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핀 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78)

 

 소나무에 핀 꽃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 책상에 앉아 다음날 새벽예배 설교를 준비하다 잠시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녁 무렵 예배당 초입에 선 소나무를 손질하는 권사님께 시원한 물을 전해드리고 왔는데, 권사님의 작업은 그 때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권사님은 아예 나무 위로 올라가서 전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따로 돕는 이가 없어 혼자서 작업을 하는데도 나무 위로 올라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중심을 잡는 것인지 소나무의 정중앙 꼭대기 부근에 자리를 잡고 가지를 치고 있었다.
 
올해 권사님의 나이 일흔셋, 그런데도 소나무 꼭대기에 올라 앉아 가지를 치고 있는 권사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치 소나무가 꽃을 피운 것처럼 보였다. 소나무 꼭대기에 자리 잡은 권사님의 모습이 소나무의 꽃처럼 보였다. 어쩌면 권사님이 한평생 품었던 믿음이 그렇게 꽃으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도 큰 사람  (0) 2019.06.30
만년필을 고치며  (0) 2019.06.30
소나무에 핀 꽃  (0) 2019.06.29
미더운 이발사  (0) 2019.06.28
마리산 기도원  (0) 2019.06.28
나도 모르는  (0) 2019.06.27
posted by

젖뗀 아이처럼

김기석의 새로봄(117)

 

젖뗀 아이처럼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131:1-3)

 

나는 시름없고나 이제부터 시름없다/님이 나를 차지하사 나를 맞으셨네/님이 나를 가지셨네 몸도 낯도 다 버리네/내거라곤 다 버렸네 어음”.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이다. 언제 불러도 참 좋다진실한 믿음은 우리를 안식의 세계로 이끈다. 진실한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차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내 거라고 생각하던 것을 버리는 것이다

 

 히브리의 한 시인은 하나님께로 돌아간 영혼의 평안함을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2절)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젖을 먹는 아기를 생각해 보라. 아기의 눈은 엄마의 눈을 응시한다. 엄마도 호수같이 맑은 아기의 눈을 사랑스레 바라본다. 아기와 엄마 사이에 무언의 교감이 일어난다. 아기는 한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어느 결에 살포시 잠에 빠진다. 염려도 근심도 시름도 없다. 참 맛있는 잠이다

 

 

 

시인 김기택은 그런 아기의 잠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잔다. 부드럽고 기름진 잠을 한순간도 흘리지 않는다. 젖처럼 깊이 빨아들인다." 시인의 감탄은 계속된다. "남김없이 잠을 비운 아기가 아침 햇빛을 받아 환하게 깨어난다. 밤사이 훌쩍 자란 풀잎같이 이불을 차고 일어난다. 밤새도록 잠에 씻기어 맑은 얼굴, 웃음말고는 다 잊어버린 얼굴이 한들거린다." 푹 자고 일어난 아기의 청신(淸新)한 얼굴은 생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시편의 시인은 아기들의 그 거룩한 평안함을 자기가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 어머니의 품안에서 말이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첫 번째 비결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오만한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안팎에 많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교만과 오만이다. 교만은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을 뜻하고, 오만은 "젠 체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음"을 뜻한다. 이것보다 더 큰 영혼의 질병이 없다. 그것을 버릴 때 우리 영혼에 자유가 유입된다

 

두 번째 비결은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지 않는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소극적인 삶처럼 보인다. 우리는 큰 소리에 익숙하다. 세상은 우리에게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지레 자기에 대해서 절망하고 풀이 죽은 채 지내지는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 큰 꿈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남보다 앞서고,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에 남보다 먼저 오르기 위해 자기 발 밑에 누가 밟히고 있는지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전락이 아닌가. 그런 이들은 승자처럼 보여도 실은 패자이다. 인간됨이라는 소명을 저버렸으니 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무지의 어둠을 물리쳐주십시오.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두렵게 느껴집니다. 어둠이 짙게 밴 우리 마음은 심연을 향해 추락을 거듭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 마음은 시커멓게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때로는 교만함으로 때로는 비굴함으로 상처를 숨기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빛 가운데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작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크심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늘 빛 고요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은 계속된다  (0) 2019.07.03
나의 뜻은 사라지고  (0) 2019.06.30
젖뗀 아이처럼  (0) 2019.06.29
성스러운 단순성  (0) 2019.06.29
생명 살림의 정치  (0) 2019.06.29
아름다운 순간  (0) 2019.06.28
posted by

성스러운 단순성

김기석의 새로봄(116)

 

성스러운 단순성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디모데전서 6:6-9)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남이 누릴 몫까지 누리며 사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만족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저질 코미디이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이 이 말을 하면 그것은 소중한 충고가 된다. 바울은 가난했다. 굶주린 때도 많았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 생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절대적 결핍 속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유혹은 자족할 줄 모르는 마음에 깃드는 바이러스와 같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디모데전서 6:8). 평준화된 욕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누리라고 권하기도 한다. 짧은 인생을 너무 우울하게 살 것 없다고 말한다. 이 유혹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거미줄에 포획된 곤충 신세가 된다.

