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21)

 

놀라운 신비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창세기 1:11-13)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생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전해준 분이다. 그분의 수필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이 무의미하고 권태롭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바라보는 것들이 다 지루하고, 시시해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을 때 말이다. “누구든 젊었을 때 며칠간만이라도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헬렌의 글은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이야기를 전개한다. 어느 날 헬렌 켈러는 방금 숲 속에서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뭐 특별한 건 없었어.” 헬렌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며시 나뭇가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아주 재수가 좋으면 한껏 노래하는 새의 행복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헬렌은 손으로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촉감으로도 그렇게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친구들의 얼굴, 찬란한 노을,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도 지켜보고 싶었다. 우리는 주변 세계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아무런 놀람도 없이 살아간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 신비도 감탄도 없이 우리는 서로를 울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의미와 예배의 중요함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억압하는 분명한 방법이 있으니, 사물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 있음의 놀라운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다.”(아브라함 헤셸, <사람을 찾는 하느님>,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46쪽) 

 

무엇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감사도 감격도 없다. 누가 나를 위해 밥을 짓고 빨래를 해주어도, 출근 시간/등교 시간에 늦지 않게 깨워주고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돌봐주어도 고마운 줄을 모른다. 이게 우리들의 질병이다. 살아 있음의 신비에 무관심한 것이 죄의 뿌리이다. 놀람과 감사가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 우리는 음식을 앞에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것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기억하는 행위이다. 누가 믿음의 사람인가? 음식을 먹고, 꽃의 향기를 맡고, 구름과 노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미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사람이다. 창조된 세상을 보고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때이다.

 

*기도*

 

하나님,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의 백태가 벗겨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구상)라고 고백한 시인의 마음이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늘 결핍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감사를 잊고 삽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보면서도 무덤덤하게 지냅니다. 그로 인해 영혼은 궁핍해졌습니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주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차리며 살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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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3)

 

안락과 안락사

 

창문 저 밖
남의 가정은 다 안락해 보이고
창문 저 안
나의 가정은 다 안락사로 보이듯

 

공 서너 개가 두 손 사이에서 춤을 추는 서커스 단원처럼,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솜씨가 빼어나다. ‘창문 저 밖’과 ‘창문 저 안’이 ‘안락’과 ‘안락사’로 어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말장난이다 싶으면서도 마냥 가볍지만 않은 것은 그 속에 우리의 삶과 심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들 잘 사는데 나만, 우리만 왜 이 모양일까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다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기막힌 순간 말이다.

 

 

 

 

‘창문 저 밖’과 ‘창문 저 안’은 다르다. ‘안락’과 ‘안락사’처럼 다르다. 그 괴리감은 우리의 마음을 창처럼 깊이 찌른다. 더는 창문 저 밖을 내다보지 않으려 검은 커튼을 치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어두워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순간을 만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말이 있다. 내게는 노래 제목보다는 루터가 성경을 번역한 바르트부르크 성 아래 바흐의 생가를 찾을 때마다 마주했던 찻집 이름으로 남아 있는 ‘C'est la vie’(세라비)가 그것이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 말을 창문 저 밖을 향해서도, 창문 저 안을 향해서도 할 수 있을 때, 안락과 안락사의 경계는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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