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속을 걷고 싶은

  • 감사합니다. 태풍의 피해는 없으신가요?

    이진구 2019.09.09 03:54
  • 덕분에 큰 피해없이 지나갔습니다.
    어려운 일 당하신 건 아니시죠?

    한희철 2019.09.09 09:06
  • 저는 피해는 없는데요.. 저는 아침마다 매일 동네산을 달리는 40대 후반 청년입니다. 산에 나무들이 뽑혀 쓰러져 있는 것을 보니, 꼭 저를 보는 듯 하고, 목사님 글 보고 여쭈었습니다.

    이진구 2019.09.09 16:1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2)

 

폭우 속을 걷고 싶은

 

태풍 링링의 위력이 대단하다. 귀엽다 싶은 이름을 두고 어찌 저리도 당차고 거친 모습을  보여주는지. 하긴, 세상에는 이름과 실제가 다른 것들이 많은 법이니까.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이 땅 이 계절, 너무 심하게 할퀴지는 말라고 당부를 하고 싶다. 보통 바람이 아닐 것이라 하여 예배당 입구의 화분도 바람을 덜 타는 곳으로 미리 옮겨두었는데, 때가 되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람이 상륙작전을 하는 것 같다. 비의 양은 적지만 불어대는 바람은 실로 대단하여 이런 날카롭고도 묵중한 바람의 소리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듣지 싶다. 동화 ‘소리새’를 쓰며 썼던, 잘 되지 않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낸다.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이태 전 DMZ를 걷던 시간이다. 열하루 동안 홀로 걸어간 길, 문득 그 시간이 아뜩하게 여겨진다. 이틀째 되던 날, 진부령을 오를 때였다. 소똥령마을에서 어렵게 점심을 얻어먹고 진부령을 오르는 길, 갑자기 날씨가 변하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장한 폭우였다.


폭우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바로 머리 위에서 천둥이 울렸고 번개가 갈라졌다. 어느 순간 폭우는 우박으로 바뀌기도 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갈라질 때마다 비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앞 어딘가에서 큰 바윗덩어리가 지축을 울리며 달려올 것만 같았고, 바로 머리 위에서 하늘이 찢어지듯 갈라지는 번개가 끝까지 나를 피할지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자동차들마저도 비상등을 켜고 내달리는 그 길을 걸어 오른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태한지를 알면서도 그냥 걸었던 데에는 그런 시간이 다시는 내게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만난 적 없는 최악의 악천후, 굳이 피하지 않고 그냥 걷고 싶었던 것이었다.

 

문득 그 시간을 떠올리며 빙긋 웃는다. 그 때를 떠올리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라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거친 길을 걸은 자에게는 어떤 길도 순한 길이 된다.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자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최악이 없다. 거친 바람 소리를 들으며 폭우 속을 걷고 싶은 마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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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의 비극

김기석의 새로봄(183)

 

아마샤의 비극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말하였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 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아모스 7:12-13)

 

베델의 제사장인 아마샤에게 하나님의 모진 심판을 예고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은 불편함 그 자체였다. 귀족들과 부유한 이들의 호의에 기대어 사는 동안 특권에 익숙해진 사람이었으니 아모스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아팠을 것이다. 그는 아모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왕의 손을 빌리려 한다. 그는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백성들에게 반란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하는 말을 이 나라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모스가 왕은 칼에 찔려 죽고 백성들은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면서 민심을 뒤흔들고 있으니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마샤가 아무런 근거 없이 아모스를 모함한 것은 아니다. 아모스는 분명히 그런 메시지를 선포했다. 하지만 아마샤는 맥락을 제거한 채 아모스의 말을 제멋대로 발췌하여 보고했다. 그는 아모스가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왕으로 하여금 부정의의 현실과 대면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의 관심일 뿐이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도 권고를 가장한 위협을 가한다. 남왕국 출신인 그가 왜 뜬금없이 베델까지 와서 평지풍파를 일으키냐며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선견자는 여기를 떠나시오! 유다 땅으로 피해서,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를 하시오.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마시오.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오."

