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0)

 

거룩한 삶을 향한 열망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1-2)

 

성경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삶의 목표를 거룩함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거룩함이란 속된 것과 구별되는 종교적 신비 혹은 덕목이 아니라 믿는 이들의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한마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가 거룩한 사람이다.  

 

성결법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준다. 우선 중요한 것은 부모 공경, 우상 숭배 멀리하기, 정성스런 제물 봉헌이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다. 추수를 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도적질·속임수·거짓말을 멀리하는 것, 힘있다고 해서 이웃을 해치거나 이웃의 몫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먹은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 앞 못보는 이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않는 것, 다른 이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지 않는 것, 힘없는 이웃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것,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애정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 등이다. 

 

 

 

간디의 제자 가운데 비노바 바베는 인도에서 간디 이상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분이다. 그의 정신 세계의 바탕을 만들어준 이는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거지가 문간에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거지 한 사람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평소대로 그에게 적선을 베풀었다. 비노바는 못마땅하여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저 사람은 아주 건강해 보여요. 그런 사람에게 적선을 하는 건 게으름만 키워주는 것이라구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은 거예요. [기타]에도 나오잖아요. 순수한 선물은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구요.”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아주 차분하게 대답하셨다. 

 

“바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나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칼린디, 『비노바 바베』, 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 p.65)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웃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쾌락의 도구로 삼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하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타자를 물화시키는 것이 능력처럼 여겨지는 시대이기에, 거룩한 삶을 향한 투신이 더욱 절실한 오늘이다. 

 

*기도*

 

하나님,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묵정밭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삶의 열망은 간데 없고, 온갖 부정적 삶의 습성만이 우리를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우거진 우리 영혼의 뜨락이 스산하기만 합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통해 거룩한 삶의 열망이 우리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완벽한 사랑과 지혜 안에서 우리 삶을 재정비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귀한 손님으로 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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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2)

 

답장 
 
"한 목사님
갑자기 그리움 탑니다.
바람이 살랑거리는데
해가 막 넘어갑니다.
홍순관님의 노래 한 곡 들으며 해를 보냅니다."

 

 

 

멀리 부산에서 보내온 문자, 기쁨지기였다. 또 다시 여름이 다가오고 있고, 여름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모임이 있다. 올해로 스물두 번째를 맞는 독서캠프다. 올해는 이야기 손님으로 김기석 형과 함민복 시인을 모시기로 했단다. 독서캠프는 유난을 떨지 않아 늘 소박하지만 소중한 밥상이다.

 

분주하게 하루를 보낸 뒤 아침에 답장을 보낸다.

 

"길을 쓸고 마루를 닦는 이의 마음에 어찌 그리움이 없겠습니까?
먼 산 볼 때 누군가 빙긋 웃는,
그 선한 웃음 마음에 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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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1)

 

 하나님의 천칭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던 시간, 하나님의 천칭 이야기를 했다. ‘천칭’(天秤)은 ‘천평칭’(天平秤)의 약자로, 가운데의 줏대에 걸친 가로장 양쪽 끝에 저울판을 달고, 한쪽에 달 물건을 놓고 다른 쪽에 추를 놓아 평평하게 하여 물건의 질량을 다는 저울의 일종이다. 


 


 

 

하나님의 천칭은 세상의 천칭과는 다를 것이다. 세상의 저울은 양쪽의 무게가 다를 경우 금방 저울이 반응한다. 저울의 한쪽은 솟고 한쪽은 가라앉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천칭은 다르다. 천칭 한쪽 저울판에 단 한 사람이 서고 반대편 저울판에 백 사람이 선다고 해도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수평을 유지할 것이다. 

설마 하늘의 저울이 고장이 났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내 짧은 지식과 생각으로는 무한대는 무한대다. 무한대에 무한대를 더한다고, 무한대에 무한대를 곱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한 사람의 소중함을 그렇게 새길 수 있었으면,
하나님의 천칭을 신뢰할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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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89)

 

길을 찾는 사람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4)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립보서 3:7-11)

 

바울은 길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 영적 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느라 늘 노심초사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조건들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자부심이 큰 사람이었다.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기 때문에 이전에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는 오물로 여긴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이전에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은 한결같이 그의 자아를 강화해주는 것들이었다. 가문, 학식, 신분, 종교적 열심. 이런 것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소중한 것들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때가 많다. 신앙이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과정이다. 자랑스러운 게 많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모실 공간이 부족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 바울의 내면에 비쳐드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게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늘 막힌 듯 답답하던 정신의 지평이 툭 트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어떤 고난, 시련도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벗어던지려고 했던 약함과 고통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겼다. 자신의 약할 때가 곧 주님의 은혜가 유입되는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이 이렇게 자리를 바꿨다.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하지만,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한다.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에서 사람들은 바알과 맘몬을 숭배하고 있다. 한완상 박사는 한국의 교회에는 예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교회의 위기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이렇게 분석한다

