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04)

 

죽원옹(竹園翁), 불이당(不移堂)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마가복음 1:35-39)

 

예수님이 기도로 하루를 열고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난 시몬은 일행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말한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어떤 설렘이 담겨 있다. 베드로는 한번도 사람들의 시선을 끈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베드로는 그런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묘한 자부심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빨리 그들에게 돌아가자고 예수님을 채근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8)

 

주님은 사람들의 성급한 기대와 환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피하신다. 그들 곁에 머물면 인기에 편승해 편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소명에 대한 배신이다. 주님은 사람들의 환호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잘 아신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호산나’를 외치며 반기던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으로 바뀌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람들의 환호에 마음을 주었다가는 중심을 잃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온전케 하기 위해 외롭고 고단하고 팍팍한 길 위의 생을 택하신다.

 

 

 

조선 시대의 선비인 사함 유한렴(士涵 劉漢廉)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 짓고, 집에는 불이당(不移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집에는 대나무 동산은커녕 한 그루의 대나무도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연암 박지원은 글을 지었다. 대나무 한 그루 없어도 그 가슴 속에 대나무를 지니고 있을진대 그는 죽원옹이 맞고, 그 가슴 속에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불이(不移)’의 기상을 지니고 있기에 사함의 집은 불이당이 맞다는 것이다. 연암은 이렇게 글을 마친다. “아! 여보게 사함. 추운 겨울이 되면 내 장차 그대의 집에 올라보고, 그대의 동산을 거닐면서 눈 속에 서걱이는 대바람 소리를 듣고 싶네 그려. 허락해 주겠는가?”

 

주님이야말로 죽원옹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불이당이다.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어떤 달콤한 유혹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주님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을 길로 삼은 사람들이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생명을 온전케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시시때때로 멈춰 서서 주님 앞에 앉아야 한다. 사랑의 실천과 기도가 날숨과 들숨처럼 이어질 때 우리는 영혼이 맑은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된다. 

 

*기도*

 

하나님,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면 행복해하다가도, 거친 바람을 만나면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기쁨도 슬픔도 우리 삶의 일부임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시고, 사람들의 변덕스런 평판을 따라 춤 추다가 삶의 리듬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다 어려움을 겪어도 투덜거리지 않게 해주시고, 사람들의 덧없는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의 본분을 잃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6)

 

주파수를 맞추면

 

“주파수를 맞추면 잡음이 사라집니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를 읽다 만난 한 구절이다.
거듭 밑줄을 치고는 한참을 생각했다, 맞구나!

 

잡음과 씨름을 한다고 잡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잡음만 커진다.

 

 

 

 


잡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주파수를 맞추는 것,
잠시 잡음에서 벗어나 주파수를 맞추면 슬그머니 잡음은 사라진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단강의 일곱 번 목욕  (0) 2019.06.19
교각살우  (0) 2019.06.19
주파수를 맞추면  (0) 2019.06.18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  (0) 2019.06.16
오디가 익는 계절  (0) 2019.06.16
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0) 2019.06.15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