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끙끙 앓는 하나님’과 한국교회,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며*
한 사회의 정신적 기준으로 존재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그 사회의 가장 악취가 나는 현장의 하나가 되고, 존경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정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아무런 교정의 과정도 없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덩치는 크지만 정작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탐욕의 소굴임이 판명되는 비극을 겪을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이는 내 아버지의 집이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하는 일갈의 소리가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세간의 도마에 오르내리는 고질적인 목회자의 성윤리 문제는, 교회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간다는 처연한 비극이다. 이 뿐인가? ‘교회세습’이라는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의 대부분은 ‘과연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자조적인 자기비하로까지 연결될 지경이다.
이렇게 교회는 어디를 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로 달려가고 있고, 단지 무화과 나뭇잎으로 살짝 덮여있을 뿐, 한번 바람이 불면 그 치부(恥部)가 그대로 드러나고 마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니 개혁의 손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의 방황과 정신적 실종 상태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신앙인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대세가 잘못된 한쪽으로 쏠린다 해도 끝까지 외롭게 그 반대편에 서 있을 수 있는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의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조차 기대를 저버린 지 이미 오래라는 뼈아픈 현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부터 깊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당연한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이는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는 성서말씀이 응하는 현실이다.
1970년 이후 한국교회의 모토는 ‘성장’이었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 성장정책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면서, 전도의 열정과 함께 결합하여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경제계의 재벌과 종교계의 대형교회는 성장주의 시대의 일란성 쌍생아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형교회는 다른 무수한 교회의 선교적 모델이 되어 성장 자체가 곧 절대가치로 군림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성장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고, 성장하지 못하면 그것은 존재 이유가 없는 목회가 되고 말았다. 양적 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었고,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목회자가 곧 지도자가 되었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성장의 신앙적, 윤리적 기초는 성찰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현실과 맥을 같이하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경영방식과 지도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성장 모델을 선택했고, 목회자는 정신적 지도력이 아니라 경영수완이 좋은 CEO와 구별이 되지 않게 되어갔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보다 많은 교인들을 교회에 들어앉게 해서 그들의 돈으로 교회를 살찌우는가에 있었다. 결국 교회는 날로 융성해져 갔지만 한국사회는 그에 비례하여 정신적 감화를 받아 순결해진 것은 아니었다. 성장은 곧 성공이었고, 성공 스트레스는 모든 교회를 압박했고 이로써 교회는 세상의 성공사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니 자연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품어안은 선교적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시장논리가 교회를 점령한 양식이었다. 시장논리란 무엇인가? 그 논리의 핵심은 수용자의 요구에 맞추고 그 대가를 현금화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교회는 무수한 문제의 덫에 걸리기 시작한다.
이기적 탐욕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주는 기복주의는 공식이 되었고, 교권주의는 당연하게 통했다. 권위주의적 CEO의 지휘 아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통용되었던 것이다.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적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소멸되어 갔다. 이미 자신의 개인적 자산처럼 되어 버린 교회를 세습하려는 욕구는 그리하여 당연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사적 영역과 통하게 되었다. 재벌기업의 2세 상속과 다를 바가 없는 논리가 수용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돈의 힘과 교권적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은 성(性)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 차이가 있다 해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속살은 깊이깊이 썩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인들의 세속적 탐욕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면죄부를 받아 양심의 가책을 제거해 버리고, 기복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들 수용자들의 요구가 충족되는 대가로 헌납한 돈을 가지고 ‘성역(聖域)으로 둘러싸인 밀실에서 무한대의 윤리적 타락’을 자행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특권이 되었고, 이 특권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도전하는 것은 종교적 불경이 되어 버렸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성장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본질적인 질문들은 억압되어 갔고, 목회자 후보생들은 이러한 굴레에 굴종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배워 가면서 영적으로 탈진해 갔고 이들이 교회를 맡을 때쯤이면 윗세대와 그리 달라질 것이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이 이어지게 될 때, 한국교회의 장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끙끙 앓는 하나님> 북토크가 저자의 바람처럼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읽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땅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기 위함이다. 이 책이 그러한 길을 모색하는 이들 앞에 던져지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되면 참 좋겠다. 역사의 봄이 고샅길 저편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제 우리가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봄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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