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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피 묻은 손으로는 안 된다

by 한종호 2016. 4. 28.

구약성서의 대량학살(3)


피 묻은 손으로는 안 된다

역대기상 22:7-10 역대기하 25:5-12


1만 명이나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대량학살에 대해 세 번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주로 다룰 텍스트는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이지만 오늘은 역대기상과 역대기하에서 한 대목씩을 읽을 텐데 그것들을 본격적으로 해석할 의도는 아니고 다만 이 두 구절이 대량학살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역대기하 25장은 남 유다 왕 아마샤가 에돔과 전쟁을 벌이는 얘기입니다. 아마샤는 이 전쟁을 위해 북이스라엘에게 은 1백 달란트를 지불하고 군인 십만 명을 데려왔습니다. 북왕국 군인들을 용병으로 사왔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 두 나라의 관계에 묘한 구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둘로 나뉘었지만 같은 조상을 둔 형제나라라고 알고 있는데 돈을 주고받으며 군인을 매매하는 관계라니 말입니다. 형제국가인가 뭐 이런가 싶다가도 현재 우리나라 남북관계를 생각해보면 우리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기분이 씁쓸합니다. 


그런데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하느님의 사람’이 아마샤에게 북왕국에서 온 용병을 돌려보내라고 조언했습니다. 북 왕국 군인들과 함께 전쟁을 하면 하느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거라며 말입니다. 아마샤는 이미 북 왕국에 지불한 돈이 아까웠지만 그들과 함께 전쟁터에 나간다면 하느님이 도와주지 않은 거란 말이 두렵기도 했거니와 자기 말을 들으면 은 1백 달란트보다 더 많은 걸 하느님이 줄 거란 하느님의 사람의 말을 믿고 북 왕국 군대를 돌려보냈습니다.


과연 그가 옳았습니다. 유다군대는 북 왕국 용병의 도움 없이도 전쟁에서 이겨 에돔 군인 1만 명을 죽였고 또 별도로 1만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만 명의 포로들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였답니다. 그렇게 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에돔 사람들의 ‘몸이 으스러졌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국제협정은 현대문명세계의 약속이니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는 짓은 두말할 것 없이 매우 잔인한 짓입니다.


누가 이런 잔인한 짓을 잘 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전쟁 중이라 해도 말입니다. 전쟁터에도 전쟁터의 윤리라는 게 있습니다. 전쟁 중에도 해서는 안 되는 행위가 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전쟁포로는 주로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유다군대가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인 에돔 사람들은 항복한 포로였습니다. 죽인 경우도 있었지만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죽이는 짓은 유례없습니다. 그것도 1만 명씩이나 말입니다.


더욱 불편한 사실은, 하느님이 이 전쟁에서 유다군대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과 이런 잔인한 행위에 대해 아마샤를 징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징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비난을 했어야 했는데 성서엔 그런 얘기도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런 잔혹한 짓을 하느님이 허용했거나 묵인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일러스트/고은비


너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려서 성전을 지을 수 없다!


역대기상 22장에는 다윗이 왜 하느님의 성전을 짓지 못했는지 설명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그 이유를 자기는 전쟁을 많이 치러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사람은 성전 지을 자격이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윗이 누굽니까? 그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왕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모아 하나의 통일된 왕국을 건설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이룬 왕이지요. 그는 골리앗과의 대결에서 이겨서 사울에게 발탁되어 장군이 됐고 그 후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대중적 인기가 사울 왕을 뛰어넘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인자가 1인자보다 더 많은 관심을 끌고 사랑을 받으면 탈이 나는 법, 그는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왕의 사위가 됐지만 그것도 그의 생명을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고 주변족속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갔는데 그 과정에서 손에 많은 피를 묻히게 된 겁니다.


나라가 안정되자 그는 하느님을 위해 성전 건축을 계획했습니다. 자기는 화려한 궁전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초라한 천막에 뒀기에 맘이 편치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 나단에게 상의했더니 나단은 흔쾌히 성전 건축을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단의 실수였습니다. 그날 밤 하느님이 나단에게 나타나서 성전 건축을 금한 겁니다. 낮에 나단이 다윗에게 한 대답은 야훼의 뜻이 아니었던 겁니다.


역대기에 따르면 다윗은 성전을 지으려고 자재와 건축 전문가들도 모두 준비해놨습니다. 그런데 야훼는 다윗의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전쟁에서 너무 많은 사람의 피를 손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유가 그럴듯합니까? 많은 사람을 죽인 자는 하느님의 성전을 지을 수 없다는 얘기가 이치에 맞는가 말입니다. 그럴듯하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다른 문제를 야기합니다. 다윗이 벌인 전쟁은 하느님이 함께 했던 전쟁입니다. 하느님이 친히 허락한 전쟁이었고 대개 하느님이 그와 함께 했으므로 승리했던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전을 짓겠다니까 그가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 지을 자격이 없다니, 이게 이치에 맞습니까? 다른 신의 명령을 받아서 전쟁한 것도 아니고 다른 신의 힘을 빌려서 승리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너는 너무 많은 피를 손에 묻혔으니 내 성전을 지을 수 없다!”라니 이게 무슨 말이냐는 겁니다.


성서에 왜 이런 불일치가 존재할까?


저는 지난 글에서 성서는 오케스트라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연주하는 독주나 독창이 아니라 여럿이 연주하는 합창이나 오케스트라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는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사람 창조 얘기 중 하나는 불협화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 살던 일곱 족속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한 하느님, 둘 중 하나는 불협화음이라고 했습니다. 기억나지요?


