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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

지리산가리산, 한국교회(?)

by 한종호 2015. 7. 8.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7)

 

지리산가리산, 한국교회(?)

 

 

인간은 시간의 동물이다. 많은 동물들 중 인간만이 유별나게 시간을 미리 느끼고, 그것을 궁금해 하며, 또 그 때문에 고민한다. 보통 우리 주변의 동물들은 지금의 생존을 가장 중시한다. 물론 몇몇은 내일의 먹을 것을 위해 음식을 저장한다. 나무 위에 걸쳐놓거나 땅 속에 묻어놓거나, 아예 몇 개의 위장에 나누어 보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지 인간처럼 일주일, 한 달, 1년, 아니 그 이후까지 로드맵을 만들어 준비하고 고민하고 안타까워하는 동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어쩌면 이는 인간만이 지닌 특권이요 혹은 본질적 천형(天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요상한 버릇이 인간에게 있다. 인간에게 자명종은 필수품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외부의 도움을 받는 동물은 아마 인간뿐일 것이다. 자명종에, 모닝콜에, 핸드폰에 갖가지 장치를 해두고 우리는 잠을 청한다. 그렇게 ‘지금’ ‘여기’ 살고 있으면서도 ‘내일’, ‘저기’를 생각해야만 하는 인간은 시간이라는 천형 속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문제다. 이 점에서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 역시 끊임없이 내일을 묻고, 미래를 확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또 우리를 기다린다. 인간은 분명 시간을 인지하고 미래를 생각하지만, 그 내일은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내일은 언제나 우리를 불안케 한다. 이 불안은 지금 편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공평하게 작동된다. 오늘 풍족하다면 내일의 궁핍을 걱정하고, 지금 어렵다면 그것이 더 심해질까 우리는 또 내일을 근심한다. 그러니 시간의 흐름을 알아챘지만 그것의 지향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내내 불안하게 살아간다. 교회를 바라보는 지금 우리 신앙인의 마음도 그러하리라. 신앙인 역시 인간이므로.

 

