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못 볼지도 몰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1)

 

 더는 못 볼지도 몰라

 

심방을 하며 교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찌 삶이 평온하기만 할까, 고되고 험한 삶도 적지가 않다.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달동네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사전에서는 달동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허가 주택과 노후 불량 주택이 밀집된 도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을 말하며, 산동네라고도 한다. 6 · 25 전쟁에 따른 이재민들에게 무허가 건축 지대의 지정을 시작으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이농으로 생긴 도시 저소득층을 도시 외곽의 구릉 지대에 집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위 긴 골목 끝에 있는 권사님 집도 그랬다. 세상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작은 방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연로하신 권사님은 눈과 귀가 어두운데, 그나마 한쪽 눈에 안대를 댔다.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하늘의 위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은 간절해진다.

예배 후 권사님이 준비한 음료를 마시는데, 바라보니 벽에 웬 글씨가 붙어 있다. 읽어보니 찬송가 가사였다. 달력 뒷장에 권사님이 써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찬송가를 적으셨네요?”


권사님께 여쭸을 때 권사님이 대답했다.


“눈이 점점 나빠져서 더는 못 보겠다 싶기에 그래도 눈이 보일 때 적었어요.”  

 

눈이 흐려져 더는 못 볼지도 모르는 시간을 앞두고 적은 찬송가 가사는 “험한 산길 헤맷때 주의 손 굿끼잡고 찬송하며 가리”였다. 주님은 바로 읽으시리라, 바로 들으시리라, 그리고 권사님 손 굳게 잡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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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레가토

김기석의 새로봄(99)

 

사랑의 레가토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레가토(legato)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음악용어이다. 끊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음표 위나 밑에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서로 이어주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표가 레가토이다이 기호를 슬러slur라고도 부르는데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기호이다. 인간은 어쩌면 레가토로 창조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본질은 연결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는 살아갈 수 없다. '탯줄'을 가리켜 생명의 레가토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머니와 아이가 한 생명에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러한 육체적 탯줄을 있게 한 정신이나 사랑 역시 레가토이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둘 사이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그리움과 기다림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정작 아름다운 것은 까막까치가 놓아주는 오작교(烏鵲橋)가 아닌가 싶다. 둘의 공간적 격절을 이어주는 사랑의 다리, 바로 이것이 만남에 대한 갈구가 낳은 하늘의 레가토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이음줄이다. 죄로 말미암아 나뉘었던 하늘과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이어주셨으니 말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만남의 현장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 죄인도 원수도 하나가 되었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삶을 경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일한 부류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인 시몬과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가 함께 있다.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품은 용광로와 같다. 그 품 안에서 '작은 차이'(小異)는 녹아내리고 '큰 같음'(大同)으로 거듭났다. 바울은 교회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연결'(fitted)'결합'(joined together)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개별적 존재로 살던 이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까막까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깊이 공감했기에 다리가 되어 주었다. 지금 세상은 '까막까치'가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삶의 높낮이가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미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드는 사랑의 일꾼들이야말로 까막까치가 아니겠는가.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는 사랑의 화살을 쏘아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몸이 된다.

 

*기도*

 

하나님, 혐오와 선동의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조차 그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불화와 오해와 멸시의 담을 허무셨지만,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런 담을 쌓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결속 감정을 보란 듯이 비웃고, 외줄처럼 위태롭게 이어진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이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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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소로 보일 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0)

 

 사람이 소로 보일 때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옛적 사람이 이따금씩 소로 보일 때가 있었다. 분명 소로 알고 때려 잡아먹고 보면 제 아비일 때도 있고 어미일 때도 있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 번은 한 사람이 밭을 갈다가 비가 쏟아져 처마 밑으로 들어가 잠시 비를 피하는데, 웬 송아지가 따라 들어오더란다. 돌로 때려 잡아먹고 보니까 웬걸, 자기 아우였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엉엉 울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괴로운 마음에 보따리를 싸들고 길을 떠났다. 사람이 소로 보이지 않고 사람으로만 보이는 곳을 찾아 길을 나선 것이다. 넓은 세상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느라 강물에 떠내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고, 깊은 산속에서 길을 잃어 호랑이의 밥이 될 뻔도 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어느 날 파란 바람이 부는 한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보아 잡아먹는 일 없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바로 마을을 만난 것이었다.


 

 

나그네는 마을 어귀에서 만난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없으니 희한하군요.” 그러자 그 노인은 껄껄 웃으며 “웬걸요. 우리도 옛날에는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는 일이 이따금 있었는데, 사람들이 파를 먹으면서 눈이 맑아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소가 소로 보여서 그런 일이 없어졌답니다.” 하는 게 아닌가. 나그네는 파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노인은 그를 데리고 파밭으로 가서 파를 보여주었는데, 파 씨를 얻은 나그네는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자기 집 텃밭에 파 씨를 심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를 만나려고 이웃의 친구들이 찾아오자 반가운 마음에 “어서들 오시게. 내가 보고 온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지.” 일어서서 맞이하려는데 친구들 눈에는 그가 소로 보였다. “웬 소가 이상한 소리를 내는군!” 하면서 도끼를 번쩍 드니 “아니야, 나는 소가 아니라 자네들의 친구일세.” 소리를 쳤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친구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얼마 후 텃밭에서는 파란 싹이 돋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향기에 이끌려 파를 뜯어먹었다. 그런데 파를 먹은 사람들은 눈이 맑아져서 더 이상 사람을 소로 보는 일이 없어졌고, 그 후로는 아무도 사람을 소로 알고 잡아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는 힘이 어찌 채소 파에 있을까, 필시 파를 먹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소로 보고 서로를 잡아먹는 끔찍한 시간을 끝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서로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잃어버린 눈물을 되찾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사람으로 존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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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무늬로 바꾸라

