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00)

 

오, 복된 약함이여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2-14)

 

바울 사도가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번째 선교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향했다. 바울 일행은 해안을 이용하지 않고 케스트루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역의 번화한 도시인 버가에 상륙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조력자로 따라 나섰던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던 것 같다. 바울은 이 일로 상심했다. 그도 또한 건강이 여의치 못했다. 그는 버가 선교를 포기하고 곧장 소아시아의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다. 해안 풍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텐데, 그곳은 버가에서 약 1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몸이 성치 못한 이들이 걷기에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갈라디아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낯선 곳이 주는 심리적 중압감과 더불어 건강도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역민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바울은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한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바울의 약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선의 본능을 깨웠던 것이다. 사람은 강자나 빈틈없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저항감을 느끼지만 약자를 볼 때는 동정과 연민에 사로잡힌다. 

 

사람은 누구나 강하고 똑똑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충동과 경계심 때문에 세상은 경쟁의 마당이 되어 버렸다. 경쟁의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이다. 물론 모든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의식이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경쟁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다.

 

경쟁의 창날이 부딪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거칠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다. 물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화도 잘 내고, 욕심 사납고, 때로는 폭력적인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람됨은 연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연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복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돌봄을 받은 자가 돌보아 준 이들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내놓았다. 연약함을 돌보는 일을 통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복음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표징이 나타났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약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상처를 드러냈다가 그 상처가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냉혹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라 이르십니다. 그런 이들의 벗이 되려고 마음을 낮출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됨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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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1)

 

 더는 못 볼지도 몰라

 

심방을 하며 교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찌 삶이 평온하기만 할까, 고되고 험한 삶도 적지가 않다.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달동네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사전에서는 달동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허가 주택과 노후 불량 주택이 밀집된 도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을 말하며, 산동네라고도 한다. 6 · 25 전쟁에 따른 이재민들에게 무허가 건축 지대의 지정을 시작으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이농으로 생긴 도시 저소득층을 도시 외곽의 구릉 지대에 집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위 긴 골목 끝에 있는 권사님 집도 그랬다. 세상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작은 방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연로하신 권사님은 눈과 귀가 어두운데, 그나마 한쪽 눈에 안대를 댔다.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하늘의 위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은 간절해진다.

예배 후 권사님이 준비한 음료를 마시는데, 바라보니 벽에 웬 글씨가 붙어 있다. 읽어보니 찬송가 가사였다. 달력 뒷장에 권사님이 써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찬송가를 적으셨네요?”


권사님께 여쭸을 때 권사님이 대답했다.


“눈이 점점 나빠져서 더는 못 보겠다 싶기에 그래도 눈이 보일 때 적었어요.”  

 

눈이 흐려져 더는 못 볼지도 모르는 시간을 앞두고 적은 찬송가 가사는 “험한 산길 헤맷때 주의 손 굿끼잡고 찬송하며 가리”였다. 주님은 바로 읽으시리라, 바로 들으시리라, 그리고 권사님 손 굳게 잡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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