해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됩니다. 거기서 삼성 측이 정치권과 검찰 간부에게 돈을 줬다는 '삼성 X파일'사건을 지휘하게 되는데요. 돈을 주고받은 부자와 권력가들을 무사히 보호하고, 이를 폭로한 기자와 국회의원이 기소됩니다. 이런 류의 '선택'들이 모이고, 또 흘러 그가 총리후보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쯤되면 헷갈립니다. 악한 길이 형통한다는 걸 증명하는 이 나라 고위공직자들을 보면요. ‘걷잡을 수 없이 못된 애’들이 잘나가는 걸 보면요. 그들의 부모는 자녀가 도벽인 걸 알았을 때 이렇게 훈계한 걸까요?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해서는 거짓과 도벽을 더 계발하거라. 작은도둑은 잡아들이지만, 큰도둑은 존경받는 세상이 온다. 큰도둑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날이 온다.”
이범진/월간 <복음과상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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