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이 땅에 남은 자

by 한종호 2017. 4. 19.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11)


이 땅에 남은 자


때때마다 전쟁의 기운을 부추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지인은 이 나라를 떠나 안전한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몇 년을 갖은 노력을 기울이더니 기어이 얼마 전 짤막한 인사말을 남기고 우리나라를 떠났다. 한결 편안해진 그는 괜히 거기 있는 이유 없다며 얼른 자기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전자메일을 보냈다.


문득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자기 가족은 아무 문제없다며 하얀 이를 온통 드러내며 웃던 오래전 알던 이가 생각났다. 미국에 잠시 공부하러 갔을 때, 작은 아이가 태어나 그 나라 국적을 획득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 국적을 가진 이들과 그의 부모는 서울의 모 집결지로 모여 안전한 나라로 후송이 된다는 걸 엄청 자랑했다.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 ≪열왕기하≫ 24장 14절


전쟁은 땅을 황폐화 시킨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까지 파괴하여 무기력하게 만든다. 전쟁은 훌륭한 인재들을 소멸시킨다. 쓸 만한 사람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모조리 끌려가거나, 뜨거운 마음으로 적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거나 한다. 결국 전쟁이 지나간 뒤에는 소위 별 볼일 없는 사람들만 그 땅에 겨우 남아있게 된다.


‘장자’는 불쑥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기존 생각을 뒤엎어버린다. 쓸모가 있기 때문에 정작 쓸 수가 없고, 쓸모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쓸 수 있다는 역설을 내놓는다. 근본적으로 과연 쓸모가 ‘있다 없다’의 핵심인 ‘쓸모’라는 게 과연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갖는다. 나아가 우리가 정작 사용하는 것이 있음[有]인가 없음[無]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는 까닭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쓸모’는 알지만 ‘쓸모없는 쓸모’는 알지를 못한다.(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 ≪장자≫, <인간세> 9장


장자는 그릇을 예로 들면서 과연 쓸모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그릇은 그 재질이 나무이든 금속이든 어떤 그릇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우리가 사용하는 것은 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릇의 한 가운데인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 빈 공간에 음식을 담거나 물건을 담아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장자는 대나무나 금속으로 된 피리가 소리를 내는 것은 피리 대궁 자체가 아니라 피리에 뚫어놓은 빈 구멍을 통해서라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있음[有]을 통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없음[無]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간다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있음[有]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없음[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고대국가의 시스템의 하부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전 분야를 떠받치고 있는 기층민에 대해 큰 관심을 두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의 눈에 이들은 그야말로 쓸모없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들 하부계층민이 없으면 곧장 국가시스템이 무너져버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하부계층민이야말로 쓸모없는 쓸모였다.




이사야나 예레미야는 장차 국가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미리 알았고, 삶을 통해 국가의 꼴을 감지하고 있었기에 간파할 수 있었다. 이런 상태로 국가가 유지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알고 있었기에 예언자였고, 사람들의 눈치 안보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했기 때문에 참선지자였다.


위기에 처한 국가를 내버리고 타국으로 가버리는 이들을 만류하기 위해 뒤따라가던 예레미야의 간곡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 아이라서 말을 할 줄 모른다는 예레미야의 두려운 눈빛이 눈앞에 어른댄다. 무엇보다 이제 모두가 떠나고 짐승도 살지 않을 버림받은 땅이 될까 걱정하는 예언자의 근심어린 기도소리가 종소리처럼 울린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 ≪예레미야≫ 31장 7-8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하신다. 북방으로부터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겠다고 하신다. 그들 중에는 장애인과 여성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강하고 훌륭한 이들을 불러 모아 땅을 회복시키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약한 자 부족한 자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린도전서 1:27-28)”라는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이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어딜 가도 자신의 마음을 떠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날 수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이 나라를 등지는 것이 더 힘든지 모른다. 이 땅에서 남은 자로 지내는 건 어떤지.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며 사는 것은 어떤지’라고 말이다. 그들은 아무 대답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을 떠났다.


결국 이 땅에 남은 자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약한 자, 천한 자, 멸시받는 자, 가진 것 없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생생함을 맛보기로 했다. 동물조차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어도 괜찮다. 비루한 존재들만이 듬성듬성 겨우 생존하는 곳이어도 괜찮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지낼 것을 다짐했다.


간혹 전자메일이 이 땅을 떠난 이들로부터 온다. 이 땅이 그리워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쓸모없는 인생들이 득실대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투덜대던 이가 이제 다시 쓸모가 있음직 하니까 다시 오고 싶다고 한다. 이제 돌아와도 더 이상 쓸모 있는 자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도 굳이 이 땅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 사람 낚는 귀재인 전문정치인을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다. 조직 또는 기획능력이 탁월한 이들을 선발하여 제자로 삼지 않으셨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로 평생을 지낸 우직한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그의 약속대로 예수의 제자들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믿음이란 나의 쓸모없음을 들어 쓸모 있음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동하시는 하느님 그리고 믿음  (0) 2017.08.07
예수가 아름다운 이유  (0) 2017.06.08
일생 추위에도  (0) 2017.04.07
한 가운데 서라  (0) 2017.03.20
하나님의 기억 속으로  (0) 2017.03.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