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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by 한종호 2015. 6. 24.

한종호의 너른마당(26)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세상이 성자 프란체스코라고 부르는 사나이입니다. 제가 살았던 시대는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엽입니다. 지금으로부터 7백 년 전쯤이었지요. 저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 덕에 부족한 것 없이 살았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느 날 하나님의 역사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세상이란 가난한 사람들 속에 숨 쉬고 있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거리의 걸인들과 함께 구걸하면서 저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순수한 영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우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땅 부자가 되고 있던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스러운 표정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뭐든 눈에 띄는 것이라면 자기 것으로 삼아 배를 불리고 있던 욕심이 풍기는 악취와는 다른 내면의 향기를 저는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의 옷과 몸에서 나는 냄새를 악취라고 하면서 고개를 돌렸지만, 그보다 더한 악취는 다름 아닌 욕심 덩어리가 되고 있던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자발적 가난”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세상에서 자발적 가난이란,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뜻을 온전하게 따르는 삶의 결단입니다. 가난은 누구나 싫어하고 저주라고까지 여기지만, 저는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위로받고, 탐욕에 찬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리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부유하게 자란 제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을 때 주변은 놀라워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편안하게 살아도 될 터인데 무슨 어리석은 짓이냐고들 말이지요. 그러나 제가 택한 가난은 저도 미처 생각지도 않게 부자들의 탐욕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난한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를 보도록 했습니다. 그걸 본 젊은이들이 저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수도원 공동체가 되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이 모여들어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로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존경받고, 가난하면서도 도리어 그 영혼이 부하고, 가난한데 무력하지 않은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가난이 주는 고통을 넘어서 가난으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맑아지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과 타협하는 일은 결코 생겨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잃을 것이 없으니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두렵지 않았고 어떻게든 움켜쥐겠다고 욕심을 부릴 일이 없으니 그 마음이 초조하거나 절망할 일도 없었습니다. 가난은 제게 평화를 주었고, 물질은 소박하고 영혼은 고귀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게 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제가 21세기의 한국에 와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부자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건 이미 7백 년 전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직도 그 탐욕의 성채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세상의 영혼이 부해지는데, 교회가 부자가 되니 세상의 영혼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가난이 세상의 욕심을 부끄럽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교회의 부로 말미암아 정작 부끄러워지는 것은 교회인 것을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처럼 굳이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문제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교회는 그 빈곤의 현실에 눈을 돌리기보다는 부자가 되는 길로 가는 통로처럼 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가난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영혼이 타락하는 것은 가난의 고통을 이겨내는 것보다 더 심각한 죄의 늪에 빠지게 하는 첩경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좇으면서 큰 교회를 짓고 목회자가 수억 원의 연봉을 받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저 프란체스코는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한없이 나누어 주기만 하셨던 예수님이 물질적으로 부자였기 때문에 그러셨나요? 우리는 부자 예수를 기억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남기신 것이 거대한 교회건물이었나요? 옷 한 벌 달랑 남기고 가신 예수님에게서 자발적 가난의 증거를 그대는 목격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데도 한국의 교회와 교회 지도자는 그런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그대들은 눈이 멀었고 가장 큰 것을 놓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죄스럽게 아름다운 비단으로 차려입은 부자는 하나님의 빈자이고, 누더기를 입어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보다도 더 가난한 빈자입니다.

 

중세 유럽의 교회는 그렇게 부자로 살다가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재산이 너무 많아지면서 이것이 세속의 권력자들에게 공격당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재산을 빼앗기고 나서야 비로소 눈을 떴던 것이지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로 타율적 가난을 강제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는 재산과 권위만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잃었고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바라기로는, 한국교회 안에서도 새로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그 뜻은 어떤 세상의 힘도 유혹하거나 짓밟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기적이던 사람들이 공동체적 연대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지면, 그걸 지키기 위해 그 영혼은 하나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근본적인 잘못은 가치체계의 맨 꼭대기에 돈을 올려놓은 거지요. 진리와 사랑 대신에….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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