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

 

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 신앙양심을 내세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처신 -

 

연예인들의 병역문제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이 된다. 인기와 병역은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에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게 되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뇌리에서 자신이 잊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연예인의 병역문제는 병역이 젊은이들에게 가하는 현실적 압박과 제약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들이 병역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상당히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다. 다 같은 젊은 놈들이 누군들 시간이 아깝지 않고, 누군들 자신의 꿈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그 만큼의 시간을 희생한다, 이것이 병역의무를 감당하는 논리가 된다. 그러기에 이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어렵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이 이토록 신랄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도 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자신의 인기를 철저하게 사적 영역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적 의무를 저버렸고 더욱이 병역의무 준수에 대한 공적 발언을 결국 스스로 깬 셈이 되어서 그 비난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방송 매체와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그는 “당당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출발”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왔기에 그에 대한 실망은 크나큰 실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한편, 차인표의 경우, 국제적인 스타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관점에서 007 시리즈 물에 출연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기문제를 사적인 차원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소화해낸 모범을 보였다. 사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메가톤 급 인기의 기회를 민족적 양심을 기준으로 결정한 그의 모습은 돈과 인기를 연계하여 살아가는 연예가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조적 처신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병역 의무를 당연히 감당하겠다고 강조했던 사람이 막상 그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말을 바꾸고 자신의 사적 이해를 쫓아간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사례였다. 신앙과 신조가 어긋나고 만 것이었다. 반면에, 국제적 수준의 스타급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평소 신앙과 신조에 충실하게 행동한 차인표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한 현실에서 매우 귀중한 본이 되었다.

 

 

 

 

병역문제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의 논란으로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냉전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승준의 경우 그가 이러한 논리를 세워 병역의무를 거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권 신청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병역의무 대신 다른 방식의 의무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체 의무도 없는 유승준의 경우는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병역문제는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오늘날 보다 심층적이고도 반성적인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는 병역 의무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하려는 장은 아니다.

 

유승준의 경우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는 병역의무가 날이 갈수록 비특권 계층의 의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아들이 병역문제로 이후 정치, 사회적 홍역을 치른 것도 다 특권층의 병역 의무 기피에 의한 문제제기였다.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국가적 과제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지만 실상은 너나 할 것 없이 특권적 지위가 없으면 할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권층들의 병역 기피는 한국사회의 권력질서가 가지고 있는 부당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군대는 이른바 빽 없는 놈들만 가는 곳이 된다면 그런 군대의 심리적 지위는 날이 갈수록 열등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역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권력질서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권력 질서의 불평등은 반드시 병역비리를 낳게 된다는 것과 통한다. 유승준의 경우, 시민권자의 병역의무 면제는 당연한 법적 현실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이를 사회적 특권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은 실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는 다른 무수한 시민권 취득자들에게 엉뚱한 비난이 돌아가게 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함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본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자기만 빠져나가서 특권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신앙양심을 내세울 수 없는 경우가 된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유승준이 잠시의 특혜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인의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것은 그래서 안타깝다.

 

차인표의 경우, 그가 톱스타이면서도 평소 겸손하고 또 이번에는 냉전체제 해체를 추구하는 민족의식까지 분명하게 나타내어 그를 기르고 있는 신앙적 토양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적 지위에 오르면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매우 가볍게 버리고 현실적 이익을 추종하는 것과 그는 대조적인 선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승준과 차인표,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렇듯 대조되는 신앙의 결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유승준이 차라리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면, 그래서 평소 자신의 병역의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설파했다면 이번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보통 때에는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다가, 하루아침에 병역 의무 거부의 논리를 세운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유승준이 군대를 다녀오겠다고 한 것도 인기논리요,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도 인기논리라는 점에서 그 인기논리의 막강한 힘을 거부한 차인표는 그의 정신적 내면이 얼마나 강고한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병역 의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논의가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유승준에 대한 돌팔매를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날 재능 있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병영의 소품으로 몰아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승준은 물론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한 선택이긴 했으나,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차원도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한 고뇌의 일단을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선 이후에, 우리는 병역의무의 특권적 기피와 냉전체제의 현실을 하나로 엮어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유승준이나 차인표 모두, 이 냉전체제의 군사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대중들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보다 심화시켜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이번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131)

 

주님은 나의 희망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예레미야 애가 3:19-24)

 

