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주의 최후의 심판(5)
존경하는 재판장 각하!
선진국도 아니요 선진국 아닌 것도 아니요 개도국(개발도상국)도 아니요 개도국 아닌 것도 아닌 아주 묘한 나라에서 대법원장을 역임한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물론 판사의 자리가 아닌 피고의 자리지요. 다른 사람과 달리 피고석을 내려다만 보다가 자기가 피고석에 서서 판사석을 올려 다 보니까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것 참! 평생 남을 재판만 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 판에 와서 이렇게 피고석에 서게 될 줄이야! 살아 잇을 적에 그걸 염두에 두었어야 하는 건데 그만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깜빡 잊었지 뭡니까? 잊은 건 댁의 사정이고 여기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에누리는 일체 사절이라 하는 수없이 대법관 나리께서도 최후의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섰습니다.
“너는 세상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판사 일을 했습니다.”
“그랬느냐? 거참 힘들었겠구나! 내가 직접 해 보니까 재판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겠더라. 어쩌다가 하고 많은 일거리를 두고 그렇게 힘든 일을 하였더란 말이냐? 고생이 많았겠다.”
대법관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동정심을 베푸시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았습니다만 , 바로 여기서 일단 점수를 따놓는 게 상책이다 싶어서 근엄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 각하! 지금 재판장께서는 피고를 향하여 사소한 동정심을 표현하셨는데 재판장으로서 특정 피고에게 사심(私心)을 품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이점의 즉각적인 시정을 요청하는 바이올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상을 찌푸리셨습니다.
“흠, 내가 너에게 동정심을 베풀면 안 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 각하!”
“그래, 너는 평생 피고에게 아무런 동정심도 베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굉장히 힘든 일이었습니다만 피나는 수련 과정을 통해 마침내 감정-극기의 묘수를 터득했습지요.”
“참으로 장하다. 너는 어쩌면 하나님인 나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더란 말이냐? 어허, 참으로 장한지고!”
대법관은 이제 결정적으로 점수를 따놓았으니 됐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흐뭇했습니다.
“기록을 보니 너의 대법원장 재직 기간이 꽤 길었구나?”
“오래 한 셈이지요. 그 자리가 아무나 앉을 자리는 아니었으니까요.”
“흠, 그렇겠지! 그런데 대통령이 죽으면서 너도 그 자리를 물러났구나?”
“저의 사직과 대통령의 죽음은 무관합니다.”
“그렇겠지. 법과 정치는 상호 독립이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 각하!”
“그래, 너는 판사로 있는 동안 정치권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았더란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지요. 가끔 대통령과 골프도 쳤으니까요.”
“골프?”
“예. 건강 관리상 썩 좋은 운동입지요.”
“건강 관리에 좋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재판장 각하! 그러나 골프 이야기는 본 법정의 사안(事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골프를 치면서 너와 대통령이 서로 나눈 얘기는 꽤 중요한 증거물이라고 보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무슨 얘기 말씀입니까?”
“국사범(國事犯) 아무개를 재판할 적에 대통령이 너에게 그는 사형감이라고 말했지 않았느냐?”
“글쎄요.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의 대화가 녹음되어 있으니 다시 들어 보아라.”
하나님은 천신에게 명령하여 주먹만한 기계를 가져 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 인간들이 세상에서 한 모든 말을 담아 놓은 녹음기다. 소크라테스가 아카데미에서 강의한 말도 들어 있고 우간다 대통령 이디 아민이 침실에서 첩과 나눈 얘기도 들어 있다.”
하나님은 녹음기 위에 돋아나 있는 작은 단추를 누르셨습니다. 바람 소리가 약간 들리면서 이윽고 대통령의 쉰 목소리가 분명하게 재판정에 울려 퍼졌습니다.
“…어떻소? 내 생각에는 이번 참에 두꺼비가 이 나라를 위해서 죽어 줘야겠다고 보는 데…(잠시 말이 끊겼다가)… 딱!”
“저 딱-하는 소리가 골프 공치는 소리고 두꺼비는 국사범 아무개를 말하는 게 아니냐?”
“그런 것 같습니다.”
“옳거니! 좀 더 들어 보아라.”
“…(발걸음 소리 들리다가, 대법관의 목소리로)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탁!’ 소리 나게 녹음기를 끄고 하나님께서는 대법관에게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네가 말하는 ‘나’란 재판관으로서의 너냐? 아니면 골프 치는 사람으로서의 너냐!”
“글쎄요, 둘 다겠지요.”
“흠, 그도 그럴 듯하다. 아무리 안팎이 다른 자라 해도 역시 사람은 하나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현명하신 재판장 각하!”
“존경하는 재판장이니 현명하신 재판장이니 하는 말은 네가 세상에 있을 때 즐겨 듣던 호칭이니 여기서도 너에게 붙여 주마. 자, 그럼 존경하는 재판장 각하, 네가 그 국사범 아무개에게 사형을 선고한 데 대하여 그것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스스로 심판하여라.”
“추호도 사심(私心)은 없었습니다.”
“그럼, 공심(公心)으로 판결을 내렸단 말이로구나?”
“그렇지요.”
“공심(公心)이 아니라 공심(共心)이겠지. 대통령과의 공심(共心) 말이다.”
“우연히 생각이 같았을 뿐입니다.”
“알았다. 우연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에 너는 살아 있을 때 대통령과 짝이 맞았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있는 게 어떠냐?”
“그… 그건 싫습니다.”
“왜지?”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허허… 역시 판사라서 알긴 제대로 아는 구나?”
“하나님! 제발 한 번만 봐 주십시오.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린지 잘….”
대법관은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판사는 피고에게 동정심을 베풀면 안 된다고 했잖느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의 발밑이 푹 꺼지면서 천길 만길 아래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현주/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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