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64)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이사야 59:1-2)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 먹은 하나님/얼굴을 돌리시는 화상당한 하나님/그래도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하나님”(김흥겸). 엄혹했던 시기,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살던 젊은이는 무기력한 하나님에게 화가 났다. 가엾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유린되는 어둠의 시간에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은 ‘내게는 하나뿐인 민중의 하나님’이다. 이것은 노래가 아니라 통곡이다.

 

1970년대 초반 김지하는 희곡 ‘금관의 예수’를 통해 금관이 씌워진 채 저 높은 곳에 모셔진, 그래서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는 예수님을 구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비존재 취급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한 이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 내몰린 어중이떠중이들이 예수를 구한다는 이 역설! 경건한 이들이 보기엔 경악할 만한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낯선 주장은 아니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종교 권력자에 의해 감옥에 갇히신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지 않던가.

 

 

                             고은비 그림

 

 

하나님은 정말 무기력하신 분인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 사고에 눈을 감고 계신가? 불의한 이들이 의로운 이들을 박해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왜 침묵하고 계시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무너지고, 삶이 피폐해졌을 때 자기들을 지키지도 돌보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래서 제국의 신들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깊어갈 때 이사야를 통해 한 말씀이 임한다. 

 

“주님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고, 주님의 귀가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59:1-2)

 

원망하는 것은 약자의 버릇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성찰하지 못한다. 주어진 현실에 즉자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그러나 이사야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하나님은 무기력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연루되기를 꺼리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이 만든 불투명함 때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얼굴을 돌리셨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얼굴을 돌린 것은 백성들이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이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신다. 지금은 우리의 불충을 고백하며 울 때이다. 

 

*기도*

 

하나님, 편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삽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인생의 봄날이 지나가고 엄동설한과 같은 고통의 시간이 찾아오면 다급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이것이 못난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원망을 터뜨립니다.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같은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에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감싸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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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3)

 

비움과 채움 
   

 

이른 아침부터 안식관 공사 현장에서는 일이 시작이 되었다. (감리교 은퇴여교역자를 위한 거처인 ‘안식관’을 두고 이웃들 중에는 납골당을 짓는 것이냐 묻는 이들도 있어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 여선교회에 건의를 했는데, 그 결과는 아직 모르겠다.) 지난겨울부터 그날그날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모양을 갖추고 있다.

 

새로운 층을 올리기 전 바닥을 합판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 위를 스티로폼으로 덮는다. 아마도 보온과 방음을 위한 공정이지 싶다. 나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부분을 소홀히 하면 후유증이 생긴다.

 

 


 

합판과 스티로폼으로 덮은 부분이 한 층의 바닥이 되지 싶다. 바닥면 사이사이로 바둑판처럼 이어지는 빈 공간이 있는데, 건축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그곳이 벽이 되겠다 싶다.

 

집 하나를 지을 때에도 비움과 채움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본다. 튼튼하게 세운다고 모두를 채우면 공간이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모두를 비우면 건물이 설 수가 없다.


어디 한 채의 집뿐일까, 모든 존재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이라는 존재도, 우리라는 존재도, 교회라는 존재도 비움과 채움으로 세워지지 않는 존재는 세상에 따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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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벽에 소변 보는 자”

 

 

좀 지저분한 말이 되어 주저스럽지만, 서서 오줌 누는 이들 때문에 벽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한다. 벽에다 대고 함부로 소변을 보는 것은 남자하고 개뿐이다. 아직도 서울의 으슥한 골목길 벽은 남자들의 공중 화장실이 되기 십상이다.

 

소변금지를 알리는 구호도 갖가지다. 어떤 곳에는 가위를 그려놓고 위협을 주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개 이외는 여기에 소변을 보지 마시오”라고 써서 주정뱅이 오줌싸개들을 개로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노상방뇨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또 이런 것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어에서 사내를 경멸하여 일컬을 때 “벽에다 대고 오줌 누는 놈”이라고 한다. 즉 “서서 오줌 누는 놈”이란 말이다. ‘남자’나 ‘사내’라고 써도 될 곳에 이런 고약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 경우는 대개 그 사내들을 저주하는 경우이다. 씨를 말려 버린다거나 멸족시켜 버릴 사내들을 경멸조로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구약성서에 모두 여섯 번 나온다(삼상 25:22, 34; 왕상 14:10; 16:11; 21:21; 왕하 9:8),

 

“벽에다 오줌 누는 놈”이란 표현은 실제로 벽을 향해 소변을 보았거나 보고 있는 남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오줌 누는 자” 곧 ‘남자’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말 성서에 이 표현은 ‘남자’(개역, 개역개정), 혹은 ‘사내 녀석’(공동번역)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개역성경의 ‘남자’는 너무 완곡하여 경멸하려는 본래의 뜻을 못 살렸다. 공동번역의 ‘사내 녀석’은 그 뜻을 좀 살려 보려 했지만 히브리어 표현 뒤에 있는 해학적인 맛을 전달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렇다고 직역을 해 놓으면 이것이 정말로 벽에다 대고 소변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버려 남자 일반을 일컫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할 바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못한다는 반어법도 있다는 점이다.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놈이 되면, 이건 노골적인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의 표현을 따지고 보면, 남자를 나타날 때 다른 성품이나 특징이 아니라 성기를 손으로 잡고 소변을 보는 자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때나마 겨우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 뭐 이런 식의 경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리 치나 저리 메치나 이 표현은 상대에 대한 능멸이 담긴 것임은 틀림없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 좀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는 녀석, 손해 볼 줄 알면서 기어코 직언을 하는 자, 이런 식의 사내대장부는 아닌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서에서 이 오줌 싸는 장면을 불알 두 쪽 운운하면 아마 난리가 나도 엄청 난리가 날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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