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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사울 이야기

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by 한종호 2017. 7. 17.

사울 이야기 5


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사무엘상 28:3-7


사울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어 ‘인간’(人間)은 사람 ‘인’ 자에 사이 ‘간’ 자를 씁니다. 사람은 곧 사람 ‘사이’ 곧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뜻이겠습니다. 사람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사울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의 외모나 특기나 취미나 취향, 그가 좋아하는 음식 등이 뭔지 아는 걸로는 부족하고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사울이 누군지 알려면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관계는 어땠고 주위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네 번에 걸쳐서 사울 이야기라는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울이 맺은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이 시리즈를 마감하는 마지막 글로서 하느님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로서 무대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극의 흐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정도이지만 하느님은 연극을 이끌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오늘은 숨은 주인공인 하느님을 살펴볼 터인데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은 사울이야기에 등장하는 ‘등장인물’ 곧 ‘캐릭터’로서의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사람이 알기에는 너무 크고 너무 깊고 너무 넓고 신비한 분이기에 하느님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하느님은 당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이 성서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성서가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서 이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하지만 성서가 하느님은 아는 유일한 길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길임에는 분명합니다.


성서가 하느님을 보여주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하느님은 이러저런 분이다.’라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는 ‘사건’이나 ‘이야기’, 또는 시적인 ‘은유’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보여줍니다. 이렇듯 성서는 직설적으로 하느님을 보여주진 않으므로 우리는 성서를 ‘해석’이라는 작업을 해가며 읽어야 합니다. 예컨대 성서가 하느님을 ‘질투’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글자 그대로 하느님이 사람처럼 질투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하느님의 특정한 성격을 가리키는 ‘시어’로 알아듣고 뭘 지시하는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또 성서가 하느님이 ‘오른팔을 펼쳐서 구원했다’고 말하면 ‘그럼 왼팔은 뭐에 쓰나?’라고 엉뚱한 질문을 하지 말고 그 행위가 뭘 가리키는 ‘지시어’인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만 바라보지 말고 달을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울 이야기에서 보는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등장하는 하느님은 그 이야기를 만들어서 후대에 전한 사람들에 의해 ‘해석된’ 하느님입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으며 새롭게 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울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거나 문제제기할 때 우리는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해서 질문하거나 문제제기라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회하시는 하느님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왕을 요구한 이유는 첫째로 외국, 특히 블레셋과의 전쟁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둘째로 전쟁이 없을 때도 지속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리더가 필요했다는 데 있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요구는 이해할만 합니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야훼의 궤를 갖고 나갔지만 패배했습니다. 게다가 야훼의 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사무엘과 하느님은 이와 같은 백성의 요구를 각각 자신을 버린 걸로 이해했습니다. 하느님은 백성이 자기를 버린 걸로 이해하고 마음 상한 사무엘에게 그들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버린 거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사울을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느님은 백성들이 당신을 버렸다고 여겼으면서도 그들을 벌하기는커녕 그들의 요구를 들어줬는지 궁금합니다.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는 뜻은 아니므로 용납 못할 정도는 아니었던 걸까요? 왕을 달라는 요구가 다른 신을 섬기겠다거나 우상을 만들겠다는 뜻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느님은 사울을 택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셨습니다. 성서는 그 얘기를 두 번이나 하는데 그래서 ‘하느님도 후회라는 걸 하는가?’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에는 여기 말고도 하느님의 후회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여럿 더 있습니다. 십계명에 따르면 하느님은 ‘질투’도 하신다는데 그에 비하면 ‘후회’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후회하신다는 데 충격 받을 사람도 있겠지요.


이에 못지않게 곤혹스러운 점은 하느님의 후회가 정당한가, 사울은 하느님을 후회하게 할 정도로 못된 사람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제사를 집전한 행위로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고, 헤렘의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말대로 이레 동안 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기에 스스로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이게 문제였다고 해도 그 책임은 두 사람이 나눠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렘의 규율을 어긴 것도 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난 번에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게 사울의 책임이라고 해도 거기에 대한 징벌의 강도가 적절한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잘못이라고 해도 그에 대한 징벌이 과중하다는 겁니다. 물론 사울의 불행에는 그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걸 부인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다윗을 선택하셨음을 알게 된 후로 다윗을 죽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광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그는 뭔가에 쫓기듯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자기를 버렸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거란 얘기입니다.


