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無罪)한 피를 우리에게 돌린다”는 것은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무죄(無罪)한 피를 우리에게 돌린다는 것은

 

요나 114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개역요나 1:14).

 

영어 King James Version(1611) 역시 이렇게 우리말 개역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하였다.

 

“Wherefore they cried unto the LORD, and said, We beseech thee, O LORD, we beseech thee, let us not perish for this man’s life, and lay not upon us innocent blood: for thou, O LORD, hast done as it pleased thee.”(KJV Jon 1:14)

 

바다에서 큰 풍랑(風浪)을 만난 선원들이 풍랑의 원인이 된, 도망가는 예언자 요나를 수장(水葬)시키는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를 바다에 던지면서, 하나님께 무죄(無罪)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lay not upon us innocent blood), 더 축자적으로 번역하여, “깨끗한 피를 우리에게 주지 마십시오라고 비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수혈(輸血)을 받을 때 건강한 피, 깨끗한 피를 받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요나서의 본문에서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도망치고 있는 요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선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 범인을 법에 따라 처형하는 것이지,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 아님을, 따라서 사형을 집행하는 자신들이 살인을 범하는 것으로 여김을 받아 죽게 되는 보복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지금 아뢰고 있는 것이다.

 

영어 번역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3, 1978, 1984) 이러한 히브리어 특수 표현의 의미를 살리는 번역을 시도하였다. 요나를 처형하는 것이 무죄한 자를 무고히 처형하는 살인죄가 아님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번역한다.

 

Then they cried to the Lord, “O Lord, please do not let us die for taking this man’s life. Do not hold us accountable for killing an innocent man, for you, O Lord, have done as you pleased.”(NIV Jon 1:14)

 

우리말 공동번역새번역도 이런 의미를 그 번역에 반영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새번역요나 1:14).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야훼께 부르짖었다. “야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우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마십시오. 야훼께서 다 뜻이 있으시어 하시는 일 아니십니까?”(공동번역 요나 1:14)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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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

김기석의 새로봄(112)

 

두려움을 넘어

 

한편 우리의 원수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쳐들어와서 우리를 죽여서, 일을 못하게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들 가까이에서 사는 유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올라와서, 그들이 사방에서 우리를 치려고 한다고, 열 번이나 일러주었다. 그래서 나는 백성 가운데서 얼마를 가문별로, 칼과 창과 활로 무장시켜서, 성벽 뒤 낮은 빈터에 배치하였다. 백성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귀족들과 관리들과 그 밖의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느헤미야 4:11-14)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들은 폐허로 변한 이스라엘을 보고 깊이 낙심했다. 처연한 절망감이 그들을 지배했다. 그러나 탄식만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 변혁은 먹장 구름 너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볼 눈이 열린 사람을 통해 시작된다.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시급했다. 대제사장의 가족들이 먼저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으로 성벽 공사에 나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성벽 공사가 아니었다. 절망의 나락 속에 누워있던 자기 자신들의 존재를 세우는 일이었다. 땅에서 넘어지면 그 넘어진 땅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지 않던가.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게 마련이다. 사마리아 지역의 지방 행정관인 산발랏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라는 소문을 듣고 몹시 불쾌해했다. 그는 예루살렘이 언제까지라도 자신의 통제 하에 놓여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곧 이스라엘인들이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시작했다고 비웃었다. 그들의 피폐한 경제적인 상황으로 볼 때 그 거창한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암몬 사람 도비야도 그 조롱에 가담했다.  “다시 쌓으면 뭘 합니까? 돌로 성벽을 쌓는다지만, 여우 한 마리만 기어올라가도 무너지고 말 겁니다.”(느헤미야 4:3) 이 말은 조롱인 동시에 위협이다. 

 

밀물과 싸워서 이길 사람은 없다. 예루살렘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면 어떤 방해가 있어도 그 일은 성취되게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발랏과 도비야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일을 계속했다. 마침내 성벽이 전부 연결되고, 성벽의 높이도 거의 절반가량 진척되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연대의 감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줬다.

 

 

 

 

 

하지만 희망이 커져갈수록 그것을 고깝게 바라보는 이들의 의구심도 커지게 마련이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여러 부족들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경비병을 세워 밤낮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했다. 하지만 외적인 위협은 노동과 빈곤에 시달린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원망의 씨를 심어놓았다. 느헤미야는 절망감이 이성적 통제의 둑을 넘으면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백성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위대하고 두려운 주님을 기억하고, 형제자매와 자식과 아내와 가정을 지켜야 하니, 싸워라.”(느헤미야 4:14)

 

가야 할 길이라면 울면서라도 가야 한다. 한번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기 시작하면 두려움은 언제까지라도 따라와 우리를 노예로 삼는다. 도망가고 싶은 때야말로 마주 서야 할 때이다. 느헤미야의 말에 고무된 백성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 다른 손에는 무기를 잡았다. 그들은 마침내 일어선 사람이 되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서 겪은 많은 일들이 때로 신음소리가 되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우리는 상처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목소리가 목구멍을 빠져 나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어떤 경우에도 일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를 위협하고 비웃는 이들이 많다 해도 기어코 해야 할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삶이 아무리 암담해도 주님은 우리의 빛과 길이심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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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4)

 

어느 날의 기도

 

당신의 말씀은 맹렬히 타는 불,
그런데도 여전히 멀쩡한 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말씀은 바위를 부수는 망치,
그런데도 여전히 태연한 나는 누구입니까?


말씀 앞에서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
대체 나는 누구란 말입니까?


-예레미야 23:29을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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