김기석의 새로봄(98)

 

상처를 무늬로 바꾸라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3-30)

 

예기치 않은 풍랑이 우리 인생의 항해를 힘들게 만들곤 한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 우리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비통한 울음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악다구니일 수도 있고,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압도적 시련을 겪는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시편 107:25-27)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상황,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모두 쓸모없게 되는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어떤 이는 생을 저주하고, 어떤 이는 파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 곤경의 순간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질병, 고통, 유한함의 자각, 죽음’ 등의 한계상황은 우리 실존의 비약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비본래적인 것에 팔렸던 마음을 되찾고, 본래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고통은 ‘복된 고통’이 된다. 

 

 

 

 

감나무 가지는 유난히 잘 부러진다. 감을 딸 때 가지를 꺾게 되는 데, 가지마다 입은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가면 검게 뭉쳐진 듯한 무늬가 만들어진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의 무늬이다. 사람들은 그걸 귀하게 여겨 목공예 재료로 쓰기도 하고 고급 가구를 만들기도 한다.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겠다고 여겨요."

 

삶은 본래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삶이 힘겹다 하여 주저앉아 버리면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힘을 불어 넣어 상처를 무늬로 만들 수 있게 하신다. 흙을 빚어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고통과 슬픔의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인격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8-30)

 

*기도*

 

하나님,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참 작구나’ 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도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던 것들이 다 지푸라기 인형처럼 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듭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때, 우리 마음은 잔잔해집니다. 풍랑이 지나갔다 하여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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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자유

김기석의 새로봄(97)

 

사랑할 자유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3-15)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혹은 "남으로부터 규정·구속·강제·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 바울은 자신의 삶이 율법의 강제와 지배 속에서 살아온 삶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율법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이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시자 그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무엇을 해도 늘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늘 율법의 감시 아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가 이제는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 배려 혹은 돌봄이야말로 그리스도인됨의 핵심이다. 그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유를 기꺼이 유보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의 빛깔로 채색되게 마련이다. 힘이 없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굴욕감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노릇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쁨이다. 칭얼대는 손자를 업어주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할머니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服從>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노래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실체이다. 바울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14)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문으로 분류한다. 그 중에서 “∼ 하라”의 형태로 된 계명이 248개이고, “∼ 하지 말라”"의 형태로 된 것이 365개이다. 248이라는 수는 사람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의 합이고, 365는 일년을 뜻한다. 그러니까 613개의 율법 조문은 하루하루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요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샘물이 말라 버린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음성가의 노랫말처럼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저절로 되는 사랑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 노력한다 하여 싫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은 의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험한 길을 달린 수레보다 세워둔 수레가 더 빨리 망가진다 한다. 사랑도 훈련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의 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하늘 샘이 아니던가.

 

*기도*

 

하나님,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공포를 주입하기에 우리는 주저주저하며 옛 생활에 묶인 채 살아갑니다. 이제는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명랑하고 천진하게 생을 대하고, 맑고 깊은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사랑의 샘물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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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만남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9)

 

 

잊을 수 없는 만남  
 

그날 밤 그 만남은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아 있다. 먼 곳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차에서 급한 전화를 받았다. 권사님의 아들이 다쳐 수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대신 병원으로 달려갔다. 권사님을 만난 것은 수술실 앞이었다. 순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들이 기계를 청소하던 중에 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간 것이었다. 기계를 멈췄을 때는 이미 손이 많이 으스러진 상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듣는 내가 그러니 어머니 마음은 어떠실까, 수술실 앞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 무겁게 흘러갔다. 어느 순간 중 권사님이 당신 살아오신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 했다. 참으로 신산(辛酸)했던 삶, 권사님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당신이 살아오신 지난 시간을 모두 이야기했다. 얼굴이 고우셔서 누가 보아도 이 분께 무슨 근심걱정이 있을까 싶은데, 권사님의 인생은 굽이굽이 눈물어린 가시밭길이자 험곡(險谷)이었다. 권사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눈물에 젖은 내용들이었다.

 

 

 

 

아들이 수술을 받는 동안 수술실 앞에서 담임 목사에게 털어놓는 지난날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나는 권사님께 진심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다.


