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5)
가혹한 현실과 믿음 사이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가 있어야 할 곳에 악이 있다”(전도서 3:16, 새번역).
공의와 정의 실행으로 억울함이 없어야할 법정에서 조차 악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발설한 코헬렛(전도자)의 이 말, 통탄할 일이다. 만연된 불의를 짚어낸 말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면모가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관찰하고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해하고 통찰해보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코헬렛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정직하게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예언자들처럼 시대의 악을 고발하도록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간결한 말의 세계를 음미하다보면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인 모습과 현실문제의 방관자로 있을 수 없다.
코헬렛은 ‘해 아래’ 일어나는 억압 또는 학대의 문제들을 섬세하게 살폈다. 학대당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만, 위로할 사람은 없다. 학대하는 사람이 폭력을 휘둘러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전도서 4:1). 당혹스럽지만 사실이다. 지혜자 코헬렛의 관찰처럼 지혜는 실제 사례를 바탕에 둘 때 설득력이 있다. 지혜로운 판단의 논리는 일상적인 삶의 구체성에 있다. 그가 살았던 고대 군주제의 상황이나 현대사회나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는 억압과 학대의 현장은 곳곳에 존재한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가정, 일터, 그리고 심지어 억울함 없이 정의가 실행되어야 할 법정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막론하고 높은 지위와 계층에 속한 강자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이용해 약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억압과 학대의 상황을 만들곤 한다. 코헬렛은 사람의 악한 탐욕적 본성과 학대받는 자들을 위로할 사람이 없는 가혹한 현실을 꼬집었다. 비통한 현실에서 억압의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마음은 잠언의 지혜자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자비를 구하지만, 무례함으로 반응하는 부자들이 존재한다(잠언 18:23)는 사실을 발설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 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그러니 진실한 말은 꾸밀 필요가 없다.
코헬렛은 사물을 찬찬히 살피고, 돌아보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무심한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을 억압하는 거센 현실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한걸음 더 들어가 ‘공의’와 ‘정의’를 짓밟고,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을 보아도 놀라지 말라(5:8)고 조언한다. 왜 일까? 이 말은 그의 냉철하고 예민한 사회적 통찰이 담긴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갖춰야할 덕목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실행이었다.
공의로 다스리는 왕은 나라를 튼튼히 하지만,
뇌물을 좋아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잠언 29:4, 새번역).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언 29:14, 개역개정).
고대의 왕이 겸비해야할 태도가 이러한데, 여호와 신앙을 수호했던 이스라엘의 왕과 권력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의 후손 첫 세대가 죽고, 모세 역시 광야 40년을 마무리할 즈음 광야 2세대를 향해 열렬한 가르침을 쏟아냈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곧 ‘토라’를 풀이해주는 고별설교였다. 모세는 왕과 지도자들이 행할 도(道)와 관련한 가르침을 분명하게 전했다(신명기 1:14-18; 17:14-20).
당신들 동족 사이에 소송이 있거든, 잘 듣고 공평하게 재판하시오. 동족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동족과 외국인 사이의 소송에서도 그렇게 하시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재판을 할 때에 어느 한 쪽 말만을 들으면 안 되오. 말할 기회는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똑같이 주어야 하오. 어떤 사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시오(신명기 1:16-17,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의 가르침과 어긋난 삶은 너무 자주 불공평하다. 그러면 희망은 없는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 코헬렛은 정의와 공의가 짓밟힌 세상을 보아도 놀랄 것 없고, 높은 자 위에는 더 높은 재판관이 있다는 것을(5:8) 상기시킨다. 모든 일을 판결할 가장 높은 재판관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이 희망이다. 하나님의 판결이 있을 것에 대한 믿음이다. 또한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라도 땅이 주는 소산으로 먹고 산다(5:9)라는 사실 역시 희망이다. 억압하는 사람이나 학대를 당하는 사람이나 결국 가장 높은 재판관 하나님 앞에서 열등하지도 우월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모든 인류는 ‘하늘 위에’ 계신 주권자의 통치와 판결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땅에 속한’ 평등한 존재다.
그러면 최고 재판관의 판결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당장 악의 심판이 없는 ‘연기된 심판’ 앞에서 어떻게 견뎌야하는가? 코헬렛도 처벌받지 않는 악을 보며 몹시 불편했다(8:10-14). 코헬렛은 정의가 지연되는 것을 보고 ‘헤벨’을 토로하며(8:10) 허탈하고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악행에 상응하는 심판이 곧장 실행되지 않을 때 발생할 악행의 대담성을 말하기도 했다(8:11). 악행을 저질러도 장수하는 악인을 주목했다(8:12). 어디 그뿐인가. 악인이 받을 처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을 보상을 악인이 받는 일도 있다. 그래서 코헬렛은 기막힌 현실세계를 향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외친다. ‘헤벨’이로다!(8:14) 세상은 이토록 부조리하다.
흑과 백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총천연색으로 펼쳐지는 현실세계,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장막을 치신 ‘미지’의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3:11). 코헬렛은 변덕스럽고 풀기 어려운 현실 문제에 다시 삶의 즐거움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8:15), 그는 허무, 덧없음, 부조리, 수수께끼, 불합리, 무상함, 아이러니를 포괄하는 ‘헤벨’의 세상을 과감하게 발설하며 세상 문제들 앞에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는 ‘지금여기’ 신앙의 독자들을 초대한다. 현실의 모든 까다로운 문제들 앞에서 신중한 태도로 자신을 열어두도록. 고통과 환희, 실패와 성공, 눈물과 유머가 교차하는 삶의 역설과 모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도록. 규범화된 지식과 진리만이 아니라 모순투성이인 실존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그렇게 코헬렛은 오늘도 지식이 아닌 지혜로 인도되는 대화의 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김순영/안양대 신학대학원 강사,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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