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20)

 

우짜노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베드로전서 1:13-16)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베드로전서 1:4)을 물려받은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신신당부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베드로전서 1:13)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할 때의 그 ‘마음’(dianoia)은 우리 자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해력이나 감정, 의지를 두루 뜻하는 말이다. ‘먹다’라는 말은 ‘어떤 뜻을 품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온 힘을 다해 붙들라는 말이다. 적당히 살다가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다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또 있다.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는 인내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조급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뭐든 쉽게 결론을 내고 싶어 한다. 오늘 기도한 것이 내일 응답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신앙은 장거리 경주이다. 진정한 재능이란 어쩌면 ‘지속의 열정’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분명한 목표가 세워지면 주변에서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그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나가는 사람이 어떤 일이든 성취해낸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이 위임해주신 일들을 천천히 하다 보면 어느 결에 주님 품에 안겨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산 소망을 품은 이들이 지향해야 할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은 전에 모르고 좇았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불러주신 그 거룩하신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베드로전서 1:14-15) 그리스도와 만나기 이전의 삶을 베드로는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욕망이란 매우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욕망은 늘 어떤 대상을 향하지만, 그 대상을 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모를 때의 삶이다. 믿는 이들은 욕망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뜻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껏 향유하고, 이웃이 겪는 고통 앞에 멈춰 서는 동시에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해 마음 쓸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한 삶의 입구에 서 있다 할 것이다.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는 ‘어, 비 오네’로 시작하여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하는 탄식으로 이어진다. 남들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틈에서 듣는 ‘우짜노’라는 탄식이 참 신선하다.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헛것이 된다.

 

*기도*

 

하나님, 사람답게 산다는 게 뭔지 잘 알면서도 우리는 그것과 거리가 먼 행동을 합니다. 게으름과 냉담 속에서 우리에게 위임된 일들을 소홀히 합니다. 세상에 정신이 팔린 채 지향해야 할 목표를 잊고 삽니다. 욕망의 벌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그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슬퍼하고, 아름다움 앞에 멈춰서고, 누군가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낮추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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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2)

 

천천히 켜기 천천히 끄기

 

정릉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는 곳은 ‘중예배실’이다. 정릉교회에서 가장 큰, 그래서 주일낮예배를 드리는 곳은 ‘대예배실’이다. ‘중예배실’과 ‘대예배실’이라는 말은 상상력의 부족으로 다가온다. 적절한 이름을 생각 중이다.

 

새벽예배를 드리기 전, 일찍부터 기도하러 온 교우들을 위하여 제단의 불만 밝히고 회중석의 불은 밝히지 않는다.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예배를 시작하는 일은 불을 밝히는 일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불을 켜는 모습을 보면 대개가 와락 켠다. 스위치는 모두 6개, 그런데 조작에 익숙한 듯이 한꺼번에 불을 켜곤 한다. 그렇게 한꺼번에 켜면 기도를 하느라 눈을 감고 있다가도 눈이 부시고, 그 짧은 순간 눈을 찡그리게 된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한꺼번에 불을 켰고, 짧은 순간 눈이 부셨고, 눈을 찡그리는 일로 예배는 시작이 되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한꺼번에 켜지는 불과 스위치를 한 번에 켜는 소리 속엔 조심스러움이 없다.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마땅히 필요한 조심스러운 마음이 느껴지질 않는다. 뚝딱 해치우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등 스위치에 번호를 붙인다. 그리고는 켤 때의 순서와 끌 때의 순서를 정해 스위치 옆에 붙인다. 누가 전등을 켜고 끄든 적힌 번호를 따라 켜고 끄도록 한다. 켤 때는 제단 쪽에서 뒤쪽으로, 끌 때는 뒤쪽부터 제단 쪽으로 끈다.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점등이든 소등이든 하나의 전등에서 다음 전등 사이에는 침묵과 같은 3초 내지 5초간의 시차를 둔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목양실로 올라와 메모를 한다. 아침 교직원 예배에 알릴 내용이다. 내일부턴 그렇게 등을 켜고 끄기로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배의 일부 아닐까? 아니, 그런 것이 예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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