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4)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위한 안식일 계명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사람이 창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거기서는 신들의 세계에도 지위가 높은 신과 낮은 신의 계층구분이 있었는데 지위 낮은 신들은 3D 업종에 속하는 고된 일들을 맡아 했다는 거다. 하루는 이들이 일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 못 살겠다고 높은 신들에게 불평을 터뜨린다. 높은 신들이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어서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사람은 낮은 신들이 하기 싫어하는 3D 업종 고된 일을 대신 하게 하려고 높은 신들이 창조했다는 얘기다.

 

안식일에 관한 계명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고대 중동 어디서도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계명이다. 어디서도 신이 사람들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계명을 준 유례가 없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야훼 너희 하느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야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다(출애굽기 20:8-11).

 

이 유래와 시행세칙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계명들과 구별된다. ‘기억하라’는 말은 안식일을 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의미와 취지를 명심하라는 뜻이겠다.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지키는지를 아는 게 이 계명 이해의 관건이다.

 

계명을 지키려면 우선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라”고 했다.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엿새를 어떻게 지내는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 엿새는 안식일을 돋보이게 하려는 들러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소중한 날들이다. 따라서 계명의 준수는 안식일뿐 아니라 엿새를 어떻게 지내는지와 맞물려 있다. 엿새는 “모든 일을 힘써 하는 날”이다. 그러지 않으면 안식일을 어떻게 보내든 거룩하게 지냈다고 할 수 없다.

 

다음으로 “그러나 이렛날은 야훼 너희 하느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안식일은 사람의 안식일이기 이전에 ‘야훼 하느님’의 안식일이다. 안식일을 제정한 분도 하느님이고 첫 안식일에 쉬신 분도 하느님이므로 그 주인은 마땅히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 이유도 하느님이 그 날 쉬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천지창조와 사람의 노동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음이 암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안식일에 누가 쉬어야 하는지 밝힌다. 사람과 동물을 막론하고 노동력을 가진 생명 있는 존재는 모두 쉬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계명이 갖고 있는 래디컬한 평등주의가 있다.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의 차별이 존재했던 시대에 안식일만이라도 차별 없이 모두 쉬라는 계명은 남녀차별과 계층구별 이전에 생명 있는 모든 존재를 하느님이 사랑하심을 보여준다. 이 계명은 ‘명령’이 아니라 ‘복음’으로 들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쉬라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계명이 불편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복 주고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사람도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종교적 의무의 냄새가 강하게 느껴지고 불편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거룩하게 지키는 걸까?’라는 물음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죽여라!

 

하지만 이 계명이 그렇게 평온하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안식일 관련 사건과 얘기들을 보면 계명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더 많이 준다. 예수 당시 유대교가 안식일을 이해했던 방식을 보면 그 날은 평화롭게 안식하는 날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들로 가득한 골치 아픈 날이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이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씻어주지만 그 한 마디로 안식일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던 속박과 굴레가 없어졌을까?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라는 율법(출애굽기 31:14-15)도 있지 않은가. 안식일에 일했다고 죽어야 한다면 그 계명은 ‘복음’일 수 없겠다. 안 그런가?

 

매일 놀고먹는 사람에게는 이 계명이 ‘복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안식일 하루의 안식이 꿀맛일 게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왜 그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왜 안식일이 뭔가는 반드시 해야 하고 또 뭔가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날이 된 걸까?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했다는 대목에서 어떻게 해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서 복을 받을 수 있을까를 궁리했을까? 그래서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에 대한 기나긴 목록이 만들어졌을까? 그러니 매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계명은 족쇄가 됐고 제의적 의무에 집중하게 됐던 걸까? 이로써 가장 부담이 덜 되어 보이는 계명이 오늘날에는 가장 까다롭고 이해하기 어려운 계명이 됐다.

