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 숯을 사람 머리 위에 올려 놓는다”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핀 숯을 사람 머리 위에 올려 놓는다는 것은

 

숯을 벌겋게 피워서 그것을 사람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사람이 화상(火傷)을 입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화상을 입고 죽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문맥 속에 들어 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食物)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개역잠언 25:21-22).

 

원수가 있는데,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마침 그 원수가 곤경에 처해 있다. 그 원수가 굶고 있고, 그 원수가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그에게 없다. 옳다! 잘 됐다.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더니 이제 어디 네가 당해봐라, 이렇게 고소하게 핀잔을 줄 법도 한데, 이 사람은 배고파하는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목말라하는 원수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선행이 어째서 살인행위와 일반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사람을 화상을 입히거나 불에 타서 죽게 하거나 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상을 베푸신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핀 숯을 사람 머리 위에 올려놓다”(to heap coals of fire upon one’s head)는 히브리어의 특수 표현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보복(報復)이 아닌 선대(善待)를 받을 때 그 가해자는 차라리 보복을 당하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심정이 될 터이므로 그러한 선대는 그 가해자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심판과도 같을 것이다. 죽을 것 같은 부끄러움에 잘못을 뉘우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선행을 베푼 이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히브리어 표현 아무개의 머리에 핀 숯을 올려놓다라는 말은 아무개를 몹시 부끄럽게 만든다는 뜻이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물을 주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그의 낯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너에게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새번역잠언 25:21-22)

 

영어로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뜨겁게 된다는 표현을 쓴다. 영어번역 Today’s English Version(1976)The New Living Translation(1996)에서 그런 번역을 볼 수 있다.

 

“If your enemies are hungry, feed them; if they are thirsty, give them a drink. You will make them burn with shame, and the LORD will reward you.”(TEV Pr 25:21-22)

 

“If your enemies are hungry, give them food to eat. If they are thirsty, give them water to drink.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f shame on their heads, and the LORD will reward you.”(NLT Pro 25:21-22)

 

잠언의 이 본문이 로마서에도 인용되어 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개역 로마서 12:19-21).

 

바울은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는 그의 권면 속에 잠언 25:21-22의 본문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있다. 번역판들은 잠언과 로마서의 출처와 인용이 같은 의미를 전달하도록 번역해야 할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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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자국이 있는가?

김기석의 새로봄(107)

 

상처 자국이 있는가?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표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라디아서 6:15-17)

 

십자가를 꼭 붙잡은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육체의 할례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할례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이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할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인들이 민족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강조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유대인이라는 외적인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로마서 2:28)라고 말했다. 예레미야 역시 “너희 마음의 포피를 잘라 내어라”(예레미야 4:4)라고 말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7:51)라고 책망했다. 본질과 비본질의 착종이 심각하다.

 

바울은 할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갈라디아서 6:17)라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상처 자국(ta stigmata tou Iesou)이란 말은 ‘예수의 스티그마’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스티그마는 불에 달군 쇠로 소나 말의 엉덩이에 찍어 그 주인을 나타내는 표식을 가리킨다. 바울의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이 있다는 말은 물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과정에서 바울 사도가 겪은 고난의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다. 매를 맞고, 돌에 맞고, 폭동에 휘말리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잠을 자지 못하고, 배척 당하고… 이루 말로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는 많은 고생을 했다.(고린도후서 11:18-33 참조) 

 

입신양명을 노려서가 아니었다. 바울은 왜 이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10) 그가 기꺼이 고난의 길을 걸은 것은 예수의 생명, 시들 수 없고, 더럽혀질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생명을 다른 이들에게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바울의 몸에 난 고난의 흔적들은 그가 누구에게 소속된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위해 사는 사람인지를 확연히 드러내준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도마에게 당신 몸에 난 상처 자국을 보여주셨다. 그 상처는 죄악의 골짜기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하늘로 이끌기 위해 당하신 고난의 흔적이었다. 상처를 내 보이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는 영광만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주님께 내보일 상처는 무엇인가. 그 상처가 없다면, 이웃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징표가 없다면 어떻게 고개를 들고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 

 

*기도*

 

하나님, 본질적인 것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합니다. 주님은 박하와 근채와 회향의 십일조를 바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소홀히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입은 상처가 믿는 이의 표식이라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이제는 힘겹더라도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나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의지가 연약해지지 않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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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은 없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9)

 

대책은 없다

 

요즘 들어 모임에서 말씀을 나눌 때면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로날드 사이더의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에 나오는 내용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호위하던 가브리엘 천사장과 나눈 가상의 대화를 담고 있다.


연약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는 가브리엘은 심히 걱정이 되었다. 과연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일을 그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과연 그들이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남겨진 제자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여 주었고,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을 그들의 가슴속에 남겨주었고,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었고,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심장 한 가운데에 새겨주었다.”

 

 


 

그래도 걱정이 된 가브리엘이 “만약에 그들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대답을 한다.


“그들은 할 수 있다.”


재차 그들이 실패한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느냐고 묻는 가브리엘에게 예수님은 나직하게 대답한다.


“그들이 할 수 없다면, 대책은 없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목이 멘다. 마지막 대목을 예수님의 심정으로 옮길 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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