조국의 패망을 목도한 애가의 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았으며, 빛도 없이 캄캄한 곳에서 헤맸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가난과 고생으로 그를 에우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까지 채우셨을 뿐 아니라, 소리 높여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마치 엎드려서 사람을 노리는 곰이나 사자와 같다고 했겠는가.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을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시는 것 같고, 마치 돌로 이를 바수고, 그의 얼굴을 땅에 비비시는 것 같다고 말한다. 쓴 쑥과 쓸개즙이 입 안에 가득한 듯한 형국이다.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입술을 비어져 나오는 것은 탄식뿐이다. 그의 삶에서 빛은 사라졌다. 고난의 현실을 잠시도 잊을 수 없기에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울적하다는 뜻의 ‘멜랑콜리’(melancholy)는 그리스어로 ‘쓸개즙’(담즙)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중세에는 멜랑콜리를 종교적인 신념을 좀먹는 병적인 현상으로 여겨 죄악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멜랑콜리는 자기 성찰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 질병과 실패, 공허감이나 권태, 무력감이 찾아올 때 그것을 성찰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삶의 부정적 계기들은 우리 삶에 덧붙여진 군더더기를 걷어내라는 하늘의 신호인지도 모르겠다. 애가의 저자는 울적함 속에서 곰곰이 자기를 돌아본다. 그러다가 자기 속에 있는 희망의 뿌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예레미야 애가 3:21-22)

 

너무나 갑작스런 분위기의 반전이다. 마치 단조(minor key)로 이어지던 노래가 갑자기 장조(major key)로 바뀐 것 같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기억의 회복’이다. 기억은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에 매몰되어 있던 우리의 생각을 더 큰 세상과 접속시켜준다. 삶은 언제나 힘겹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난관을 헤치며 여기에 이르렀다. 고독한 순간은 있었지만 홀로 버려진 적은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린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처할 때도 있었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도 하나님이 곁에 계셨다. 행복의 날도 지나가지만 고통의 날도 지나간다. 하지만 지나가는 날들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다. 그 사랑을 기억해내는 순간, 고통은 나 홀로 견디어야 하는 아픔이 아님을 알게 된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의 나의 희망!”(예레미야 애가 3:23-24) 이 말 한 마디를 가슴에 새긴 사람은 절망의 어둠 속에 유폐되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은총의 날개 아래 우리를 품어 주십시오. 삶의 곤경에 직면해서야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강함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휘저어놓곤 하는 일들이 매일 매일 벌어집니다. 지금 눈물의 골짜기를 거닐고 있는 이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차마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너진 이들 속에 하늘의 빛을 비춰주십시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속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요로움이라는 시험  (1) 2019.07.17
영적인 듯 보이나 육적인 사람들  (0) 2019.07.17
주님은 나의 희망  (0) 2019.07.16
길을 찾는 사람  (0) 2019.07.11
홀로 그리고 함께  (0) 2019.07.11
아나니아  (0) 2019.07.11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1)

 

 

시(詩)와 밥 

 

원고를 쓰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일이 있다. 이태 전쯤이었나, 독서캠프에 참석을 했을 때의 일이다. 장로님 한 분이 운전을 하며 동행을 해주셨다. 길은 멀어도 함께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임 장소에 도착을 했을 때는 막 점심식사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누가 독서캠프 아니랄까 그런지 시 하나를 외워야만 밥을 준다는 것이었다. 수련회에 가서 성경구절을 외우지 못하면 밥을 안 주는 모습을 본 적은 있지만, 시를 외워야 밥을 먹는 모임은 처음이었다.

 

 

 


 

엄격함과는 거리가 먼 기쁨지기가 검사를 하는 것이어서 크게 부담이 될 것은 없었는데, 그래도 맘에 걸렸던 것이 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이 외우는 시가 따로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기쁨지기 앞에 가서 물었다. 둘이서 하나의 시를 나눠 외워도 되겠느냐고. 얼마든지 된다고 했다. 장로님 귀에 대고 짧게 귀띔을 했고, 우린 보란 듯이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날 장로님과 함께 외운 시는 문삼석의 ‘그냥’이었다.

 

엄만 왜
내가 좋아?
- 그냥
 
넌 왜
엄마가 좋아?
- 그냥

 

시를 어떻게 나눠 외웠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하나는, 기쁨지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는 때때로 밥이 된다는 것이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적(朝鮮籍)  (0) 2019.07.17
대척점  (0) 2019.07.17
시(詩)와 밥  (0) 2019.07.16
버릴 수 없는 기억  (0) 2019.07.11
귀한 방석  (0) 2019.07.11
눈여겨보면  (0) 2019.07.11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