 

 

 

 

욕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낫다. 그럴 때 생은 선물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정확하게 필요한 때에 우리를 찾아온다. 물론 필요 이상의 것은 주시지 않지만 꼭 필요한 것은 결코 빠뜨리지 않으신다.” 교황 요한 23세가 한 말이다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기에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 그 때와 방법은 물론 그분께 속해 있다. 요한 23세는 풍요를 누리는 이들의 불행을 이렇게 요약한다

 

모자라는 것이 없이 풍요롭게 지내게 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은 열병에 걸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계획들을 세우게 되고, 그때부터 가난하지만 만족스럽게 살던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릴 때 삶은 복잡해지고 그 아름답고 찬란하던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한다. 바울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디모데전서 6:9)라고 말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지만, 돈의 영향을 줄이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는 사람이 많다. 노자는 "족함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이 있다”(도덕경 제33)고 말했다. 생명도, 건강도, 생의 기회도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이미 부자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가끔 가난했던 시절을 낭만적으로 회상합니다. 궁핍했던 그 시대가 아름답게 회상되는 것은 현실의 비애로부터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은 것을 누리고 살지만 삶의 만족감은 한결 줄어들었습니다. 성스러운 단순성을 잃어버린 채 욕망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 눈을 열어 하나님의 광휘가 깃든 장엄한 세상을 보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뜻은 사라지고  (0) 2019.06.30
젖뗀 아이처럼  (0) 2019.06.29
성스러운 단순성  (0) 2019.06.29
생명 살림의 정치  (0) 2019.06.29
아름다운 순간  (0) 2019.06.28
꽃 피우는 사람  (0) 2019.06.27
posted by

생명 살림의 정치

김기석의 새로봄(115)

 

생명 살림의 정치

 

왕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두 여자가 서로, 살아 있는 아이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고, 죽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왕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 오게 하였다. 신하들이 칼을 왕 앞으로 가져 오니,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러자 살아 있는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 대한 모정이 불타 올라, 왕에게 애원하였다. ”제발, 임금님, 살아 있는 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어도 좋으니,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하고 말하였다. 그 때에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렸다. "살아 있는 아이를 죽이지 말고, 아이를 양보한 저 여자에게 주어라. 저 여자가 그 아이의 어머니이다."(열왕기상 3:23-27)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창녀들이다. 그 여인들은 사흘 간격을 두고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그만 자다가 한 여인이 자기 아기를 깔아 죽였다.  그 부주의한 어미는 이런 궁리 저런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기를 바꾸자.' 그 여인은 다른 여인이 곤히 잠들어있는 틈을 타서 아기를 바꿔치기 했다. 잠에서 깨어난 진짜 엄마는 곧 사태를 파악했고 그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둘은 솔로몬에게 가서 시비를 가려 달라면서 살아 있는 아이가 자기의 아들이고, 죽은 아이는 다른 여자의 아들이라고 우겼다”. 누가 보아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들은 솔로몬은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살아 있는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서  반쪽은 이 여자에게 주고, 나머지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열왕기상 3:25)

 

왕의 냉정한 선언을 듣고 두 여인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인다. 진짜 엄마는 아기에 대한 모정이 불타올라서 스스로 아기를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설사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해도 아기의 목숨을 끊는 일이 차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던 것이다. 반면 가짜 엄마는 어차피, 내 아이도 안 될 테고, 네 아이도 안 될 테니, 차라리 나누어 가지자고 말한다. 생명이 우선인가? 산술적 공정이 우선인가

 

 

 

 

 

솔로몬의 지혜로움의 예증으로 선택된 이 이야기가 기록된 곳은 바벨론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결국은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는 망하고, 국민들은 바벨론에 잡혀간 희망 없는 처지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했다. 그것만이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 속에는 이스라엘이 겪어온 참담한 기억과 아울러 미래를 어떻게 기획할 지에 대한 암시가 녹아들어 있다

 

창녀인 두 어머니는 신랑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제멋대로 타락과 죄악의 길을 걷다가 망해버린 이스라엘과 유다의 운명을 상징한다. 이야기꾼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남과 북으로 갈라져 소모적인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이 최우선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를 두고 벌이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 이득이라도 챙겨보려고 나라를 나누고 가르는 것은 결국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꾼은 전하고 있다. “아이를 죽이지는 말아 주십시오.” 솔로몬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권리를 포기하려는 이가 진짜 엄마라고 선언했다. 오늘의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절실한 것은 당리당략이 아니라 생명 중심적 사고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어리석음을 꾸짖어 주십시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는 반갑게 손을 잡고 따뜻한 웃음을 나누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면 가까웠던 이들에게도 싸늘하게 등을 돌리곤 하는 게 인간의 세태입니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는 동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 이익이 아니라 신의를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생명을 훼손하면서까지 제 욕망을 채우려 드는 사악한 마음을 우리 속에서 도려내 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젖뗀 아이처럼  (0) 2019.06.29
성스러운 단순성  (0) 2019.06.29
생명 살림의 정치  (0) 2019.06.29
아름다운 순간  (0) 2019.06.28
꽃 피우는 사람  (0) 2019.06.27
두려움을 넘어  (0) 2019.06.26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