 

이 구절은 애국을 가장하고 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를 제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밥벌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밥벌이’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것처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먹고 사는 문제를 마치 사소한 문제인 듯 말하는 사람은 신뢰하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삶을 바친 사람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처럼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종교행위가 밥벌이의 수단이 되는 순간, 그는 자기에게 밥을 주는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하게 된다. 아마샤는 그런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이다. 그는 스스로 그런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아모스가 못내 불편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둔감함이다. 저어주지 않으면 금방 더께가 생기는 팥죽처럼, 매 순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지 않으면 우리는 부푼 욕망에 덧없이 끌려가게 마련이다. 아모스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와 같은 사람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입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자기 삶을 통해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첫 마음을 잃지 않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뜻을 품고 살던 이들도 안락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슬그머니 숭고한 뜻을 내려놓고 이익을 취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아마샤는 그래서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욕망과 이익에 취해 진리를 등지지 않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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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이라는 병

김기석의 새로봄(182)

 

교만이라는 병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야고보서 4:6-7)

 

신앙생활은 ‘탈향脫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탈’은 옛 삶으로부터의 벗어남이고 ‘향'은 새로운 삶을 향한 견고한 지향이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고, 제국의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소명 앞에 서 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단해져야 한다. 버릴 것을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을 든든히 붙잡아야 한다.

 

야고보는 이것을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라”는 말로 요약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악마를 물리치는 것은 사실 하나의 과정이다. 악마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도록/못하도록 만드는 존재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교만이다. 교만의 사전적 정의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이지만 교만의 뿌리는 훨씬 깊다. 7세기 시나이의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악마의 발명품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이다. 그것은 비난의 어머니이고 칭찬의 자식이고 불모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광기의 선구자이며 몰락의 창조자이다. 마귀에 들리는 원인이고 분노의 원천이며 위선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악마의 요새, 죄의 후견인, 냉혹함의 근원이다. 연민의 부정이요, 지독한 위선자요, 무자비한 심판관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신성을 모독하는 뿌리이다.”(캐틀린 노리스, <수도원산책>, 129-130쪽에서 재인용)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교만은 ‘비난의 어머니’, ‘칭찬의 자식’, ‘불모의 상징’,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의 달아남’, ‘분노의 원천’, ‘위선으로 가는 통로’, ‘연민의 부정’이다. 우리 생을 무겁게 만드는 많은 것이 여기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이다. 교만한 영혼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힌다.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교만의 병에 걸린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기의 옳음을 확신하기에 다른 이들에 대해 늘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하지만 진짜 신앙에 깊이 들어간 이들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억압적이지 않다. 그들은 판단과 정죄의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행동도 자연스럽다. 교만의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이 교만이라는 병에 걸려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기가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를 받을 수도 없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들여 자기 자신을 자꾸 성찰해야 한다. 그때 하늘로부터 은총의 빛이 비쳐든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된다.

 

*기도

 

하나님, 날마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만 우리 삶은 여전히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합니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는 안일함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오히려 다른 이들의 허물을 찾아 지적하려 합니다. 겸손을 가장하지만 은근히 남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헛된 자만심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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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를 통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3)

 

당구를 통해

 

여러 종목의 스포츠를 좋아하고 몇 몇 종목들은 즐기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젬병인 종목이 있다. 당구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 당구는 젊은이들의 해방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당구를 피했다. 몇 몇 친구들과 우리라도 그러지 말자고 하며 피했던 것 중의 하나가 당구장 출입이었다. 그런 뒤로도 당구를 접할 일이 없어 당구의 룰도 잘 모르고, 큐대를 어찌 잡는지도 잘 모른다.

한국의 당구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전국에 있는 당구장 수가 2만 2630개(2017년 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많고, 하루 이용자만 160만 명으로 추산이 된단다. 요즘은 당구를 TV로 중계하는 일도 많아져 큰 관심이 없으면서도 지켜볼 때가 있는데, 경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당구 종목 중의 하나인 스리쿠션은 큐로 수구(手球)를 쳐서 제1 적구(的球)와 제2 적구를 맞히는 동안 당구대 모서리인 쿠션에 세 번 이상 닿아야 하는 게임(자료를 보니!), 게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한 것은 어떻게 공이 갈 길을 알고 저렇게 칠까 싶기 때문이다. 당구대 위에 공이 지나갈 수 있는 선은 수없이 많을 터, 그런데 선수들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선을 대번 찾아내어 공을 그리로 보내는데, 그것도 힘을 조정하여 보내고 있으니, 당구를 모르는 내가 보기에는 묘기도 그런 묘기가 없는 것이다.

