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3)

 

억지가 없는 사람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누가복음 9:51-56)

 

예수적 삶의 특색은 비폭력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공생애 전체가 그러하거니와 그의 마지막 순간도 그러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가해加害피해被害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훌쩍 뛰어넘은 자유인이었다. 어떤 학자는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낯선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에서 낯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누가가 들려주는 예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상과 접촉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한가로운 여행이었다면, 혹은 영광을 위한 여정이었다면 굳게 결심까지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향한 행진이었기에 비장한 여정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적대적이었다. 몽둥이를 들고 나왔는지, 싸늘한 눈길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 일행을 환대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 이유를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정서적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질서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다.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옛 질서는 그들을 이방인 취급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에 불인두로 지진 상처처럼 아프게 새겨진 것은 소외감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 일행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이 참 딱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라 할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더욱 딱하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반응에 분개하여 말한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누가복음 9:54) 가슴에 마치 잉걸불이라도 품은 것 같은 격렬한 반응이다. 그들은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진설해 놓은 제물을 활활 사르던 갈멜 산의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식식거리는 제자들이나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꾸짖을 생각도, 그들을 훈계할 생각도 없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향하셨다. 길이 막히면 에돌아 나가는 물과 같다. 도무지 억지가 없다. 그렇기에 비애도 없다. 이런 삶의 홀가분함을 배우고 싶다.

 

*기도*

 

하나님, 선의를 가지고 다가서도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차가운 냉대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우리 마음도 그만 겨울 왕국처럼 변하고 맙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서운함은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호의가 적대감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 일쑤 낙심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처럼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 넉넉함을 우리 속에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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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5)

 

향기로 존재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목양실에 올라와 앉으면 세상이 고요하다. 아직 만물이 깨어나지 않은 시간, 시간도 마음도 고요해진다. 설교를 준비하기에도 좋고, 글을 쓰기에도 좋고, 책을 읽기에도 좋은, 가히 아낄만한 시간이다. 때로는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고요함을 깨트린다 싶으면 얼마든지 삼간다. 

며칠 전이었다. 그날도 새벽기도회를 마치고는 목양실로 올라와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기 시작을 했는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향기가 전해졌다. 모르던 향기였다. 흔한 향기가 아니었다. 애써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그러느라 무심결에 드러났다 잠깐 사이 사라지는 향기였다. 내가 맡은 것은 그런 향기의 뒷모습이지 싶었다. 그럴수록 향기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마음을 베는 듯 뭔가 날카롭고 깊은 느낌이었는데, 무디고 마른 감각을 일깨우는 향기였다. 

내 방에 들어온 낯선 향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향기의 근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향기의 근원을 찾다니,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었다. 처음 맡은 향기였고 짐작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향기였지만 의외로 금방 향기의 근원을 찾아냈다. 

 

 

 


목양실 창가 쪽에는 화분이 몇 개 있는데, 못 보던 화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한창 꽃을 피운 난이었다. 유난히 키가 작은 화분에서 꽃대가 올라와 꽃을 피웠는데, 꽃의 빛깔도 범상치 않았다. 검은 빛을 머금은 진한 적색이었다. 현란한 탱고 춤사위를 떠올리게 하는, 방금 맡은 향기와 그럴 듯이 어울리는 빛깔이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맡으니 방금 전에 맡았던, 바로 그 향기였다.

알고 보니 권사님 한 분이 전한 것을 사무 간사가 올려다 놓은 것이었다. 며칠간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와 화분을 전했다는 것도, 창가 쪽에 놓아두었다는 것도 몰랐던 일이었다. 

향기만큼이나 나를 즐겁게 한 것이 있다.
숨겨진 자신의 존재를 향기로 알리는 것이 세상에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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