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에게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아버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면 편지를 쓰곤 하셨다. 잘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와 간단한 용건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중자애 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전부였지만 아버지의 편지는 아버지의 존재나 다를 바 없었다. 구불구불 써내려간 가전체의 편지를 받아드는 순간 아버지의 정 깊은 눈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호롱불 밑에서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신 그 편지는 아버지와 분리할 수 없는 일체였다. 그 편지는 고향의 냄새였고 아버지의 품이었다. 지금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세들어 살고 있던 집 대문에 걸린 우체통에서 익숙한 아버지의 손글씨를 발견하는 날이면 천하를 얻은 듯 든든했다. 그 편지를 받아들고 눈물짓던 기억은 또렷하다.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편지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그 아득한 거리를 일거에 좁혀주곤 했다.
연애 시절에 주고받던 편지가 떠오른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빌어 주고 받던 편지, 지금 생각하면 낯간지럽기 이를 데 없지만 속 깊은 생각을 나누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군대에서 훈련 받을 때, 집에서 온 편지는 휴가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내무반의 동료들이 연인의 편지를 읽고 또 읽다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훌쩍이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공무를 위해 쓰는 편지는 논외로 한다면 편지를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뜻이리라. 그리움은 '너'의 빈자리가 강하게 환기시킨 마음의 공허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그리움의 대상은 우리 앞에 현전한다.
편지 쓰기는 사유의 훈련이기도 했다. 편지는 우리의 영혼이 발하는 발신음이다. 편지를 읽어줄 그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시대에 대해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불시에 찾아오는 공허감이 빚어낸 어지러움을 호소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우리 젊은 날을 풍요롭게 해주던 이들이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횔덜린의 《히페리온》을 거듭 읽으면서 쓸쓸하고 적막한 삶을 응시했고, 12세기의 아름다운 두 연인이 주고받은 편지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를 읽으며 가슴 시린 사랑을 꿈꾸기도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간》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 문익환 목사의 옥중서한집인 《꿈이 오는 새벽녘》, 서준식의 《옥중서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또 읽으며 격절된 장소에서 빚어진 사유의 향연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편지의 대가는 사도 바울이다. 신약성서 27권 가운데 그가 쓴 편지 혹은 그의 이름을 빌어 쓴 편지는 13권이나 된다. 바울의 서신은 ‘경經’이라는 이름에 값을 하고도 남는다. 지금처럼 인쇄매체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에 그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함축적이면서도 정교한 언어에 담아냈다. 혼신의 힘으로 일으켜 세웠던 교회 공동체가 그릇된 가르침으로 인해 흔들릴 때마다 그는 편지를 써서 벗들과 소통하려 했다. 그렇기에 그의 서신은 곡진하고, 열정적이고, 애정에 가득 차 있다. 그의 편지를 회람하면서 초대 교회 공동체는 구부러진 길에서 돌이킬 수 있었다. 바울은 믿는 이들을 일러 하나님이 쓰신 편지라 했다. 강렬한 표현이다. 오늘 나라고 하는 편지는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인가, 불쾌한 소식인가? 허나 그 어느 경우든 나의 있음은 그 자체로 발신음이 되어 누군가의 가슴에 가 닿게 마련이다.
삶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방식으로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과 내용이 결정된다. 만남은 관계의 다른 이름이다. ‘관關’은 ‘빗장’이다. 열 수도 있고 닫을 수도 있다. ‘계係’는 잇는 것이다. 엶과 닫음을 통해 유기적으로 만들어진 만남의 양태가 관계이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접촉과 저항을 통해 자기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모든 만남이 다 기쁠 수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만남은 우리 속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이 가시적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감춰질 때도 있다. 감춰졌던 흔적이 슬그머니 드러나기도 한다. 삶은 오묘하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흔적이다. 한 주에 한 번씩 꽃자리 웹진(fzari.com)에 글을 쓰기로 작정한 후, 매 주일 나의 삶의 지평 속에 등장했던 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 혹은 삶이 불러일으킨 정서 혹은 생각을 정직하게 직시했다. 그들 중 아픔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맥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자기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 책은 내게 다가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나눠준 그 멋진 벗들이 들려준 고민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묻고 또 묻는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졌다. 그들이 있어 나도 있다. 참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 위에서 그들과 만났던 것은 나의 복이다. 나와의 만남이 그들에게도 복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책의 모양을 갖춰준 멋진 벗 한종호 목사와 표지를 구성해주신 임종수 목사님께 감사드린다. 임 목사님은 맑고 올곧은 정신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면 세속의 나이의 많음과는 상관없이 사유는 녹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 아닌 몸으로 증언하는 분이시다. 40년 전에 만난 후 한결같은 신뢰와 사랑으로 나의 동행이 된 희우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병에 담아 물 위에 띄워 보내는 편지처럼 이 조촐한 글이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그들의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길 위에서 이 편지를 기쁘게 받아 읽어줄 당신에게도 감사드린다.
복사골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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