 

필자가 중고등학생 때는 주일에는 오락도 하지 말고 돈을 주고 뭔가를 사지도 말라고 배웠다. 공부도 해서는 안 됐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요즘도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수주일’을 외치는 교회는 많지만 그 의미는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그저 주일예배(미사)만 빠지지 않으면 주일성수한 걸로 친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뭘까? 이 법은 이미 사문화됐을까? 영화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는 안식일 법의 현재적 의미가 뭔지 곱씹어보게 해준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관한 이야기’

 

택시 운전사 야누스는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한 크리스마스이브에 야누스가 산타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 행복한 가정임을 보여주려는 듯이. 게다가 부부는 아이들을 재운 다음 자정미사에 참석한다.

 

에바는 숙모를 보러 양로원을 방문한다. 거기도 성탄절 분위기지만 숙모는 혼자 쓸쓸히 자기 방에 누워있는데 그녀를 알아보지만 정신이 흐리다. 이를 보는 에바의 심정은 쓸쓸하기만 하다. 성탄 전야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그녀도 자정미사를 보러 성당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야누스를 본다. 둘은 3년 전엔 연인이었다. 각자가 가정이 있는 불륜관계였지만 말이다. 그 관계는 둘이 같이 있다는 걸 누군가가 에바 남편에게 전화로 알리는 바람에 깨지고 말았다.

 

미사가 끝나 야누스 부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에바의 전화지만 야누스는 아내에게 택시를 도둑맞았다고 거짓말하고 그녀를 만나러 나간다. 에바도 야누스에게 거짓말을 한다. 남편이 실종됐으니 그를 찾아달라고 말이다. 둘은 에바의 남편을 찾으러 한밤중에 이곳저곳을 다닌다. 그 동안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둘은 서로 찌르는 말을 주고받는다. 결국 남편을 찾지 못하고 에바의 아파트로 갔는데 거기서 야누스는 에바가 거짓말했음을 알게 된다. 에바가 그럴 줄 알고 화장실에 남자용 칫솔과 면도기를 갖다 뒀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은 3년 전 사건에 대해 얘기한다. 그때 야누스는 가정을 버리고 에바에게 가려 했는데 불륜 현장이 발각됐을 때 그녀가 자기를 버리고 남편에게 갔던 데서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한편 에바는 그 사건 후에 야누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복하게 잘 산다는 데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금은 남편과 아무 문제도 없다고 말하지만 야누스는 그 말이 거짓말인 걸 알게 된다. 화장실에 있는 면도기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녹슬어 있음을 봤기 때문이다.

 

에바는 그날 일이 자기에겐 일종의 게임이었다고 말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일곱 시까지 야누스가 자기와 함께 있다면 모든 게 잘 될 걸로 믿고 살고 야누스가 오지 않거나 일곱 시 전에 떠나면 자살하려고 했다는 거다. 둘이 하루 밤을 같이 지냈으니 자살할 필요가 없어졌다면서 그녀는 알약을 버린다. 한편 야누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는 소파에서 선잠을 자다가 깨서 그에게 묻는다. “에바였어?” 그녀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남편이 왜 한밤중에 나갔는지를.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가 “또 그럴 거야?”라고 묻는다. 야누스는 “다시는 안 그래.”라고 대답한다.

 

 

 

 

안식일은 시간의 성전(a sanctuary in time)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안식일 제도의 근거가 하느님의 창조행위라고 말하고 신명기 5장의십계명은 그 근거를 출애굽 사건에 둔다는 차이가 있다.

 

너희는 기억하여라.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 내었으므로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한다(신명기 5:15).

 

