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와 전쟁

  •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03 08:58
  • 귀한 걸음,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09.04 07:07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6)

 

전투와 전쟁

 

오래 전에 읽은 책 가운데 <행복을 꿈꾸는 수도원>이란 책이 있다. 종종 생각나는 대목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전투와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수도자 두 명이 그들의 사부와 함께 앉아 수도원 생활에 대해 의논한 적이 있었다. 화려한 경력을 가진 한 수도자는 늘 장황하게 지껄이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기를 좋아했다. 그에 비해 또 다른 수도자는 그저 더없이 어질기만 한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 날도 공부를 많이 한 수도자는 특유의 논리와 논법을 기술적으로 사용하여, 형제를 꼼짝달싹 못하게 옭아 묶으며 공박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은 토론에서 이겨 만족해하는 것을 결코 승리라고 보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수재라고 보지도 않는다.


토론이 계속되는 동안 침묵을 지키며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사부가 마침내 토론에서 이겨 의기양양해하는 그 승리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여, 그대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졌네. 토론에서 이기려고 좋은 말을 많이 늘어놓았지만, 그대의 독선 때문에 형제를 잃지 않도록 기도하시게.”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전쟁에서 지는 줄도 모르고 전투에서 이기려고 기를 쓰는 일이 얼마나 흔한가. 형제를 잃는 줄도 모르고 이기는 데만 정신이 팔릴 때가 얼마나 빈번한가. 우리가 눈을 크게 그리고 밝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은 작은 전투가 아니라 큰 전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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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의 유익

김기석의 새로봄(176)

 

책망의 유익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나머지 유대 사람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하였고, 마침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2:11-16)

 

바울이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 베드로가 그곳을 방문했다. 안디옥 공동체는 이미 든든히 서 있었고,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 아주 활발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아마도 그런 현장을 살펴보고 또 격려도 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기애애한 애찬이 벌어졌다. 베드로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흉허물 없이 어울렸다. 이미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르던 담장을 마음속에서 철거했기 때문이다. 이방인 형제자매들도 기뻤을 것이다. 위대한 사도가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찬의 흥겨운 분위기는 예루살렘교회가 파견한 일단의 사람들이 도착하면서 깨졌다. 그들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맞이하는 이도, 영접 받는 이도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친교의 식탁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난감했던 것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는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베드로가 자리를 뜨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떴고,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자리를 떴다. 이방 출신의 교인들은 괜히 죄인이 된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을 것이다. 불같은 성격의 바울은 그런 태도와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위선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 위선을 덮어두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 모든 사람들이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조금 당황스럽다.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때 성립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안다. 사사건건 대립하고, 들춰내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이들로 인해 공동체는 붕괴된다. 옳음 때문에 사랑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쉽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거나 훼손될 우려가 있을 때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드러내야 한다. 환부를 감추어야 할 때도 있지만 도려내야 할 때도 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주저함이 없었다. 바울은 가장 큰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베드로를 꾸짖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갈라디아서 2:14b)

 

바울의 이런 책망을 베드로가 고깝게 여겼다면, 그래서 베드로가 바울에게 맞섰다면, 앙심을 품었더라면, 베드로는 반석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매를 맞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울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 꾸지람을 받아들임으로 그는 율법의 껍질로부터 벗어나와 은혜의 세계로 확고히 걸어 들어갔다. 은혜는 이렇게 나타나기도 한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를 책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해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내게 꾸짖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마음 또한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짓과 위선을 적당히 덮어주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알을 깨는 고통이 필요하듯, 참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픔을 각오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미움과 경멸이 아닌 존중과 사랑에 바탕을 둔 꾸짖음이 참을 낳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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