성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하느님은 사울을 버렸을까요? 왜 하느님은 자신의 선택을 물러가면서 사울을 버려야 했을까요? 사울 이야기는 두 가지 이유를 들지만 그것만으로는 얼른 수긍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성서도 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만족스런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서도 답을 찾느라고 고민했다거나 성서도 답을 모르는 것 같다는 말에 어리둥절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성서를 모독한다고 분노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성서는 사람의 책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이 써서 사람이 전달한 사람의 책입니다. 문서로서의 성서는 사람이 써서 사람이 후대에 물려준 책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사람의 책인 성서는 우리처럼 하느님이 누군지, 하느님의 뜻이 뭔지 알려고 갖은 고민과 온갖 실험을 하는 책입니다.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찾아내기도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제 눈에는 왜 하느님이 사울을 버렸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성서가 확실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저 자기가 찾아낸 답의 실마리를 후대에게 남겨놓는 데 만족했던 걸로 보입니다.


제사와 관련된 두 가지 ‘불순종’이 그의 버림받음에 대한 만족스런 답이 아니라는 생각에는 성서도 동의한다고 보입니다. 그게 정답이라면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거짓말해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불법적으로 먹은 다윗도 거기에 맞는 벌을 받았어야 했는데 안 그랬으니 말입니다. 다윗이 벌을 받아 불행해지기는커녕 그에게 속아서 빵을 내준 놉의 제사장들만 사울의 손에 죽지 않았습니까. 사울과 다윗 중에 누구 잘못이 더 위중한지는 판단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쪽은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고 다른 쪽은 그냥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울 이야기에 드러난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사울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두 가지 면이 드러나는데 둘 다 사울이 왜 하느님에게 버림 받았나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과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첫째, 사울은 ‘희생양’(scapegoat)이었다는 것이고 둘째, 하느님은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희생양’ 제도는 이스라엘에게 익숙합니다. 제사제도, 특히 속죄제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그 벌은 죄지은 당사자가 받아야 하지만 대신 제물로 양을 죽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가 속죄양 제도입니다. 이 이론은 르네 지라르(Rene Girard)라는 프랑스 사상가가 발전시켰고 성서학자들도 제사제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싫어서 왕을 요구했고 그것은 하느님을 버린 행위라도 이해합니다. 백성의 요구는 하느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하느님 입장에서는 중대한 일탈이요 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변상황은 인간인 왕을 필요로 했습니다. 백성들의 요구가 현실 이치에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데 대한 책임과 처벌을 누군가에게 부과했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사울이라는 겁니다. 사울이 이른바 ‘속죄양’이 됐던 겁니다.


속죄양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처벌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속죄양은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가 저지른 집단적인 죄에 대해서 공동체를 대신해서 벌을 받습니다. 사울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이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은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에 대한 처벌을 그가 받았던 겁니다. 사울 이야기를 전한 사람들이 속죄양 이론을 의식적으로 그에게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벌어집니다.


둘째는, 하느님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점이 사울의 불행을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고 여기는데 사실 저는 이게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다윗과 관련해서 여러 번 인용한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합니다. “야훼는 다윗과 사랑에 빠진 신이다.”(Yahweh is the God who fell in love with David). 물론 이 말도 비유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집니다. 그처럼 야훼가 일방적으로 다윗 편을 든 것은 그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란 겁니다. 곧 야훼가 다윗을 선호하고 일방적으로 그의 편을 든 것은 사랑에 빠져서 한 것이므로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사울을 버린 것도 그에게 결격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윗을 사랑해서 그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울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런 분일까요? 누군가를 사랑해서 다른 누군가를 버리는 분일까요? 아무도 모르지요. 하느님은 ‘알 수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울 이야기가 하느님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에 대해 이런 느낌이 가진 적 없습니까? 하느님이 나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해서 내가 소외된다는 느낌 말입니다.


남을 사랑할 수 없을 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다윗처럼 여러분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더 많이 받고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목사가 쯧쯧…’ 하면서 혀를 찰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하느님의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딱 남들만큼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이 제게 남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저처럼 다른 사람만큼만 사랑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그도 아니면 하느님의 사랑을 남보다 덜 받거나 전혀 못 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여러분 각자가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사울의 관점에서 이 얘기를 읽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분명 세 부류 중에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둘째나 셋째였겠지요. 그러면 거기 속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울처럼 살아야 할까요? 사울처럼 다윗을 질투하면서 그를 죽이는 데 일생을 허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자족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보다 덜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민과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누면서 살면 안 되는 겁니까. 이게 기독교인들의 바른 삶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으며 산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은총을 나누면서 그들이 겪는 고민과 고난을 떠안으면서 살아가는 게 올바른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 아닌가 말입니다.


저는 사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 반비례해서 하느님의 편애를 받았던 다윗에게는 반감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제가 그의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의 삶의 태도도 긍정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버려진 데서 오는 좌절감과 대신 선택된 다윗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는 인생을 망쳤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영영 버리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의 생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섭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버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사울이 하느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다는 데 불과합니다.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닫는 점이 바로 이겁니다. 사울이 택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길도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영영 버리는 분이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받은 은총을 우리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로는 넉넉하게 받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할 정도로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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