왜 두 텍스트는 안식일의 근거를 다르게 말할까? 흔히 안식일의 근거로 창조행위와 출애굽을 나란히 놓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로 보면 창조행위가, 이스라엘로 좁혀서 보면 출애굽이 근거라는 거다. 하지만 하나의 제도가 연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에 동시에 기반하고 있다는 설명은 부자연스럽다. 성서 편집자가 둘을 그대로 뒀다면 거기에서 모종의 연관성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다. 곧 쉬는 날인 거다. 어떻게 하는 것이 쉬는 걸까? 여러분은 쉴 때 어떻게 쉬는가? 잠을 자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쉬는 것인가? 그럼 아무 것도 안 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사람은 깨어 있는 한 늘 뭔가를 하고 있지 않나? 에너지를 사용하는 한 뭔가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하느님이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이레 째 쉬었다는 말은 창조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이레 째 되는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뜻은 아닐 게다. 하느님에게 쉰다는 것은 녹초가 되어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직접 만든 만물을 즐기고(enjoy) 감상하고(appreciate) 관조(reflect)한 게 아닐까? 안식은 곧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에게 안식도 단순히 육체적 피로를 푸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세계와 자신이 한 노동의 결과물을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함으로써 하느님과 소통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미사라고 부른다. 예배/미사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이고 ‘축복’이며 ‘선물’이고 ‘은총’이다. 안 그런가?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야훼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 있었다(출애굽기 5:3). 곧 히브리 노예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며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려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냈다. 야훼는 히브리인들의 뼈저린 경험을 잘 알기에 안식일에는 그 누구도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줬다. 출애굽기와 신명기가 다르게 말하는 안식일의 근거가 여기서 만난다. 안식과 창조가 예배/미사에서 만나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스라엘은 이 계명을 늘 잘 지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가장 철저하게 지켜졌던 때는 바빌론 포로기라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제사를 지내니 못하게 됐을 때 그 자리를 안식일 제도가 차지했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안식일 계명이 ‘의무’로 인식되기 시작했단다. 계명의 준수 여부가 신앙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어 예수 시대까지 이어졌다는 거다.

 

예수 시대에 이 계명은 피곤한 노동에서 사람을 해방해서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누리고 감상하고 관조하며 하느님과 소통하게 하는 은총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안식일에도 일해야 했던 사람들과 안식일에는 해서는 하면 안 되는 6백여 가지 금령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사람들을 얽매는 속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일부러 안식일에 만성병 환자를 고쳐준 걸 비롯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의도적으로 함으로써 안식일의 신학이 ‘공로의 신학’이 아니라 ‘은총의 신학’임을 일깨워줬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세계를 즐기고 감상하고 관조하면서 하느님이 우주의 주님임을 고백하는 날이고, 세계가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하느님의 작품임을 일깨우는 표징이 되는 날이다.

 

유대교 랍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은 안식일을 ‘시간 안의 성전’(a sanctuary in time)이라고 불렀다. 안식일 계명은 시간을 거룩하게 여기는 종교인 유대교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계명이다. 성서에서 시간은 양적인 개념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의 다양한 성격에 주목하는 거다. 성서에 똑같은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은 다 다르다. 각각의 순간은 그만의 독특한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거룩한 사건들, 곧 ‘시간 안의 성전’에 주목하라고 한다. 안식일은 그 중 가장 거룩한 시간이고 가장 위대한 성전이라는 거다. 공간을 차지한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론과 로마제국에 무너졌지만 시간 안의 성전은 아무도 파괴하지 못한다. 안식일은 시간의 거룩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성서에서 ‘거룩’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구절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한 출애굽기 20장 8절이다. 하느님은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하느님께서 처음 거룩하게 만든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구약성서 창조 이야기는 공간에 ‘거룩함’이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데 이 사실은 특정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거기에 ‘성전’을 지은 고대 중동문명과 대조된다.

 

다음으로 하느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6)고 말했다. 안식일 다음에 하느님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장소’가 거룩하게 된 때는 황금송아지 배교(背敎) 사건 후에 ‘성막’을 만들라고 명했을 때다. 곧 하느님께서 가장 먼저 거룩하게 하신 것은 안식일이란 ‘시간’이었고 그 다음은 ‘사람’이었으며 마지막이 성막이란 ‘공간’이었다는 얘기다. 역사적으로도 성전 파괴와 함께 거룩한 장소가 사라졌고 그리스도교의 탄생과 더불어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지만 거룩한 시간으로서 안식일(주일)의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야누스와 에바의 안식일

 

