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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9)

 

사랑의 레가토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레가토(legato)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음악용어이다. 끊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음표 위나 밑에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서로 이어주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표가 레가토이다이 기호를 슬러slur라고도 부르는데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기호이다. 인간은 어쩌면 레가토로 창조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본질은 연결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는 살아갈 수 없다. '탯줄'을 가리켜 생명의 레가토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머니와 아이가 한 생명에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러한 육체적 탯줄을 있게 한 정신이나 사랑 역시 레가토이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둘 사이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그리움과 기다림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정작 아름다운 것은 까막까치가 놓아주는 오작교(烏鵲橋)가 아닌가 싶다. 둘의 공간적 격절을 이어주는 사랑의 다리, 바로 이것이 만남에 대한 갈구가 낳은 하늘의 레가토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이음줄이다. 죄로 말미암아 나뉘었던 하늘과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이어주셨으니 말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만남의 현장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 죄인도 원수도 하나가 되었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삶을 경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일한 부류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인 시몬과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가 함께 있다.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품은 용광로와 같다. 그 품 안에서 '작은 차이'(小異)는 녹아내리고 '큰 같음'(大同)으로 거듭났다. 바울은 교회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연결'(fitted)'결합'(joined together)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개별적 존재로 살던 이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까막까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깊이 공감했기에 다리가 되어 주었다. 지금 세상은 '까막까치'가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삶의 높낮이가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미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드는 사랑의 일꾼들이야말로 까막까치가 아니겠는가.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는 사랑의 화살을 쏘아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몸이 된다.

 

*기도*

 

하나님, 혐오와 선동의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조차 그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불화와 오해와 멸시의 담을 허무셨지만,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런 담을 쌓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결속 감정을 보란 듯이 비웃고, 외줄처럼 위태롭게 이어진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이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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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0)

 

 사람이 소로 보일 때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 사람이 이따금씩 소로 보일 때가 있었다. 분명 소로 알고 때려 잡아먹고 보면 제 아비일 때도 있고 어미일 때도 있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 번은 한 사람이 밭을 갈다가 비가 쏟아져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는데, 웬 송아지가 따라 들어오더란다. 돌로 때려 잡아먹고 보니까 웬걸, 자기 아우였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엉엉 울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괴로운 마음에 보따리를 싸들고 길을 떠났다. 사람이 소로 보이지 않고 사람으로만 보이는 곳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넓은 세상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느라 강물에 떠내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고,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어 호랑이의 밥이 될 뻔도 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어느 날 파란 바람이 부는 한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보아 잡아먹는 일 없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바로 마을을 만난 것이었다.


 

 

나그네는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없으니 희한하군요.” 그러자 그 노인은 껄껄 웃으며 “웬걸요. 우리도 옛날에는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이따금 있었는데, 사람들이 파를 먹으면서 눈이 맑아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여서 그런 일이 없어졌답니다.” 하는 게 아닌가. 나그네는 파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노인은 그를 데리고 파밭으로 가서 파를 보여주었는데, 파 씨를 얻은 나그네는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기 집 텃밭에 파 씨를 심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를 만나려고 이웃의 친구들이 찾아오자 반가운 마음에 “어서들 오시게. 내가 보고 온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지.” 일어서서 맞이하려는데 친구들 눈에는 그가 소로 보였다. “웬 소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군!” 하면서 도끼를 번쩍 드니 “아니야, 나는 소가 아니라 자네들의 친구일세.” 소리를 쳤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텃밭에서는 파란 싹이 돋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향기에 이끌려 파를 뜯어먹었다. 그런데 파를 먹은 사람들은 눈이 맑아져서 더 이상 사람을 소로 보는 일이 없어졌고, 그 후로는 아무도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힘이 어찌 채소 파에 있을까, 필시 파를 먹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소로 보고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시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잃어버린 눈물을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존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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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8)

 

상처를 무늬로 바꾸라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3-30)

 

예기치 않은 풍랑이 우리 인생의 항해를 힘들게 만들곤 한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 우리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비통한 울음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악다구니일 수도 있고,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압도적 시련을 겪는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시편 107:25-27)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상황,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모두 쓸모없게 되는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어떤 이는 생을 저주하고, 어떤 이는 파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 곤경의 순간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질병, 고통, 유한함의 자각, 죽음’ 등의 한계상황은 우리 실존의 비약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비본래적인 것에 팔렸던 마음을 되찾고, 본래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고통은 ‘복된 고통’이 된다. 

 

 

 

 

감나무 가지는 유난히 잘 부러진다. 감을 딸 때 가지를 꺾게 되는 데, 가지마다 입은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가면 검게 뭉쳐진 듯한 무늬가 만들어진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의 무늬이다. 사람들은 그걸 귀하게 여겨 목공예 재료로 쓰기도 하고 고급 가구를 만들기도 한다.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겠다고 여겨요."

 

삶은 본래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삶이 힘겹다 하여 주저앉아 버리면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힘을 불어 넣어 상처를 무늬로 만들 수 있게 하신다. 흙을 빚어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고통과 슬픔의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인격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8-30)

 

*기도*

 

하나님,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참 작구나’ 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도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던 것들이 다 지푸라기 인형처럼 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듭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때, 우리 마음은 잔잔해집니다. 풍랑이 지나갔다 하여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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