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각 스님께 어느새 10년이 지났습니다. 2006년 초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 스님에게 말없이 삼배를 드리고 화계사 국제선원을 나온 것은 스승으로서 스님과의 인연을 갈무리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다니다 나를 찾던 수행에 목말라 하던 때 스님을 만났고, 1년여 재가자로 참선 수행에 전념할 때는 스님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제 목마름을 읽고, 각별히 수행지도를 해 주셨던 것 지금도 감사로 기억합니다. 부모님과 가족을 속여 가며 인생을 걸었던 수행의 계절이었기에 그 은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줄거나 색 바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출가를 하고, 스님과 지근거리에서 지내면서는 비구 현각 승려에 가려진 ‘미국 남자’ 폴 뮨젠의 거친 모습을 보아야했습니다. 저에게는 도덕적인 잣대로 스님을 재단할 뜻도 자격도 없기에 수행자로서의 ‘하찮은’ 탈선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도들의 공양물과 보시를 대하는 스님의 자세를 보며 실망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후 저는 운문사에 들어갔고 세상과 두절된 상태로 지냈습니다. 운문사 치문반으로 여념이 없을 무렵 스님이 화계사에서 나오고 병이 났다는 소식, 그 모든 불행이 광우(당시 필자의 법명) 때문이라 욕을 하고 다닌다는 소식도 국제선원 반연의 스님에게서 접했습니다. 당시 스님과 화계사, 국제선원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고립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후의 변화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역경을 누군가의 탓으로 삼는 모습은 못내 씁쓸하고 아프더군요. 두 번째 실망이었습니다.
그때 미국에 계시던 제 은사 스님과 저의 인연도 끊으셨지요.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이후 저는 환속을 했고 흐릿하나마 좌복 위에서 깨달았던 가치를 삶의 터전에서 기억하고자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함께 공부하는 길벗들과 기독교다 불교다, 승이다 속이다, 수행이다 일상이다 하는 허다한 경계를 넘어서 일상이 “아하!”하는 눈뜸의 연속이 되기를 사모하며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라고 하는 마음공부 공동체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간 스님을 생각하면 가슴에 바위가 얹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똑똑한 분이니 언젠가는 서로가 더 ‘사람 된’ 모습으로 활짝 웃으며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SNS에 올린 스님의 치기어린 글은 10년간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실망스러움이었습니다. 더 놀란 것은 내용으로나 형식 모두에서 거칠기 짝이 없는 스님의 ‘낙서’에 뜨겁게 반응하는 사태였습니다. 여전히 하버드 출신 벽안 납자 현각으로만 알고 있는 한국의 굶주린 언론과 순진한 재가자들을 마주하며 스님을 아끼는 사람의 한 명으로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한국 불교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스님이 내던진 비판 자체는 문자 그대로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궁금합니다. 한국 불교는 예나 지금이나 그 폐단이 다름이 없는데 스님이 출가하던 25년 전에는 사랑의 대상이었고, 지금은 폭언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더욱이 스님이 한국 또는 한국불교에 대해 권태를 품은 것은 이미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미 그때 몸도 마음도 떠나신 것 아닌가요?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손가락질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부모라도 나를 낳고 기른 부모는 부끄러움과 질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감사는커녕 일말의 부채의식도 없이 일방적으로 정죄하는 모습이 과연 구도자의 모습인지 의아합니다.
사진출처/현각스님 페이스북 스님이 아는 한국 불교는 스님의 경험과 해석의 테두리를 넘지 못하며, 따라서 진정한 한국 불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스님은 그 흔한 행자 생활도, 전통 강원도, 진정한 대중 생활도 하지 않으셨지요. 좌복 위에서의 ‘반짝’이 <만행> 출간의 반짝으로 이어지면서 스님은 국내에서 일약 연예인 급 스타가 되었고, 그 현상은 스님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닦음은 ‘반짝’ 이후의 것인데 스님은 그 기회마저 잃으신 것이지요. 스님에게는 큰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에 눈먼 종단과 연예인의 유명세를 누리는 스님들 뒤에는 외풍과 무관하게 산삼처럼 익어가는 수많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있습니다. 한국 불교의 주인공은 그런 분들입니다. 뒤틀린 그늘을 안고도 한국 불교는 이름도 빛도 없는 구도자들로 지금도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으로 가시는 것이지 질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외국인 스님들이 한국불교의 ‘장식’이라 하셨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할 것입니다. 무상사나 화계사 국제선원 내부에 몸 담아 있으면서 직접 느낀 것입니다. 지위가 높을수록 극심했던 노랑머리 스님들의 권위의식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스님의 독불장군 리더십은 유명했지요. 고 숭산 스님 공동체인 국제선원 관음스쿨에서도 일찍이 탈퇴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의인기와는 대조적으로 너무 우뚝 하셔서 안에서는 대중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모습, 기억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 출가한 외국인 스님들의 안 좋은 습관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을 특별한 사람, 혹은 대단한 큰 스님으로 떠받드는 한국인 재가자들의 불찰이 작지 않습니다. 스님도 그러한 떠받듦의 희생자일 수 있겠지요. 분명 한국 불자들의 반성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시봉하고 욕먹고, 이 무슨 밑지는 신행 행태인지... 재가자들도 스님 떠받들 시간에 한번이라도 더 나를 돌아 볼 일입니다.
최근 인간극장이라는 모 방송국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20살 어린 나이에 한국의 농촌으로 시집와 연로한 시부모님을 모시고, 스무 살 연상의 남편을 내조하며, 두 아이를 반듯하게 키우는 베트남 여인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온 그녀는 10년을 살면서 시댁에 넝쿨째 들어온 복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한국어 구사는 도움 없이 스스로 책을 쓸 정도였고, 집안에의 가족 살핌은 기본, 농업학교에서 배운 수박농사를 잠을 줄여가며 일궈 가정에 보탬이 되는 등 그녀의 바름과 삶을 대하는 적극성, 긍정성, 정성스러움은 한국인도 감히 흉내 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집에서나 마을에서나 이미 객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크고 작은 공동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자신은 물론 주변에 행복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습니다. 달랑 10년 사이에. 그것도 뒤틀리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대학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프리미엄을 안고 들어가는 미국인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황티쿡. 짧은 5부작 다큐인데, 꼭 시간 내셔서 일견하실 것을 권합니다.
반편 한때 자신이 살았던 집안을 향해 일말의 조심성, 사려, 하심, 그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이 던진 들쑥날쑥한 스님의 글을 접하며, 많이 속상했습니다. 좀 더 멋진 글, 멋진 생각, 멋진 비판을 하는 스님의 모습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 나머지 네 손가락은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스님 자신을 향한 그만큼의 냉혹한 성찰도 동반해주실 것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이번 일로 스님과 ‘염화미소’로 신뢰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이 꽤나 멀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비구로서, 아니면 그저 붓다의 가르침을 쫓는 한 인간으로서 자등명 법등명하는 기쁨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을 계기로 출ㆍ재가자를 불문해 한국 불교계의 깊은 성찰이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옛 제자로서 스님의 정진을 늘 응원합니다.
2016년 8월 1일 서울에서 여의주 성소은 드림
참, 늦었지만 스님이 첨부했던 서울대 관련 기사는 스님이 이해한 것과는 사뭇 다른 내용임을 알려드립니다. 한명은 더 많은 연봉($)을 위해, 또 다른 한명은 임기를 다하고 떠나면서 서울대의 아쉬운 풍토를 노정한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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