게다가 지금 한국교회는 적잖은 곤란함에 빠져있다. 안으로는 90년대 이후 둔화된 성장세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구호처럼 외치던 1200만 성도는 지난 2005년 인구센서스 조사로 허수임이 밝혀졌다. 멀게 갈 것도 없이 성결교회 신자 수 역시 좀처럼 시원하게 위로 뻗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몇몇 거점교회들의 증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대형 교회의 성장 역시 신자들 간의 이동에 의한 것이지 순수 입교자의 수는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거기에 더해 외부에서 가해오는 교회에 대한 평가는 심하다 못해 아프다. 참으로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단어가 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고, 또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거의 바닥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이러니 교회는 지금 미래를 고민한다. 그것도 매우 아파하고 불안해하며 미래 한국 교회의 그림을 그려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눈여겨보며, 또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미래를 말하는 이들의 소리에는 익숙한 단어 하나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이 이상야릇한 단어가 연신 그들 입에서 튀어나오며 ‘한국교회의 미래는 포스트모던을, 혹은 그 사조가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얼마나 잘 준비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그 말대로라면 포스트모던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우물쭈물한다. 이 포스트모던이라고 하는 것이 매우 아리송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힘주어 말하고 있긴 하지만 좀체 손에 잡히지 않고, 또 머리에 걸리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쩌든지 이 포스트모던을 꼼꼼히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미래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궁금증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러고 보니 이 포스트모던에 대한 대응 내지 대비도 제각각이다. 어느 쪽에서는 포스트모던이야 말로 ‘반-기독교적’이고 ‘반-유신론적’이기 때문에 가급적 멀리하고 또 확실히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이미 현대 사회가 포스트모던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시민들 역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포스트모던적이 되었고, 따라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 역시 이 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면 모두 타탕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포스트모던의 정체는 짙은 안개 속 풍경처럼 여전히 아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포스트모던이 좋다는 것인가, 나쁘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또 헷갈려한다. 같은 문제에 대한 각기 다른 처방이니 어느 한쪽은 맞거나 틀린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떠오르는 물음 하나는 ‘지금 한국사회가 포스트모던인 것은 맞는가?’이다. 사실 포스트모던은 인식의 문제이다. 중세 이후 철저하게 인간 이성을 지배하고 있었던 일원론적 세계 이해에 대한 처절한 거부의 몸짓을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서구 사회는 하나 된 세계를 경험하고 또 그 안에서 살았다. 서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경험적 ‘세계’(World)를 가능하게 했던 로마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선택한다. 로마를 통해 인류는 ‘세계’, ‘우주’, ‘보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또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마가 다양한 민족, 인종, 문화로 구성된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통합으로 인류는 거대한 단위의 ‘한’ 국가, ‘한’ 문화권, ‘한’ 신앙을 ‘역사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중세 유럽을 이끄는 ‘그리스도교 보편국가’(res publica christiana)의 기초를 놓았다. 그 이후 산업혁명과 계몽의 시대를 건너 인간 이성과 개인의 주체를 강조하는 모던의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그 중심을 꾀는 생각은 하나의 관점으로 세계를 관통하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일원론적 사상이었다. 그것이 신앙이든, 이성이든 간에 세계는 하나의 목적 아래 진보적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거친 반항이 서구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싹트기 시작한다. 물론 멀리 잡으면 기존 관념론, 그리고 이성 중심의 철학들을 허물어뜨리려 망치를 휘두른 니체(1844~1900)로부터 포스트모던의 조짐을 읽으려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서구 사회의 본격적 포스트모던의 시작은 20세기 후반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골자는 일원론적인 인식에서 다원론으로 전환이다. 세계를, 우주를, 역사를 이제 하나가 아니라 여럿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핵심이다. 따라서 교회 역시 이 변화된 현대인의 의식구조를 잘 감안하자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하나의 생각, 하나의 관점, 하나의 신앙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제 평균적인 생각과 생활방식을 지닌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이질적인 이들의 집합이 현대, 그리고 미래의 사회이기 때문에 교회 역시 충분히 대비와 준비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곧바로 다른 물음 하나가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하나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개의 시각이라면 그러면 우리 사회는?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사실 포스트모던의 속성과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포스트모던적’이었다.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던은 바로 지금이 아니라 줄잡아 이미 백여 년 전에 시작되었고,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서구교회가 경험했던 포스트모던적 충격 하에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고, 또 그에 대한 대비를 운운하는 것은 진단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그리고 이런 오류는 시대와 사조 구분을 아무런 반성이나 치밀함 없이 서구사회의 것을 그대로 한국에 이식한데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조 사회는 서구의 중세와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하나의 신앙체계로 구축된 ‘종교국가’였다. 즉 주자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일원론적인 세계였다. 그 사회에 서구와 일본세가 끼어들면서 새로운 가치관이 이미 19세기 중반이후 강하게 조선 사회를 강타했다. 그리고 그런 일원론적 세계의 붕괴 와중에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바로 기독교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미 전래 초기부터 포스트모던의 ‘환경요인’ 중 하나로 한반도에 들어온 셈이다. 서구교회가 포스트모던이라는 환경에 대응하야 하는 일원론 주체라고 한다면, 한국교회는 그 반대 입장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이미 포스트모던적 환경에 잘 적응했고, 또 그 안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여 년이 지난 지금 또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하며 변화할 것을 강조하니 한국교회는 난감할 수밖에! 이미 백 년 전에 내린 처방을 다시 써먹으려 하는 상황이 답답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따라서 우리는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변화된 환경, 바뀌어버린 시민들 때문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는 한 번도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혹 그에 버금가는 목적론적 이성 중심주의를 가지고 이 사회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있었다면 성리학적 세계관이었고, 또 한 번도 기독교가, 교회가 이 사회의 주류였던 적은 없다. 물론 20세기 후반 들어 한국 여론 지배층의 많은 수가 신자화 되긴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교회는 20%를 돌파하지 못한 소수였고, 이 수치는 당분간 급격하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정인데 우리는 또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던 서구 사회의 진단과 처방을 별다른 고민도 없이 사용하려 든다. 오히려 이런 성급하고 무반성적인 진단과 처방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좀 체 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포스트모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종교란 말은 라틴어 ‘religio’를 번역한 것이다. 키케로는 이 말을 ‘다시 읽는다’(re-legere)로 푼다. 그리고 락탄시우스는 ‘다시 묶는다’(re-ligare)라 해석한다.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것을 종교라 본 것이다. 이런 풀이는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을 ‘통’(通)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곤란함은 ‘소통’의 문제이고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닐까. ‘전래 초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성도들의 절규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가?’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열정을 지금 우리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찾고 확인해야 할 것은 21세기 서구교회의 사례가 아니라 19세기 후반 한반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고백의 기쁨을 한국사회에 전파하기 시작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이며, 바로 그들의 영성에서 지금 한국교회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귀중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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