“부족한 사람을 믿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 마음에만 담아 둘게요. 그리고 권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늘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권사님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권사님은 제게 여전히 소중한 분입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진 이야기,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는 화인처럼 남아 있다. 권사님도 그러시지 않으실까 싶다. 이야기 속에는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법,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이 부디 상처와 아픔과 회한을 덮는 따뜻한 위로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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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소명이다

김기석의 새로봄(96)

 

생명은 소명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요한복음 12:44-50)

 

마틴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존재 망각'이라 한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살기에,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 또한 없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두할 따름이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召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다. '할 일'이 뭔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면 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워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 말이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엄마가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드레싱을 끝낸 간호사 선생이 병실을 나서면서 내일 아침에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까 수유실로 내려오세요하고 말했다. 그 엄마는 다소 당황스러운 어조로 내려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기가 막힌 말 아닌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셈이다. 우리는 삶의 입구와 출구를 잘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들이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의 존재의 중핵이다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영원의 등불을 밝히셨다. 세상 길에서 방황하다가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며 그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그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 수 없다.

 

*기도*

 

하나님,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성 어거스틴이 바쳤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분주한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니 우리는 존재-망각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넘치지만 정작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죽비처럼 우리 마음을 뒤흔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삶으로 빛을 밝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등불이나마 밝혀드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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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8)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Equal-Time Point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서진교 장로님을 통해서였다. 창천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숙소에서 교회까지, 교회에서 숙소까지 나를 태워다 주신 분이 서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은 새벽에도 정한 시간에 맞춰 숙소로 찾아와 교회로 가는 수고를 해주셨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장로님과 차를 타고 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장로님은 비행기를 모는 항공기 조종사 출신이었다.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른 분들을 만나면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다. 장로님이 들려주는 비행기 혹은 비행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불환귀점’이었다. 언젠가 읽은 글에 불환귀점이라는 말이 있었다. 청년부 수련회에서는 그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런 말이 맞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글에서는 ‘불환귀점’을 비행기가 일정한 지역을 지나가면 남아 있는 연료의 양 때문에 출발지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목적지로만 날아갈 수밖에 없는 한 지점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었다. 신앙적으로도 의미 있다 여겨져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EPT였다.

장로님 대답에 의하면 ‘불환귀점’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가 있었는데, 바로 EPT였다. Equal-Time Point의 약자였는데, 이 말을 직역하여 ‘등시점’이라 옮긴 곳도 있었다. EPT는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과 출발지로 회항하는 시간이 같은 지점’을 의미하는 말로, 유사시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운항을 결정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된다. ETP를 확인하여 출발지로 돌아갈 것인지, 목적지 또는 대체 비행장에 착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어디로 정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거리가 아니라 시간인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 연료의 소모량은 거리를 기준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신앙이란 Equal-Time Point를 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전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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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의 영혼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카잔차키스의 영혼

 


 

어떤 현실에도 굴하지 않는 원시적 힘을 가진 사나이 <그리스인 조르바>와 인간적 유혹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지켜낸 예수를 그린 <최후의 유혹>은 서로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하나로 묶인다. 그건, 무수한 고난과 좌절 그리고 절망 앞에서 결국 무너지지 않은 인간에 대한 갈망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그리스 출신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세상에 충격을 준 글이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는, 터키에 지배받아왔던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가계의 자손이었다. 그는 강인해야 했고,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내야 했다. 두려움을 정복하고, 희망의 봉우리에 올라서야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년에 집필한  <영혼의 자서전>에서 카잔차키스가 어떻게 자신을 뜨겁게 일구어냈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서전이 얼마나 문학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는가도 함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폭우로 온 마을의 포도밭이 다 떠내려가면서 모두가 비통해하고 있었을 때, 입을 꽉 다물고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는 남아 있잖니”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카잔차키스는 이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평생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생명의 철학자 베르그송과, 인간의 초월적 책임을 일깨우면서 인간 내면에 있는 위대한 힘을 이끌어 낸 니체의 제자인 그는 인간의 영혼이 가진 용맹함에 대해 깊은 신뢰를 부여했다.


 



 

카잔차키스는 젊은 시절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목표를 향해 나가라. 멈추거나 소리를 지르지 마라. 너에게는 한계점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 한계점이 무엇이든 간에 너는 앞을 향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그는 고독과 우울함과 좌절에 맞서 격투를 벌어나갔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언제나 싸워야하는 쟁투의 기운만 가득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운명하는 자리에서 남긴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와 양, 당나귀들을 잘 돌보아라. 짐승들도 인간이다. 우리처럼 영혼을 가졌지만 가죽을 쓰고 말을 못할 뿐이다. 옛날에는 다 인간이었다.(...)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잘 돌봐라. 열매를 얻고 싶으면 거름과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한다. 나무들도 옛날에는 인간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냐?“ 인간이란 삼엄하거나 가파른 산을 끝까지 올라야 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격전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영혼이 거칠어지거나 무자비해지지 않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나비가 되려는 유충을 억지로 나비가 되게 하려다가 실패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카잔차키스는 생명의 법칙을 넘어서 서두르지 않는 지혜를 일깨운다. 결국, 모든 것은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수한 싸움을 치러 오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때로 우린, 격투에 몰두하며 사랑을 잃었고, 다급한 마음에 순서를 지키지 않고 억지를 부렸던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당장의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강인하면서 너그럽고, 멀리 내다보면서 깊이 있게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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