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
줄탁동시(啐啄同時)
-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1936년 9월 -
첫째로 손 군은 우리 학교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 간역전경주의 선수여서 마라톤 경주의 고(苦)와 쾌(快)를 체득한 자요, 손군이 작년 11월 3일 동경 메이지 신궁 코스에서 2시간 26분 41초로써 세계 최고 기록을 작성할 때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 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하면서도 이 때에 생도는 교사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어 버렸다. 육향교 절반 지점부터 종점까지 차창에 얼굴을 제시하고 응원하는 교사의 양 뺨에는 제지할 줄 모르는 열루(熱淚)가 시야를 흐리게 하니 이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눈물이었다.
김교신이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을 기뻐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1936년이니 일제치하의 한 중간, 나라 잃은 백성이라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그 가슴에 품은 마음이야 어찌 자유 잃은 종의 마음이었을까! 올림픽 우승 후 손기정 선수가 우승의 비법이 ‘작전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더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김교신은 제자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썼다.
동경 고등사범학교에서 지리박물을 전공하고 양정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의 제자가 손기정이다. 체격이 좋고 만능운동가였던 김교신은 스스로도 마라톤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다. 비록 체육교사는 아니었지만 본인의 경험과 사제 간의 신의로 김교신은 손기정 선수의 훈련을 도왔다. 스승과 사제 간의 간절함과 서로간의 믿음이 얼마나 두터웠으면, 늘 함께 해주신 선생님에게 ‘한 발 앞서 얼굴을 보여 달라’ 그리 청했을까. 김교신도 자문하듯이,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싶을 일이다. 선생은 자동차로 앞서 갈 뿐인데 상식적으로 그것이 제자의 뜀박질에 물리적 힘을 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날 스승과 제자는 ‘사제 합일의 화학적 변화’를 느꼈다 한다. 스승의 얼굴을 보며 뛰는 제자의 다리만 힘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필사의 힘으로 뛰고 있는 제자를 보며 자동차 안에 있는 스승 역시 함께 뛰는 양, 뺨이 상기되고 뜨거운 눈물과 함께 제자의 가쁜 숨을 함께 느꼈다.
손기정 선수 동상 (출처: InSapphoWeTrust (https://www.flickr.com/photos/skinnylawyer))
줄탁동시!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이 사자성어가 생각났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 나올 때쯤 되면 안에서 밖을 향하여 껍질을 쪼면서 ‘어디가 얇나, 어디로 뚫고 나가나’ 부리질을 한다고 한다. 그게 ‘줄’이다. 한편 이제나 저제나 아기병아리를 기다리면서 달걀을 살피는 어미 닭이 ‘아하, 요 녀석이 여기를 쪼고 있구나!’ 발견하고 바깥에서 함께 같은 곳을 쪼아주는 것이 ‘탁’이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날 때 생명은 탄생하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넉넉한 살림도 아니요 떳떳한 참가도 아닌,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발달이 남다른 서양인들 사이에 끼어서 인간에게 극한의 한계를 경험하며 마라톤을 뛴다는 것. 선생도 제자도 그 물리적 고통을 알고, 이 소망 없는 상황을 아는데, 그래도 기어이 뛰겠다는 제자의 간절한 ‘줄’에 ‘탁’으로 응답하는 스승은 어느덧 서로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는 체험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날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6분 41초의 세계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같이 뛰어 가능했을 일이다. 두 사람의 진심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으니 가능했을 일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그 기억으로 손기정 선수는 다음 해 베를린에서도 자신의 스승과 함께 뛰었을 것이다. 비록 몸은 함께이지 못했으나 고국에서 스승 김교신도 마음을 모아 제자와 함께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특한 제자가 ‘승패는 작전과 체력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정신의 겸허함에 있더라’ 고백하는 것을 접하며 감사하고 감격했을 일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의 경쟁력이 국제적이라는 소리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손기정 선수 때부터 알아보았을 일이고 김연아, 박태환, 손연재는 장한 배달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도 아니다. ‘줄탁동시’의 사제 관계가 상실된 오늘의 교육 현장 한복판을 지내면서 이 글을 읽자하니 내 심장에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고 아련한 슬픔마저 휘감는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절 소신을 가지고 교단에 섰던 김교신이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은 15년으로 교사 생활을 접고 말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산 신앙과 민족혼을 오롯이 담아 교단에서 전했던 지식은 또렷또렷한 정신과 몸을 가진 젊은 생명들을 탄생시켰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스승 김교신을 회고하며 쓴 책을 읽으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자리에서 올곧고 바른 정신으로 살아낸 사람들이 거기 다 모여 있었다. 아, 한 사람의 힘, 아니 ‘줄탁동시’를 끌어내는 한 스승의 힘이 이렇게나 컸던가!
비교할 수 없이 모자란 스승이지만, 어느덧 강단에 선지 10년. ‘탁’ ‘탁’ 몸짓을 해도 ‘줄’ ‘줄’ 마음과 행동을 맞춰주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한탄을 하다가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본다. 비인격적 개별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몬 이 시스템 때문이야, 사제 관계가 사라지고 학습소비자-정보제공자의 자본주의적 기업이 되어버린 대학이 문제야, 그렇게 속상해하다가, 다시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김교신의 시절에 비할 바이던가, 모국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조차 허용치 않던 그 험한 시절에도 ‘줄탁동시’로 젊은 생명들을 알에서 깨우고 팔팔하게 세상에 내어놓은 참 스승이었는데… 부끄러움과 함께 또한 힘을 얻는다.
마라톤에도 무엇보다 인내력이 제일이다. … 때에 공중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심사에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강한 자를 꺾으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속성, 태초 이래로 계속 ‘탁’ ‘탁’ 하시면서 피조물 간의 화해와 평등의 공동체를 만들 제자들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답이로구나. 그 인내를 기억하며, 그 얼굴을 바라보며, 숨이 깔딱거리지만, 지금이라도 멈추고 그냥 주저앉고 싶지만, 그래도 결국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영원한 스승과 임마누엘하면서 화학적 변화로 살아내야 하는 거구나! 하나님께는 ‘줄’, 내게 온 예쁜 아이들에게는 ‘탁’하면서 그리 하루씩 살아내야 하겠구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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