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6)

 

생명은 소명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요한복음 12:44-50)

 

마틴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존재 망각'이라 한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살기에,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 또한 없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두할 따름이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召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다. '할 일'이 뭔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면 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워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 말이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엄마가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드레싱을 끝낸 간호사 선생이 병실을 나서면서 내일 아침에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까 수유실로 내려오세요하고 말했다. 그 엄마는 다소 당황스러운 어조로 내려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기가 막힌 말 아닌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셈이다. 우리는 삶의 입구와 출구를 잘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들이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의 존재의 중핵이다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영원의 등불을 밝히셨다. 세상 길에서 방황하다가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며 그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그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 수 없다.

 

*기도*

 

하나님,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성 어거스틴이 바쳤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분주한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니 우리는 존재-망각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넘치지만 정작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죽비처럼 우리 마음을 뒤흔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삶으로 빛을 밝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등불이나마 밝혀드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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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8)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Equal-Time Point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서진교 장로님을 통해서였다. 창천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숙소에서 교회까지, 교회에서 숙소까지 나를 태워다 주신 분이 서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은 새벽에도 정한 시간에 맞춰 숙소로 찾아와 교회로 가는 수고를 해주셨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장로님과 차를 타고 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장로님은 비행기를 모는 항공기 조종사 출신이었다.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른 분들을 만나면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다. 장로님이 들려주는 비행기 혹은 비행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불환귀점’이었다. 언젠가 읽은 글에 불환귀점이라는 말이 있었다. 청년부 수련회에서는 그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런 말이 맞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글에서는 ‘불환귀점’을 비행기가 일정한 지역을 지나가면 남아 있는 연료의 양 때문에 출발지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목적지로만 날아갈 수밖에 없는 한 지점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었다. 신앙적으로도 의미 있다 여겨져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EPT였다.

장로님 대답에 의하면 ‘불환귀점’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가 있었는데, 바로 EPT였다. Equal-Time Point의 약자였는데, 이 말을 직역하여 ‘등시점’이라 옮긴 곳도 있었다. EPT는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과 출발지로 회항하는 시간이 같은 지점’을 의미하는 말로, 유사시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운항을 결정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된다. ETP를 확인하여 출발지로 돌아갈 것인지, 목적지 또는 대체 비행장에 착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어디로 정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거리가 아니라 시간인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 연료의 소모량은 거리를 기준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신앙이란 Equal-Time Point를 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전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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