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5)

 

주님의 위엄에 눈 뜨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시편 8:1-3)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거듭해서 이 구절을 되뇌이다 보면 우리는 일상의 잗다란 일들로부터 벗어나 우주에 가득찬 신비 앞에 서게 된다. 뭔가를 보며 !’ 하고 경탄할 줄 안다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다. 놀랄 줄 모르는 것이 타락한 영혼의 특색이라지 않던가. 뭘 봐도 그저 심드렁한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진 사람 혹은 영혼의 샘물이 말라버린 사람이다.

 

앤터니 플루(Anthony Flew)라는 영국 철학자가 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그가 쓴 책은 무신론의 교과서로 통했다. “신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며 신을 부인했던 그가 82세에 <신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논거는 자연의 법칙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3) 하고 노래했던 히브리 시인의 마음을 그도 느꼈던 것일까? 앤터니 플루의 전향에 가장 실망한 것은 역시 과학적 합리성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던 무신론자들이다. 하지만 여든 두 살 노인의 이런 변화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후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해야 할까

 

 

 

 

구상 선생님은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마음의 눈을 뜬다.//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고 노래했다사물들을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총총한 별처럼 빛나더라는 시인의 고백이 아름답다. 이런 눈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는 우러러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장엄함 앞에 멈추어 설 줄 아는 능력,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현될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는다시인은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그는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눈에 하늘에 무심히 떠 있는 해와 달, 그것은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다. 이런 눈이 열릴 때 세상은 욕망이 진창이 아니라 신비가 깃든 땅이 된다

 

*기도*

 

하나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알 수 없는 비애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아름답고 멋지게 살고 싶은 바람이 크지만 현실은 잿빛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면 마음조차 환해집니다. 잊고 있었던 맑음의 세계와 아름다움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치유해줍니다. 세상 만물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그 신비 앞에서 경탄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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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7)

 

 

 오덴세와 조탑리  
  

독일에서 살 때 몇 분 손님들과 함께 덴마크를 다녀온 적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9시간 정도를 달리자 덴마크 땅이었다. 동행한 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검색 없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너무나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덴마크를 찾은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오덴세 방문이었다. 오덴세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클림트와 모차르트를 빼고 비엔나를 생각하기가 어렵듯이, 오덴세 또한 안데르센을 빼고는 말할 수가 없는 도시였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안데르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데르센이 죽었을 때 덴마크의 모든 국민들이 상복을 입고 애도했을 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니 당연한 일이겠다 싶기도 하다. 


안데르센 기념관에는 안데르센에 관한 온갖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과 종이를 오리는데 사용한 가위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밧줄도 있었는데, 사연이 재미있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안데르센은 언제라도 화재가 나면 밧줄을 타고 탈출하려고 늘 밧줄을 챙겨 다녔다는 것이다. 


넓은 잔디밭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물론 주변에 사는 이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나와 잔디밭에 편히 앉아 안데르센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나는 전시관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야기 속에는 꿈이 있네요. 사랑도 있고요. 왜일까요, 이곳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건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는 작은 흙벽돌집이 있다. 창고라 해도 허름해 보이는, 지극히 작고 낡은 흙벽돌집이다. 그 집의 주인은 지금 집에 없다. 방에 들어온 생쥐한테도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시골교회 예배당 종지기로 살면서 자기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것들을 눈물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빛나는 동화를 썼던, 바로 권정생이 살던 집이다. 


 


 

이번에 경북북지방 연합성회를 인도하기 위해 영주를 다녀오며 그곳 목회자들로부터 권정생 이야기를 들었다. 권정생은 정말로 비렁뱅이였다고 한다. 폐병이 든 거지여서 지금도 권정생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문전걸식을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종을 치는 조건으로 일직교회 구석방 하나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권정생이 남긴 전 재산과 그 앞으로 나오는 인세 모두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일에 쓰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결국은 권정생 기념관이 조탑리에 세워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덴세와 조탑리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극과 극처럼 다르다. 권정생에겐 차라리 덩그마니 버려진 듯 남아 있는 조탑리 흙집이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프고 슬프다. 외롭고 불쌍한 것들 품고 살더니, 끝까지 외롭고 불쌍한 권정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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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4)

 

절실함과 신뢰가 만날 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마태복음 8:5-13)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그 앞에 나아와서 간곡하게 말한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반응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성은 우리에게 다음에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말은 다소 장황하다 싶을 정도이다. 자신은 주님을 집으로 모실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셔도 종이 나을 거라고 말한다. 자기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부하들이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종의 병이 물러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신앙의 전범으로 소개한다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첫째그는 공감(sympathy, 동정)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공감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열어놓은 상태를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서보는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르다. 공감이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는 점에서는 감정이입과 비슷하지만,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감정이입은 쉽지만 공감은 쉽지 않다백부장은 종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떠돌이 유랑 설교자 앞에 나아와 간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둘째, 백부장은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무한히 신뢰한다. 예수님이라면 종의 병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종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과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결합하여 기적을 일으켰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초겨울 저녁, 술 한 잔을 걸쳐 약간 취기에 찬 그는 제자와 쌀쌀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제자는 선생께 고구마를 자시겠냐고 묻자 무위당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저기 군고구마라고 쓰인 글을 보게. 초롱불에 쓰여진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신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뜻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저 글씨는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중에 나오는 김종철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재인용)

 

절실한 마음에서 진실이 나온다.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가 절박한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씨에서 장 선생님은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 온갖 필법을 연마한 끝에 써내려간 일필휘지보다도 군고구마 장사의 글씨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신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정직하고 절실한 이들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의 모태는 이런 자기 겸비와 절대적 신뢰이다. 주님은 백부장의 그런 신뢰에 대해 명쾌한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도 간결하다

 

*기도*

 

하나님, 부정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은 돌가슴으로 변했습니다. 이웃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혀를 찰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외로운 이들은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괴로운 이들은 홀로 그 고통의 심연을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종, 종교, 문화, 계급, 민족 등 사람을 갈라놓는 인위적 장벽을 넘나들며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종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백부장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과 만나자 치유의 빛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그 빛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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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6)

 

 심방  


  
심방을 시작했다. 이른바 ‘대심방’이다. (그렇다고 ‘소심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심방을 흔히 대심방이라 부른다) 요즘은 세태가 바뀌어 가정으로 찾아가는 심방이 갈수록 줄어드는 형국이다. 새로 등록하는 교우 중에서도 가정 심방을 받기 원하는 이들은 소수가 되었다.


생각하다가 가정심방을 하기로 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고 피곤도 하겠지만, 가정 심방을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싶었다. 정릉교회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하는 심방, 각 가정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서로를 잘 이해하는 길도 드물겠다 싶었다.


 

                                 사진/송진규

 

최소 인원으로 찾아간다. 나와 아내, 그리고 심방 전도사가 동행을 한다. 부목사와 속장 등도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각 가정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야기를 나눈다. 미리 적은 기도카드를 앞에 두고 형편과 사정 등을 이야기하며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것이다. 어디 이야기가 따로 있고 예배가 따로 있겠는가, 이야기는 이미 예배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눈물짓는 이야기들이 있다. 응어리로 가라앉아 있는 아픔이 있고, 생채기로 엉겨 있는 일들이 있다. 남에게 내보이기 싫고 부끄러운 모습이 누구에게 없을까. 부끄러움까지 내려놓고 나누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우리가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얼마 전부터 불청객처럼 찾아온 전정 신경염으로 어지럼증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 심방을 마치고 나면 몸과 마음과 목소리가 젖은 솜처럼 가라앉는다. 하지만 나는 목사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심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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