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일의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현실(22)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가(3)
저는 앞글에서 건강한 부부는 잘 싸우는 부부라 했습니다. 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싸우지 않는 것은 만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만 만나는 성도 사이에는 웃음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신사답게 만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삶에 대해 간섭할 일도, 책임질 일도 없기에 사람 선한 미소로 서로를 마주 대할 수 있습니다.
갈등의 깊이는 관계의 깊이와 비례합니다. 가장 사랑하는 관계가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관계입니다. 서로의 삶에 대해 관심도 크고, 각자의 삶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크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삶은 아내에게 영향을 미치고, 아내의 삶도 남편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의 삶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녀의 삶은 부모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정이 갈등의 화약고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만큼 치열하게 서로를 만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싸우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것은 깊게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깊게, 진실되게 만나고자 한다면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상호성장과 성숙의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싸우는 부부가 건강한 부부입니다. 갈등을 회피하고 수면 아래 은닉하는 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평화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을 품에 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잘 나누고 존중하되,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언제든지 내 생각과 삶의 태도 등을 바꾸어가고자 할 때 부부의 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관계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여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자만심과 나 같은 남자도 없다는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던 저에게 아내와의 치열한 만남은 신앙과 인격훈련 그 자체였습니다. 친환경 먹거리 문제를 비롯하여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 아내와 저의 생각은 충돌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뜻과 시대를 바라보는 눈,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향에 있어서 저와 아내는 한 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거대담론에서는 의견의 합일을 이루어내었지만, 그 거대담론을 이루어냄에 있어 저는 좀 더 현실 중심적 판단을 하였고, 아내는 힘든 현실일수록 붙잡아야 할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중시하였습니다.
이런 무게 중심의 차이로 인해 우리는 곧잘 싸웠습니다.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면서 감정도 개입이 되고, 상대방을 이겨보고자 무리수를 두기도 했습니다. 싸움의 과정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나와 갈등하고 있는 상대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고,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갈등의 상황 속에서 싸움에 집중하다 보면,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별 의미도 없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헛된 목표설정으로 인해 싸움은 이상한 방향으로 치달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도 그런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었습니다.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와 저는 의견의 다름으로 인해 논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에도, 그리고 결혼 후에도 아내와의 갈등의 상황에서 제가 주로 완패를 당하였기에 그날은 꼭 이기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목소리도 높여 가면서 격하게 싸웠습니다. 싸움에서도 망각해서는 안 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사랑은 온데 간데 없이 오직 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을 그때 아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서는 A4용지 두 장과 펜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이 종이에다가 각자 자기가 잘못한 것을 적도록 해요.”
갈등의 상황, 싸움의 상황 속에서는 오직 상대의 잘못에 대해 열거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의 허점, 비논리, 잘못을 낱낱이 들추어내어 집중포화를 퍼붓게 되면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이겨봤자 아무런 유익도 소득도 없는 부부싸움에서도 상대방을 타도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부들이 논쟁하는 대부분의 주제는 삶의 작은 내용에 대한 것들입니다. 세상 어떤 부부도 전 세계적 주제를 가지고 논쟁하지는 않습니다. 세계평화의 문제, 기근의 문제, 생태계의 파괴문제를 가지고 싸움하는 부부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작은 불씨에서 출발하지만 감정이 개입되고 고집이 작동하면서 부부의 싸움은 큰 전쟁으로 진화를 합니다. 갈등이 전투가 되고, 전투가 전쟁이 될 때 자기반성은 사라지고 오직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만이 주요목표가 됩니다. 타자의 책임을 집중 추궁하는 방식으로 싸움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는 타자 책임 추궁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기 책임 추궁적인 방식의 제안을 하였습니다. 갈등의 상황에서 상대방이 아닌 자기가 잘못한 것만을 쓰자고 한 것입니다.
양진일/가향공동체 목사, 하나님 나라 신학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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