 

교세의 양적 팽창과 대외적 선교열을 그토록 자랑하는 한국 교회와 교인의 삶 속에서 나사렛 예수, 갈릴리의 예수를 만날 수가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위기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체취, 그분의 숨결, 그분의 꿈, 그분의 정열, 그분의 의분, 그분의 다정한 모습을 교회 안에서 찾기 힘듭니다. 그러기에 밑바닥 인생의 그 억울한 고통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사랑과 공의의 새 질서를 몸소 보여주셨던 갈릴리 예수가 더욱 그리워집니다.”(<예수 없는 예수 교회>, 7)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 거룩한 지향을 다시 회복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생명의 춤을 추며, 살아 있음을 경축하며 살고 싶습니다. 기쁘게 일하고, 신나게 놀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잿빛 우울에 감싸여 있습니다. 세상의 인력이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곤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후 진정한 자유인이 된 바울 사도가 부럽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을 열고 기다리오니, 성령이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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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88)

 

욥의 세 친구를 위한 변명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욥기 2:11-13)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들은 욥과의 논쟁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욥이 큰 시련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주저 없이 달려왔다. 욥을 외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쁘다거나, 거리가 멀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욥인 줄 알아보지도 못했다.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 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마치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친구의 불행을 아파한 것이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지냈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한 것이다. 단 하루도 고통 속에 있는 친구 곁에 머물기 어려워하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끊긴 자리에서 그저 친구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가슴 찡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뜨거운 우정의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교육학자인 파커 파머는 한 때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른 이들과의 만남을 꺼리면서 단절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친구 빌은 매일 그의 집을 찾아와서 30분 동안 발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때의 경험을 파머는 이렇게 전한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파커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116-7) 욥의 세 친구는 바로 그런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그들 속에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하나였다. 하지만 종교와 신념과 사상이 끼어들자 그들의 관계는 파괴되었다. 벗이 겪는 고통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있어줄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 그들은 판관이 되었다. 판관이 있는 곳에서 우정은 망가지게 마련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한 말씀을 들려준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린도전서 8:1c) 

 

그들은 인습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을 죄와 벌 혹은 원인과 결과의 도식으로 바라보았다. 욥의 세 친구는 악인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무지했을 뿐이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종교와 신념과 사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과의 깊은 연대감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예기치 않은 시련에 직면한 이들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이 어떤 때는 부질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의 만남을 꺼립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욥의 친구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불원천리하고 고통을 겪는 친구를 찾아왔고, 그의 곁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해석하려는 욕망이 끼어들 때 그들의 우정은 흔들렸습니다. 주님, 우리의 굳은 신념이나 믿음이 사람들 사이의 우정어린 결속을 깨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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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0)

 

하마터면  
 

오늘 아침에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한 뻔했다. 새벽기도를 마친 후 목양실 책상에 앉아 있다가 창문을 통해 할머니 두 분이 예배당 마당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한 할머니의 손에 검정색 비닐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대하기 얼마 전, 할머니 두 분이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예배당 앞 화단 쪽으로 갔다. 할머니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본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배당 화단에 심어 놓은 꽃을 누군가가 캐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귀한 꽃을 골라 캐간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었고,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검은 비닐봉투를 들고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이가 있으니 어찌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유심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데, 파고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들은 이야기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할머니들의 나중 모습만 보았다면,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돌아서는 한 할머니의 손에 검정 비닐봉투가 들려 있는 모습만 보았다면,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을 것이다.

 

달려 나가 할머니를 만나 봉투 속에 꽃이 담겨 있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하며 비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여쭸을 것이었다. 아무리 점잖게 이야기를 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렇게 생각하고 묻는다는 것은 할머니들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일, 온 동네에 소문이 날 일, 치명적인 실수를 할 뻔 한 것이었다.

 

‘도둑을 맞으면 어미 품도 들춰 본다’는 속담이 있다. 도둑을 맞은 사람 눈에는 모든 이들이 다 도둑처럼 보인다. 모두가 수상쩍기 마련이다. 세상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이어서 선한 마음으로 보면 믿지 못할 사람이 없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보면 믿을 사람이 없는 법이다.

 

오늘 아침, 하마터면 나는 어미 품을 들춰볼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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