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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몽상과 꿈 사이에서

by 한종호 2015. 12. 24.

김기석의 톺아보기(17)

 

몽상과 꿈 사이에서

 

 

일주일에 하루, 새벽 기상 시간에 매이지 않기로 한 아침, 모처럼의 숙면을 꿈꿨지만 몸에 내장된 기억은 의지보다 강했다. 어김없이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침대 속에서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따라가며 30분 쯤 뒹굴거리는 호사를 누렸다. 아내가 아침 6시만 되면 트는 FM 라디오 방송을 대신 틀고, 아침을 준비하여 함께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문득 세월의 무상함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속으로 ‘지금 이곳이 참 낯설다’ 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 나왔다. 존 레논의 <이매진>이었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봐요, 하려고만 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죠.

저 아래 지옥이 없고, 저 위로 푸른 하늘만 있을 뿐.

상상해봐요,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을.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죠.

죽일 일도 목숨을 바쳐야 할 일도 없고, 종교도 없을 거예요.

 

노래는 이어졌다. 존 레논이 달콤한 목소리로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고, 그건 나 혼자만의 꿈은 아니라고, 당신도 그 꿈에 동참하라고 말할 때 가슴이 뭉클해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홉스의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는 나날이다. 드라마틱한 일들이 날마다 벌어지고, 사람들은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 시대는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을 정직이라 말하고, 남을 짓밟는 것을 경쟁력이라 말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쥐어짜는 것을 효율성이라 말한다.

 

 

                                    판화/류연복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히브리의 지혜자인 코헬렛의 말이다. 그는 마치 현대인들의 정황을 보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다.

 

삶이 각박하다고 느낄 때, 갈짓자 행보에 스스로 실망할 때, 역사의 전망조차 불투명할 때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꿈꾼다. 주전 8세기 중근동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을 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들이 더 이상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억압과 착취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그들은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노는 세상을 꿈꾸었다. 어처구니없는 꿈이다. 그 꿈은 실현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꿈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한다. 그것은 그런 세상의 꿈이 성취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우리들 속에 심겨져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것은 “애써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므로 크다(夷) 하고, 애써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기에 드물다(希) 하고, 애써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므로 정묘하다(微)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희망도 그러하다.

 

꿈을 꾸는 이들은 불온하다. 기존질서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꿈꾸는 이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세상에 틈을 만들어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환기시킨다. 기존질서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불온하다 하여 박해하거나, 몽상가라 하여 비웃는다. 그것은 그들의 내면에 깃든 당혹감과 불안함의 역설적 표현이다.

 

꿈과 몽상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다른 삶의 가능성을 꿈꾸고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이들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다른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몽상가들이다. 극심한 아파르트헤이트의 나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속으로 분노하고, 때로는 온건하게 때로는 폭력적으로 그 상황을 돌파해보려 했지만 그런 불의한 체제가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권회복을 위해 싸우다가 27년간 옥고를 치른 넬슨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라는 오래된 가치를 붙들고 자유를 향한 먼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모든 인종이 함께 어울려 사는 무지개 나라의 문턱에 당도했다. 한 사람이 품은 담대한 희망과 그 희망을 현실화하기 위한 고투가 빚은 열매이다. 희생이 없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존 레논의 노래를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우리는 지금 몽상과 진정한 꿈 사이를 걷고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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