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갈수록 근사해지는 삶

김기석의 새로봄(102)

 

날이 갈수록 근사해지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이 견결한 희망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죽음의 공포조차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한다. ‘떠난다’(analyo)는 헬라어 단어는 배가 묶여 있던 줄을 풀고 항해에 나서다, 죄수가 석방되어 감옥을 떠나다, 소가 멍에에서 풀려난다 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죽음은 해방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세상에서의 그의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명이란 성도들을 더욱 발전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과 믿음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립보서 1:24)

 

‘나의 있음’이 그의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는다. 남 좋을 대로 살려고 애쓴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고, 웃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신다. 도종환 시인의 <가죽나무>는 언어로 그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대들보로 쓰이지도 못하고, 좋은 재목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살려고 애써온 시인의 살뜰한 정성이 귀하게 생각된다. 위대한 첼리스트인 카잘스의 전기를 읽다가 아름다운 고백과 만났다.

 

“지난 생일(1969년 12월 29일)에 나는 아흔 세 살이 되었어요.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지요. 사실 아흔 살보다는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이란 상대적인 문제잖아요. 만약 여러분이 계속 일을 하면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반드시 늙는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알게 될 겁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그래요. 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감동하고, 삶은 갈수록 더 근사해지니까요.”(앨버트 칸 엮음,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중에서) 날이 갈수록 삶이 근사해진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기도*

 

하나님, 유대의 옛 전설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 순간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을 잊고 말았습니다. 영혼은 남루해졌고, 시야는 좁아졌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기를 바랐던 바울 사도의 진솔한 고백이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뒤흔듭니다. 주님, 우리도 그런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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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3)

 

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창 피었던 난 꽃이 졌다. 붉고 진한 향기를 전하더니 이제는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 향기를 전했냐고 시치미를 떼듯이 누렇게 말라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더 마를 것이 있다는 듯이 꽃의 형체로만 남았다. 시든 꽃에서는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묵중하면서도 코끝을 찌르던 향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향기의 근원을 찾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던 향기이기도 했다. 누군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열정의 탱고 춤을 추듯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 어둠 속에서 세월을 잊고 포도주 빛깔을 익히듯이 향기는 그렇게 은은히 전해졌다.

 

 

 

 

분명 지는 꽃과 함께 향기는 사라졌다. 시든 꽃에서는 어떤 향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향기는 마음 끝에 남아 있다. 향기는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꽃이 피어있는 동안 전해주었던 향기는 남아 있다. 그 때 그 향기를 떠올리면 향기는 기억을 일깨우며 살아온다. 사라져서도 남는, 복된 향기!  

 

향기의 근원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 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잠깐 피었다 사라진 난향이 전해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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