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78)

 

베들레헴의 우물물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니,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이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그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그러자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 세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사무엘하 23:13-17)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것을 보면 아직 그가 절대왕권을 수립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수확철은 언제나 전쟁의 시기였다. 수확물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로 무장한 블레셋이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윗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고향이 그리워서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하지만 삼십인 특별 부대에 속한 이들 가운데 세 명의 장수는 다윗의 그런 탄식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친다. 

 

보기 드문 충성이고 용기이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을 통해 그들이 새 삶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동굴’에 피신하고 있던 다윗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던 때의 첫 마음을 잃은 채 전제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다윗은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아둘람 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사무엘상 22:2)이 모두 다윗에게 몰려왔다. 다윗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들을 세심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다. ‘뿌리 뽑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세 장수는 자기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다윗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휘하 장수들이 떠온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다. 그 물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물 한 잔의 유혹 때문에 부하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윗은 아뜩해졌다. 다윗은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면서 말한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17절) 여기서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제가 어찌 감히’라는 구절이다. 바로 이 마음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마음이다. 그는 부하들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윗이 물을 땅에 부어 주님께 바치는 순간, 그 장수들의 가슴에 감동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아, 우리를 이렇게도 아끼시는구나!’ 그들을 묶었던 연대의 끈이 더욱 튼실해졌을 것이다.

 

사무엘서 기자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삽입한 것은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물을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다윗은 해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고달플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그곳에 가면 스산했던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의 원기가 회복되는 곳 말입니다. 전장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다윗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은 그의 속에 깃든 외로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헌신을 통해 다윗은 자기 본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한정없이 방황할 때, 주님, 우리 마음을 원위치로 되돌려줄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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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2)

 

저물 때 찾아온 사람들

 

저물어 해 질 때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왔다.(마가복음 1:32) 그들은 왜 해가 질 때에 왔을까? 하루 일이 바빴던 것일까,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날이 선선해지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짚이는 이유가 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21절)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 외엔 고칠 수가 없었다. 필시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의 해가 질 때를 기다려 병자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 법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었다. 안식일이라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마가복음 3:4)고 하신 분이시다. 당시의 종교적인 잣대로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만, 하나님께 붙잡힌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우셨다. 어찌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규정 안에 가둘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이 조심스럽게 안식일의 해가 저물 때를 기다려 찾아온 것이었지만, 그들을 사랑으로 맞아주신 것이었다.
  

 

 

 


다들 바쁜 목회 일정,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일 수 있는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친구가 이 땅을 훌쩍 떠난 지 1년째 되는  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에 선한 친구의 사진을 제단 앞에 놓았고, 그 옆에 하얀 빛깔의 꽃을 놓았다. 동기 목사들이 모이는 날, 나는 그렇게 자리만 만들자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말씀을 나누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곁을 떠난 친구야 말로 저물어 해 질 때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회에서 외면 받던 사람들, 중심에서 밀려나 무시당하던 사람들, 친구는 그들을 만나고 품어주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때로는 오해를 받고 때로는 비난을 받고,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누가 무어라 하든지 친구는 변함없이 약자 편에 섰고 소수 편에 섰다.

 

돌아보니 그랬다. 저물 때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 사람, 친구는 세상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속 좁은 세상을 향해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난 친구가 더욱 그리웠다. 그가 남긴 빈자리가 더욱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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