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은 돌을 쓰지 말라

김기석의 새로봄(122)

 

 

다듬은 돌을 쓰지 말라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는 다 보았다. 너희는, 나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은이나 금으로 신들의 상을 만들지 못한다. 나에게 제물을 바치려거든, 너희는 흙으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다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너희의 양과 소를 바쳐라. 너희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내가 정하여 준 곳이면 어디든지, 내가 가서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가 나에게 제물 바칠 제단을 돌로 쌓고자 할 때에는 다듬은 돌을 써서는 안 된다. 너희가 돌에 정을 대면, 그 돌이 부정을 타게 된다. 너희는 제단에 층계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을 밟고 올라설 때에, 너희의 알몸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0:22-26)

 

율법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단을 세울 때 가급적이면 흙으로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돌로 쌓아도 무방하지만 다듬은 돌로 쌓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굳이 이런 지시를 내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은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피하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국가 사업에 동원되었던 하비루들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전을 건립하고 피라미드를 만들고 국고성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다. 정교하게 돌을 다듬고 그것을 쌓아올리는 일을 하면서 그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또 다시 백성들의 땀과 눈물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말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준다. 가난한 이들은 멋지고 큰 교회에 들어가기를 주저한다. 크고 화려한 시설은 그들의 초라함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는 고-교회(high-church)라고 불리었던 성공회를 박차고 나왔다. 고-교회에는 거칠고 투박한 사람들이 숨 쉴 만한 여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교한 체계 밖에서 살 수 밖에 없는 땅의 사람들을 도외시하는 유대교의 세계를 박차고 나왔다. 그들을 품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교회를 짓는 것도 아니고, 정교한 교리의 체계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예수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옛 사람은 말했다. “모름지기 속해야 할 곳이 있으니, 본래의 깨끗함을 드러내고, 타고난 본바탕을 지키고, 자기를 작게 하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노자, 『도덕경』 19장).  

 

여기서 타고난 본성을 지키라는 말은 ‘포박(抱樸)’을 번역한 것이다. ‘안을 포’에 ‘통나무 박’자이다. 사람들은 통나무를 다듬어서 그릇도 만들고 가구도 만든다. 하지만 그릇이나 가구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통나무 그 자체이다. 거기에서 다른 것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그릇도 가구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그 근본 마음, 즉 예수 정신을 온 몸으로 안아야 비로소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예수 정신은 투박하고 거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화려한 교회와 세련된 교회 생활이 투박한 예수 정신을 대치하고 있다. 다듬은 돌로 제단을 쌓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공교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의 삶 속에 화육해 들어가 어김없이 그들에게 살맛을 되돌려주신 예수 정신이다. 

 

*기도*

 

하나님, 아름답고 웅장한 고대의 유물을 볼 때마다 그 장엄함에 놀라곤 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건축물을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까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흙으로 제단을 쌓으라 명하신 그 마음, 굳이 돌을 쓰려거든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라 하신 주님의 섬세한 배려가 그저 놀랍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살던 이들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며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교회가 서야 할 자리가 바로 그런 아픔의 자리임을 우리는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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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퍼먹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4)

 

술만 퍼먹은 

 

부산을 다녀왔다. 먼 길이지만, 다녀올 길이었다. 한 지인이 전시회를 열었다. 지인이 전시회를 연다고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갈 입장은 아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녀온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종이로 작품을 만드는 종이공예는 한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 손이 가야 하지만 별로 티가 안 난다. 하지만 작가의 눈에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칼질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 길을 달려간 것은 작가의 그런 수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고의 고통 없이 작품을 내어놓는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고단하면서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길, 그런데 딸이 아버지의 길을 이어 걷기로 했다. 아버지가 하는 작업을 눈여겨보고 그 길을 함께 걷기로 하고, 아버지의 작품과 딸의 작품을 함께 내거는 전시회였다. 누구보다 딸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겨울, 그는 귀농 후 땀으로 지은 집을 한 순간에 잃었다. 집에 불이 난 것이었고,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삶의 근거를 졸지에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엄동설한 한 복판에 집을 잃었으니, 그 뒤에 이어진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는 100일 만에 집을 다시 지었다. 모든 것이 넉넉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 딱 한 계단씩을 열어주시는 은총을 힘입어 집을 지었다. 그는 기적이라 말했고, 그의 아내는 은혜라 말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몸을 연장이자 도구로 삼아야 했고, 매 시간 이를 악다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잿더미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연둣빛 싹처럼 여겨졌다.

 

 

 

 

전시회가 열리는 곳을 찾아 작품을 보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만큼 먼 길 달려온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밀양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는 일정, 그가 다시 세운 집으로 향했다.


같은 자리에 비슷한 집이 서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면 예전에 들렀던 집과 다르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야외에 만든 화덕 위에 큰 솥을 걸고 닭을 삶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다시 집을 짓느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 인기척이 나더란다. 바라보니 동네 할매, 할머니 한 분이 멍하니 서서 그냥 울고 계시더란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그의 아내는 말했단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자고.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병원으로 출근을 했고, 친한 환자들에게도 티를 내지 않고 평상시처럼 일을 해 환자들이 뉴스를 보고 불난 소식을 먼저 알게 됐단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집 바로 옆이 산이어서 큰 불이 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그 불을 막아준 것은 집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태우며 그 자리를 지켜 불길을 막았단다. 시커멓게 변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성스러웠다. 한 이웃이 농막을 빌려주어 석 달간을 지냈는데, 농막 안에 방한 텐트를 치고 다 큰 딸과 아들과 함께 온 식구가 잠을 자서 그 때처럼 가족들이 가까이 지낸 시간이 드물었다며 웃는 웃음이 해맑다. 토종닭이 푹 삶아질 때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길고도 눈물겨웠고 고마웠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마음이 뭉클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네에 있는 식당에 갔더니 주인인 욕쟁이 할머니가 그를 보곤 대뜸 한마디를 하더란다.


“니 땜에 저 산에 사는 스님이 사흘간 술만 퍼 먹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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