 

며칠 전 당구 중계를 보다가 우연히 인상적인 장면을 보았다. 선수가 친 공이 서로 부딪쳐서(그걸 키스가 났다고 하는 모양이다)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반대인 경우도 있었다. 공이 서로 부딪쳐서 실패라고 여겨졌던 상황이 반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 마디로 운이 좋아 성공하는 경우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되자 공을 친 선수가 상대 선수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짐작하기로는 그것이 당구의 에티켓이 아닌가 싶은데, 내게는 신선하게 보였다. 경기를 하다가 요행히 내가 원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좋아라 티를 내는 것은 예의일 수 없다. 속으로는 좋지만 좋은 티를 내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다. 그런데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니, 그것이야 말로 참된 예의다 싶다.

 

살아가다가 생각하지 못한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무조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주변을 살필 일이지 싶다. 혹 그런 내 모습으로 인해 속상해 할 누군가가 있다면 가만 머리 숙여 마음을 표하는 것이 도리다 싶다. 하지도 못하는 당구를 통해 인생의 한 자세를 배우니,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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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0)

 

 일등능제천년암(一燈能除千年暗)

 

우연한 곳에서 만난 짧은 글 하나, 순간 마음에는 등 하나가 켜지는 것 같았다. 작지만 환한 빛이 마음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강화도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가량을 가면 아차도가 나온다. 볼음도와 주문도 사이에 있는 손바닥만 한 섬이다. 섬에는 식당은 물론 가게가 하나도 없는데, 가구 수가 30여 호 된다. 그곳에 110년이 된 예배당이 있다. 아차도감리교회다. 처남이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다른 욕심 없이 작은 섬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처남 목사가 고맙기도 하고 미덥기도 하다.

 

 

 

 

 

아차도를 처음 찾던 날이었다. 사택 거실에 손으로 만든 단순한 스탠드가 있었는데, 뭔가 글이 쓰여 있었다. ‘一燈能除千年暗’이라는 구절이었다. ‘등 하나가 천 년 어둠을 지운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부임하기 전부터 있던 등이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글은 불경의 한 구절이었다.
 
빛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둠이 진하다 하여 빛을 꺼뜨리는 것이 아니다. 빛은 어둠과 다투지도 않는다. 어둠이 항복을 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아니어서, 빛과 어둠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며 어느 지점에선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어울린다.

 

천 년의 어둠을 지우는 등 하나, 등 하나 켜듯 마음에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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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주님

김기석의 새로봄(180)

 

우리 가운데 거니시는 주님

 

너희는, 지난해에 거두어들인 곡식을 미처 다 먹지도 못한 채, 햇곡식을 저장하려고, 해묵은 곡식을 바깥으로 퍼내야만 할 것이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또, 나는 너희가 메고 있던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너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였다.(레위기 26:10-13)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규례와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복을 내리신다. 철 따라 비를 내리시고, 땅은 소출을 내고,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해로운 짐승을 없애시고, 세상에서 칼이 설치지 못하게 하신다. 해로운 짐승은 사람을 위협하는 맹수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사야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그 세계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이다(이사야 11:7). 우열을 가리고, 힘의 서열을 정하고, 피를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식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초식 동물의 세계이다.

 

“너희가 사는 곳에서 나도 같이 살겠다. 나는 너희를 싫어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 사이에서 거닐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기 26:11-12)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시고, 그들과 함께 거니신다. ‘거닐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할라카halakh’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야훼라는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층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창조자, 보호자, 생명을 북돋는 자라는 뜻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 혹은 감시자가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분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신다.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에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얽어매는 ‘멍에의 가름대’를 부수어서 우리가 얼굴을 들고 다니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온갖 속박들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하나님과 확고히 접속되는 것이다. 『장자』의 양생주 편에는  ‘제지현해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 매인 해방‘(정호경)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일체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장벽이 참 많다. 장벽은 늘 타자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또 다른 장벽을 세운다. 악순환이다. 장벽을 철폐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꿈이다. 경계선을 철폐하는 일은 복잡하지 않다. 누군가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그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고, 특권이나 기득권을 자꾸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하다. 사탄은 우리 사이를 버름하게 만들어 서로 통하지 못하도록 만든 후 우리를 지배한다. 사탄의 전략은 ‘나누고 지배하라divide and rule’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속죄 혹은 구속을 뜻하는 ‘어토운먼트atonement’를 파자破字해보면 ‘하나 되게 한다’(at+one+ment)는 뜻이 된다. 우리는 나뉜 세상을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기도

 

하나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신다는 말씀이 천둥소리처럼 크게 다가옵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머무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주님의 땅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야 땅과 산과 들과 강을 욕망에 따라 함부로 훼손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비로소 자유인이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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