오늘 읽은 두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에는 수많은 에돔 사람들을 전쟁에서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포로 1만 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그들 몸을 으스러뜨려 죽인 유다군인들의 행위를 허용했거나 묵인한 하느님이 있습니다. 다른 편에는 다윗이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으므로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이 하느님에게 피 흘리는 일은 부정적인 일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거나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두 하느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둘 중 하나는 불협화음입니다. 어느 편이 화음이고 어느 편이 불협화음일까요? 흔히 전자가 불협화음이고 후자가 화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잘 따져본 후에 판단할 일입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왜, 무엇 때문에 이 불협화음이 생겼는가 하는 겁니다. 구약성서의 불협화음은 미적 감각이 출중한 사람이 예술적 의도를 갖고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불협인 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자기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게 거기 있는 겁니다. 다른 연주자들도 그가 내는 소리가 불협인 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둔 겁니다. 왜 그랬는지가 궁금합니다.


일반적으로 한 연주가가 계속해서 불협의 소리를 내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연주자들이 연주를 중단하고 그 소리를 내는 사람에게 화음을 맞추라고 요구하겠지요. 그래도 안 들으면 그의 연주를 중단시킬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울리지 않고 불편하기까지 한 불협의 소리를 참고 끝까지 연주하게 내버려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는 연주 내내 불협인 셈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연주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왜 불협인 연주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하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기는 거기에 자기 소리를 맞춰주고 싶지 않지만 그가 왜 그런 불협의 소리를 고집스럽게 내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참는 겁니다.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 불협화음이 있는 이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과 각 종족이 갖고 있는 종족 중심의 신앙이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얘기해보겠습니다.


저는 첫 번째 글에서 세 가지 전제에 동의해야 얘기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사람에게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윤리가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윤리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말아야 하는 것은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서나 불경이나 꾸란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보편윤리입니다. 하느님이든 부처든 알라든, 그 어떤 신이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윤리입니다.


물론 여기에 예외가 있습니다. 부득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예외적인 경우 때문에 이것이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오히려 예외가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보편윤리임을 입증합니다. “사람을 죽여라, 단 이러저런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죽이지 말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게 보편윤리가 아니겠지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단 이러저런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죽일 수 있다.” 몇몇 예외가 있다는 점은 살인하지 말하는 것이 보편윤리임을 보여줍니다.


보편윤리와 종족신앙의 충돌


그런데 고대인의 종교에는 보편적인 성격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의 하느님’ 같은 보편적 신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돌보는 신, 곧 보편적인 신(universal god)이란 개념이 고대인 머릿속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모든 사람의 신인 ‘보편적인 신’이란 생각은 이보다 훨씬 후대 사람들이 상상해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의 그릇은 보편적인 신이란 개념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작았습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비단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까지도 자기 종족만을 돌보고 자기 종족만을 도와주고 자기 종족만을 축복하고 자기 종족만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는(그렇게 해준다고 믿는) 종족신(tribal god)을 믿었습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처럼 다신교를 믿든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일신교를 믿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신은 모두 종족신이었습니다. 그들의 사고에는 착한 사람들에게나 악한 사람들에게나 모두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같은 보편윤리가 존재했습니다. 이는 비단 자기 종족에게만 국한되는 윤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다면 그게 보편윤리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똑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윤리였습니다.


고대인에게 이와 같은 보편윤리와 종족신 신앙은 충돌했습니다. 보편윤리는 살생을 금하는데 종족신앙은 ‘자기들만을 위하는 신’을 중심에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서 종족간의 다툼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극히 제한된 생존수단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는 건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어쩌다 벌어지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수행할지의 문제는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문제였습니다.


구약성서가 대량학살에 대해서 서로 상반되는 얘기를 하는 것은 보편윤리와 종족신앙의 충돌 때문입니다. 고대세계의 종족들은 가나안과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조차 종족신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곧 그들 중 누구에게도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과 같은 보편신에 대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자기 종족을 보호해주는 존재였습니다. 이집트의 신들은 가나안 종족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이 이집트의 신을 숭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신이 가나안의 종족을 돌보거나 보호해 주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한 부족의 신이 다른 부족을 멸절한다고 해서 종교적으로 딴죽을 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멸절당할 부족과 그들의 신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던 겁니다.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족속의 차이는 후자는 다신교를 믿었고 이스라엘은 일신교를 믿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일신교(monolatry 또는 henotheism)는 유일신교(monotheism)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여러 신들이 존재하지만 자기들은 야훼 하느님만 믿었습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 한 분만 존재한다고 믿는 유일신교와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은 믿지 않고 야훼만 믿었고 이 야훼가 다른 종족의 신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곧 야훼는 이스라엘의 종족신이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야훼가 종족신이란 얘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야훼를 자기들의 종족신으로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대량학살을 저질렀고 또 야훼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다고 믿었던 이유는 그들 종교가 종족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족신앙이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윤리와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량학살에 대해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종족신앙을 갖고 있던 때는 3천 년 전입니다. 지금 누군가가 ‘하느님은 나만 위하고 나만 좋아하고 나만 축복하는 분’이라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죽일 수 있는 분이다.’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겁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인 윤리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믿는 사람을 정상으로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 중에도 하느님을 종족신으로 믿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하느님, 자기만 돌봐주고 자기만 축복하는 하느님이라고 믿는 겁니다. 기독교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종교 없는 사람들, 무신론자들은 모두 출애굽 시기의 이집트인들로, 가나안 정복시기의 가나안의 일곱 족속으로, 사울 시대의 아말렉 족속으로 여기는 사람들 말입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여전히 3천 년 전의 종족신앙을 붙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답답합니다. 이런 퇴행적 행태를 볼 때마다 속이 꽉 막히고 숨 쉴 수 없습니다.


다음엔 종족신앙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땠는지, 그들이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믿었는지를 이해해야 왜 대량학살과 관련해서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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