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는 자와 가르치는 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5)

 

행하는 자와 가르치는 자

 

 

 

 

“할 수 있는 자는 행한다. 할 수 없는 자는 가르친다.”
(He who can, does. He who cannot, teaches.)

 

명쾌하게 다가오는 이 말은 역설의 대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한 말이다. 정곡을 찔린 듯 아프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로 대신하고 있는 게 아닐까 했던, 오래된 의구심을 제대로 찌르는!

 

 

posted by

통념을 깬 여인들

김기석의 새로봄(175)

 

통념을 깬 여인들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누가복음 8:1-3)

 

누가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마치 그녀의 택호처럼 사용되는 ‘막달라’는 갈릴리 호수의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주로 직물업과 염색업에 종사했고, 갈릴리에서 잡은 물고기를 염장 처리하는 공장도 그곳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 마을은 비극의 땅이기도 했다. 로마군대의 주둔지였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은 종종 정복당한 민족들에게 치욕감을 안겨주었고, 그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항거하면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잔인하게 진압하곤 했다. 갈릴리 여러 마을이 로마에 의해 참혹하게 유린당하곤 했는데, 막달라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였다.

 

 

 

 

 

마리아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어쩌면 가까운 일가붙이들이 로마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하는 광경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백소영 교수는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가 경험했을 지도 모를 현실을 상상 속에서 그려 보여준다.

 

“소식을 듣고 가게로 뛰어왔을 때는 이미 제가 어쩔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기억하기도, 다시 말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에요. 하지만 눈을 감으면, 아니 눈을 뜨고 있어도 가게에 갇혀 로마 군인들이 지른 불에 스러져가던 일곱 사람, 제 가장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이고, 그들의 비명이 귓가에서 날카롭게 울렸습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겠어요? 미처 날뛰는 저를 보며 사람들은 죽은 일곱 원혼이 들어가 저를 괴롭히는 것이라 했죠. 하지만 틀렸어요. 제 가족이, 친구들이 저를 괴롭힐 리 있나요? 그게 귀신이었는지, 제 안의 분노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그들의 영혼은 아니었어요. 다만 전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미친 여자처럼 거리를 헤매었죠. 제 눈에는 세상이 온통 불에 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다 그때 그 자리에서 히죽거리던 로마 군인들 같이 보였고요.”(백소영, 『인터뷰 on 예수』, 174쪽)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런 일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백소영 교수는 막달라 마리아를 괴롭혔던 ‘일곱 귀신’을 마음속에 일고 있던 분노와 두려움으로 해석한다. 그 내면의 상처와 고통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치유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부둥켜안는 예수,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기듯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땅 바닥을 기어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도록 해주는 예수, 그분과의 만남이 막달라 마리아의 삶을 뒤바꾸어 놓았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몸부림치는 마리아를 보고 사람들은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제 예수와 더불어 ‘일어선 사람’, 즉 부활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다른 여성 제자들과 함께 예수운동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전초가 되었던 여인들의 이름이 참 귀하다.

 

*기도

 

하나님, 통념을 깬다는 일은 늘 위험을 동반합니다. 사람들은 경계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불온시 되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경계선을 넘을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세상은 정말 답답하고 편협한 곳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유대교가 만든 금제의 선을 넘어 예수의 마음에 합류했던 여인들이 있었기에 예수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경계선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부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으로 뵙는 주님  (1) 2019.09.04
책망의 유익  (1) 2019.09.03
통념을 깬 여인들  (1) 2019.09.01
단순한 삶의 연습  (1) 2019.09.01
뿌리를 박다  (1) 2019.08.31
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1) 2019.08.30
posted by

단순한 삶의 연습

  • 감사합니다. 자족하는 사람이 되야 하는데, 그렇치 못함은 제대로 된 인식이 없어서 그렇겠지요.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새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저도 기도해야 겠습니다.

    이진구 2019.09.01 11:41

김기석의 새로봄(174)

 

단순한 삶의 연습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디모데전서 6:6-10)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이다.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 데도 당당한 사람을 보면 화를 내기도 한다. 그들을 게으르다고, 무능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한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부끄러움조차 없이 발화되는 순간부터 세상은 시장으로 변했다. 교회조차 인간의 욕망 충족을 부추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립니다.”(디모데전서 6:9)

 

이건 일종의 경고의 나팔소리이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야말로 사탄이 틈타기 좋은 마음이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간결하게 요약한다. 바울은 돈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더러’를 ‘많이’로 바꾸어야 할 형편이다.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삶의 훈련이 필요하다. ‘더’의 삶에서 ‘덜’의 삶으로 개종해야 한다. 덜 먹고, 덜 쓰고, 덜 누리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분은 ‘더럽다’는 말을 ‘덜 없다’로 풀어 설명했다. 비우지 못하는 것이 곧 더러움이라는 말이다. 누가 비우며 살 수 있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믿는 이들은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본다. 자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이들은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다.

 

둘째,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inter-connectedness)을 믿는 것이다.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그 고통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생명은 상호 책임지는(inter-responsible) 존재이다. 바울 서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서로’ 혹은 ‘서로 함께’(kai allelon)이다. 누군가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창조주에 대한 이런 신실한 믿음 가운데 머무는 사람이라야 자본주의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덧없는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돈을 가리켜 ‘주조된 자유’라 했지만, 때로 돈은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기도 한다.

 

*기도

 

하나님, 욕망의 벌판에서 사람들은 눈이 벌개진 채 돈을 쫓아다니느라 분주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돈이 주는 자유와 행복을 노래합니다. 마치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뱃사람들처럼 사람들은 그 노래에 이끌려 나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만족을 모릅니다. 주님, 멈춰설 줄 아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그저 주어진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이 만드신 세상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며 생명의 노래를 부르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망의 유익  (1) 2019.09.03
통념을 깬 여인들  (1) 2019.09.01
단순한 삶의 연습  (1) 2019.09.01
뿌리를 박다  (1) 2019.08.31
모욕조차 품어 안는 사랑  (1) 2019.08.30
토기장이 집에서  (1) 2019.08.29
posted by

개미 한 마리의 사랑스러움

  •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01 12:09
  • 따뜻한 메아리,
    반갑고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09.02 07:0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4)

 

개미 한 마리의 사랑스러움

 

탁월한 이야기꾼인 앤소니 드 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개미 이야기가 있다. 한 죄수가 독방에 갇혀 여러 해를 살고 있었다. 그는 아무도 못 보았고 말도 못해 보았으며, 식사는 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개미 한 마리가 그의 감방에 들어왔다. 그는 그 개미가 방을 기어 돌아다니는 것을 황홀해서 바라보며 묵상했다. 그는 그 개미를 좀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 손바닥에 놓고, 밥알을 한두 알 주고, 밤이면 자기 깡통 컵 아래 넣어 두었다.

 

 

 


어느 날 문득 그는, 자기가 개미 한 마리의 사랑스러움에 눈을 뜨기 위해 그 기나긴 세월을 독방에 갇혀서 보내야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그는 다행이다. 비록 독방에 갇혀 긴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개미 한 마리의 사랑스러움에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으니 말이다. 한 평생의 삶이 다하도록 개미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눈부시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전혀 눈을 뜨지 못한 채 눈을 감는 이들도 아주 없지는 않으니 말이다.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