안식일은 생명과 자유로 충만한 시간이다. 그게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계명인 까닭이 여기 있다. 안식일은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계명은 엿새 동안의 노동의 궁극적인 목적이 사색과 관조와 예배임을 상기시킨다. 키에슬롭스키는 추상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안식일 계명이 3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듯 그 의미와 가치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야누스와 에바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함께 지냈다. 둘은 불륜이긴 했지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맘은 편치 않았고 살얼음판 걷듯이 아슬아슬했을 거다. 불안한 관계는 전화 한 통으로 깨졌다. 그가 누군지 밝히지 않지만 야누스의 아내였음에 분명하다. 불륜 현장에 에바 남편이 들이닥쳤을 때의 일은 둘 모두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일 후로 에바는 남편과 헤어져 혼자 살았다. 더욱이 야누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보여서 자기 처지가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음은 죄책감, 후회, 분노, 남 탓하기, 속임수 등 나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도박을 벌일 결심을 했다. 야누스를 크리스마스이브에 불러내서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지내는 데 성공하면 새 출발을 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면 삶을 스스로 접겠다고 말이다. 한편 야누스가 에바를 만나기로 한 이유는 오래 된 숙제를 하기 위해서였다. 확인해봐야 달라질 건 없지만 그래도 에바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둘 모두에게 그날 밤은 불편하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줄곧 날카로운 긴장이 흘렀다. 야누스의 행복이 에바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건 아닐 게다. 그가 불행했다고 그녀가 행복해지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그녀의 소원은 누군가가 자기와 함께 있어주는 거였다. 자길 못 알아보는 숙모를 양로원에서 만난 후 크리스마스이브를 혼자 보내야 하는 현실은 그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같이 있어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런데 미사 때 우연히 야누스를 본 거다. 그에게 구원을 청했다. 야누스는 이런 정황을 모른 채 묵은 감정의 찌꺼기를 씻으려고 그녀를 만났다. 그날 밤은 둘 모두에게 우연히 다가온 ‘횡재’ 같은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혼자 쓸쓸히 보내야 했기 때문일까? 에바가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기로 결심한 날이기 때문일까? 에바는 거의 ‘무장해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야누스가 같이 있어줌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에게 구원이 됐던 것이다.

 

우리의 안식일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져있는 양을 건져줄까 말까를 두고 논쟁을 벌였단다(마태 12:11 이하). 양은 구해줘도 괜찮지만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안식일을 어기는 게 됐다. 예수는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잘못된 계명 해석에 쐐기를 박았다. 영화는 외로운 한 영혼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옛 애인이 하루 밤을 같이 지냄으로써 그녀에게 구원이 되어준 얘기다.

 

안식일 계명은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렌즈라고 볼 수 있다. 그걸 의무로 여기면 그날 해서는 안 되는 6백여 가지 금령을 만든 바리새인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면 생명 충만한 삶에로 부르는 하느님의 초대장이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하면 안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사람은 나와 남을 가르고 주인과 종과 나그네를 엄격하게 구별하지만 하느님의 선물인 안식일에 대해서는 그런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과 동물도 차별하면 안 되는 날이 안식일이다.

 

어느 전쟁터에서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자 서로 싸우던 군인들이 모두 총질을 멈추고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 시간만은 서로 기도해주고 축복해 줬다는 거다. 세상을 전쟁터라고 부른다. 싸워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고 남을 딛고 올라서지 않으면 낙오되기 십상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그래서 현대인은 쉴 때도 맘대로 쉬지 못하고 불안해하지 않는가. 휴가를 스스로 반납하고 일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서 잠시 물러나라고 말함으로써,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잠시 싸움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으라고 말함으로써, 어느 주식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느 화폐가 오르고 내리는지 신경 곤두세우고 살피는 일을 잠시 멈추고 은은한 오르간 연주와 어린이의 찬송이 울리는 예배당으로 우리를 초대함으로써 안식일 계명은 실상은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와 인생을 보는 눈을 바꾸라고 말이다.

 

안식일은 세상의 번다한 일로 피곤하고 지친 영혼이 쉼을 누리고 새 힘을 얻어 그 번다한 일을 더 잘 하라는 날이 아니다. 안식일은 예배/미사하는 날이다. 지금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예배/미사다. 안식일 하루 쉰다고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지도 않고 세상이 지옥이 되지도 않으며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우주와 인생의 질서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고 우리 하느님은 능동적이고 사랑이 충만하시며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노력하고 성취하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의 고임과 은총을 받으며 살고 있다. 안식일은 이 중요한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계명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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