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19)

 

삶은 계속된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들은 '이 곳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고 말하지만,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 감사하여라! 진실로 주님은 선하시며, 진실로 그의 인자하심 영원히 변함이 없다.'내가 이 땅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여 다시 옛날과 같이 회복시켜 놓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지금은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까지 없는 이 곳과 이 땅의 모든 성읍에, 다시 양 떼를 뉘어 쉬게 할 목자들의 초장이 생겨날 것이다. 산간지역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쪽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의 사방과, 유다의 성읍들에서, 목자들이 그들이 치는 양을 셀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33:10-13)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가까운 이들이 죽는 비극을 경험했고, 사랑하는 이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인 채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마땅찮았고, 찬 이슬과 비바람을 피할 집도 파괴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는 만세반석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넋이 나간 듯이 하늘을 보며 믿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눈물을 닦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에 있다. 생각을 나타내는 '생각 사'자는 '''마음 '이 결합된 단어이다. 생각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이 자라나는 밭이다. 생각하고 반성하지 않는 정신은 클 수 없다. 생각을 거듭하던 그들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왔다. “주님, 우리는 길들지 않은 짐승 같았습니다”(예레미야 31:18).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 제멋대로 욕망에 따라 춤을 춘 결과가 오늘의 삶이라는 자각이 비로소 생긴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고난이 없으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5:8)라고 말했겠는가? 고난은 우리 영혼을 벼리는 숫돌이다. 사람은 넘어지기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후의 일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가 삶을 깊이 돌아보고, 자기 자리를 찾을 때면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마련해주신다

 

산그늘이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참깨를 털고 있다.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신다.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손자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손자는 한번을 내리쳐도 솨아솨아 쏟아지는 참깨를 보며 신이 난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가볍게 나무란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김준태 시인의 시 참깨를 털면서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마음으로 백성들을 대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고난의 짐에 짓눌려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보실 수 없기에 새로운 삶의 길을 예비하신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회개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는 것이다.  황폐하던 그 땅에 목자들의 초장이 생길 것이고, 그곳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양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 불모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이 희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 슬픔과 분노로 인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불의한 이들이 의로운 이들을 억압하고, 사악한 이들이 정직한 사람들을 조롱하는 세상으로 인해 낙담할 때  우리는 깊은 침묵 속에 계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평안도 위안도 없는 삶이 우리 마음을 조각조각 찢을 때면 절망의 어둠이 확고히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는 일은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 우리 속에 하늘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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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1)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길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다가 문득 떠오른 지난 시간이 있었다. 어디서 출발을 했던 것일까, 늦은 시간 밤길을 달려 단강 인우재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익숙한 출발지가 아니어서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목적지를 단강초등학교로 입력했다. 단강 근처만 가면 인우재야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단강에 도착을 했고, 나는 단강 초입에서 좌회전을 하여 작실마을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비게이션이 뜻밖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이 길로 계속해서 진행하시면 먼 길을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아는 길이기에 멘트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작실로 올랐는데, 마치 안타깝다는 듯이 같은 내용을 몇 번 더 반복을 했다. 그런 멘트를 처음 듣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웃음이 났는데, 몇 가지 생각이 웃음 중에 지나갔다.
 

 


 

 

내비게이션이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기가 말하는 것이 맞았다. 작실은 뒤가 병풍 같은 산으로 막힌 끄트머리 마을, 마을을 지나 더 갈 데가 없다. 단강초등학교가 목적지인데 작실마을로 들어가면 먼 길을 다시 돌아 나와야 한다. 


찔리듯 찾아든 생각도 있었다. 방금 들은 그 말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었다. ‘너 지금 이 길로 가면 먼 길을 돌아와야 해, 지금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렴’, 얼마든지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다. 때로 우리는 비뚤어진 동기나 잘못된 열심으로 믿음의 길을 갈 때가 있다. 그 때가 위험한 때인데, 자신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주님에게서 멀어질 뿐이다. 

우리에게는 가면 갈수록 멀어지는 길이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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