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77)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애굽기 23:9)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것이다.

 

‘게르’ 곧 ‘나그네’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개종자였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서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여인이다. 룻은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철저히 동화된 이들을 게르 체덱(ger tzedek)이라 한다. 

 

이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이스라엘에 동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 토라는 이들을 게르 토샤브(ger toshav)라고 부른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 안식일 규정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에 쉬어야 할 대상을 죽 열거한다. ‘너희’, ‘너희의 아들이나 딸’,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너희 집짐승’, 그리고 마지막이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출애굽기 20:10)이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토라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성결법전에서 하나님은 ‘게르’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신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삼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하신 것은 그들이 나그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좌절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할 수 있지 않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그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해방자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 복받는 길이기도 하다. 신명기법전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을 배불리 먹일 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신명기 14:29)

 

*기도*

 

하나님, 세상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거침없이 내뱉는 욕설과 냉소가 우리 가슴을 멍들게 만듭니다. 가슴에 멍이 든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함으로 보상을 얻으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의 곤경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이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라 명하십니다. 그 명령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들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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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1)

 

거울

 

의식하지 않아도 보게 되는 모습이 있다. 목양실 책상에 앉으면 책상 오른쪽으로 큰 창문이 있고, 고개만 살짝 돌려도 창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따금씩 마주하게 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다. 정릉교회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네모난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고, 그 기둥을 시작으로 담장이 이어지는데, 볼썽사나운 모습은 그 기둥 뒤에서 일어난다.


남자들이 문제다. 콘크리트 기둥을 핑계 삼아 벽에다 오줌을 눈다. 벽을 향해 돌아서면 기둥이 자신을 가려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지나가는 행인으로부터 겨우 자신의 얼굴만을 가려줄 정도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벽에다 대고 오줌을 누는 뒷모습이 2층에서는 빤히 내려다보인다. 벌건 대낮에 남자 망신을 사는 모습은 아주 드문 모습이 아니어서, 한 두 명이 벌이는 못된 버릇은 아니지 싶었다.

 

그 모습이 영 언짢은 것은 오줌을 누는 벽이 공터 쪽에서 보면 허름한 벽이지만, 얇은 벽 반대편은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해당된다. 저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예배당으로 들어설 때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독한 지린내에 인상을 찌푸려야 할 터,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싶었다.

 

 



 



이런 경우 몇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직설적으로 고지식하게, 이왕이면 붉은색 스프레이로 ‘소변금지’라 벽에다 쓰든지, 조금은 유머를 담아 눈앞에서부터 점선을 그은 뒤 일을 다 보기 전쯤 눈길이 멈출 만한 곳에 가위를 그려놓는 것이다.

 

생각하다가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벽에다가 작은 거울을 하나 달았다. 딱 그 자리에 서면 자기 얼굴이 보일 딱 그 자리에. 그런 이유로 정릉교회 초입 기둥 뒤편 허름한 벽엔 거울 하나가 달려 있다. 허름한 공터에서 누가 거울을 본다고 벽에다 거울을 달았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 할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그곳에 서서 바지춤을 내리려던 누군가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갸웃 하기를.

 

거울 때문일까, 거울을 달고 보름쯤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은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얼굴을 무시하는 이를 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노상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니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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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6)

 

힘을 내어라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4-5)

 

규모의 문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했다. 모든 가치가 숫자로 환원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성적, 점수, 연봉, 재산, 아파트 시세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인다. 숫자 앞에서는 우정도 박애도 인간적 친밀함도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름다움과 몸까지도 숫자로 관리되기에 피트니스 센터는 새로운 신전이 되었다. 체중, 몸매, 체질량을 전문가의 손에 맡겨 관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질서에 확고히 포획된다.  

 

신앙인들조차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가르고, 교회의 크기에 따라 목회자들의 계급 관계가 만들어진다. 큰 교회 목사들은 신앙적 깊이나 인간적 품격과는 관계없이 발언권을 독점하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이유 없이 주눅 들어 지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던가?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 숫자를 늘리면 그들은 유능한 목사라 인정받는다. 저마다 백향목이 되어 모든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겨자풀들의 천국을 가르쳤던 예수님은 오늘의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들은 성전을 지음으로 삶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 뜻은 장했으나 척박한 땅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지자, 환멸이 찾아왔고 성전 건축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사는 것이 힘겨운 판에 성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학개는 성전을 포기했기에 삶이 어려워진 것이라 말하며 성전 건축을 독려한다. 뜻이 바로 서야 삶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학개의 독려를 통해 성전 건축 공사가 재개되었다. 성전 터가 정비되고 기초가 놓일 때 옛 솔로몬 성전의 영화로움을 기억하던 이들은 그 초라한 규모를 보고 통곡한다. 그들의 울음은 다른 이들까지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건만, 사람들은 규모에 집착한다. 그때 학개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학개 2:4)

 

‘힘을 내어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여호와의 확언이다. 에스겔은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성전 혹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학대받은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건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대체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세상에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이다.

 

*기도*

 

하나님,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을 때 주님은 그 성전의 무너짐을 보셨습니다. 진리를 권위로 바꾸고, 거룩을 이익으로 바꾼 성전 혹은 교회는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이 두려운 진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교회만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늘 망설이면서 실행의 시간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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