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78)

 

베들레헴의 우물물

 

수확을 시작할 때에, 블레셋 군대가 르바임 평원에 진을 치니, 삼십인 특별부대 소속인 이 세 용사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을 찾아갔다. 그 때에 다윗은 산성 요새에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다윗이 간절하게 소원을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그러자 그 세 용사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길어 온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 그러면서 그는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 세 용사가 바로 이런 일을 하였다.(사무엘하 23:13-17)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선 것을 보면 아직 그가 절대왕권을 수립하기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수확철은 언제나 전쟁의 시기였다. 수확물을 빼앗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철병거로 무장한 블레셋이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다윗은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고향이 그리워서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하지만 삼십인 특별 부대에 속한 이들 가운데 세 명의 장수는 다윗의 그런 탄식을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친다. 

 

보기 드문 충성이고 용기이다. 죽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을 통해 그들이 새 삶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동굴’에 피신하고 있던 다윗을 찾아갔다고 말한다.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름을 받았던 때의 첫 마음을 잃은 채 전제왕권을 수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다윗은 잠재적인 적으로 분류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아둘람 굴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사무엘상 22:2)이 모두 다윗에게 몰려왔다. 다윗은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들을 세심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다. ‘뿌리 뽑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연대할 수 있었다. 세 장수는 자기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준 다윗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은 휘하 장수들이 떠온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다. 그 물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물 한 잔의 유혹 때문에 부하들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다윗은 아뜩해졌다. 다윗은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면서 말한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17절) 여기서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제가 어찌 감히’라는 구절이다. 바로 이 마음이 다윗을 다윗 되게 한 마음이다. 그는 부하들의 헌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윗이 물을 땅에 부어 주님께 바치는 순간, 그 장수들의 가슴에 감동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아, 우리를 이렇게도 아끼시는구나!’ 그들을 묶었던 연대의 끈이 더욱 튼실해졌을 것이다.

 

사무엘서 기자가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마감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삽입한 것은 왕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 ‘모두의 생명이 소중하다.’ ‘생명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이다.’ 물을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다윗은 해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었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고달플 때마다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해 방황합니다. 그곳에 가면 스산했던 마음이 따뜻해지고, 삶의 원기가 회복되는 곳 말입니다. 전장을 떠돌며 살아야 했던 다윗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은 그의 속에 깃든 외로움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부하들의 헌신을 통해 다윗은 자기 본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한정없이 방황할 때, 주님, 우리 마음을 원위치로 되돌려줄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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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2)

 

저물 때 찾아온 사람들

 

저물어 해 질 때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왔다.(마가복음 1:32) 그들은 왜 해가 질 때에 왔을까? 하루 일이 바빴던 것일까, 한낮의 더위를 피해 날이 선선해지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짚이는 이유가 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21절)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 외엔 고칠 수가 없었다. 필시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의 해가 질 때를 기다려 병자들을 데리고 왔을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신다. 예수님은 굳이 안식일 법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었다. 안식일이라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마가복음 3:4)고 하신 분이시다. 당시의 종교적인 잣대로는 어림도 없는 생각이지만, 하나님께 붙잡힌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우셨다. 어찌 하나님의 뜻을 사람의 규정 안에 가둘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이 조심스럽게 안식일의 해가 저물 때를 기다려 찾아온 것이었지만, 그들을 사랑으로 맞아주신 것이었다.
  

 

 

 


다들 바쁜 목회 일정,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일 수 있는 친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친구가 이 땅을 훌쩍 떠난 지 1년째 되는  날,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눈에 선한 친구의 사진을 제단 앞에 놓았고, 그 옆에 하얀 빛깔의 꽃을 놓았다. 동기 목사들이 모이는 날, 나는 그렇게 자리만 만들자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말씀을 나누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곁을 떠난 친구야 말로 저물어 해 질 때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사회에서 외면 받던 사람들, 중심에서 밀려나 무시당하던 사람들, 친구는 그들을 만나고 품어주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했다. 때로는 오해를 받고 때로는 비난을 받고,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누가 무어라 하든지 친구는 변함없이 약자 편에 섰고 소수 편에 섰다.

 

돌아보니 그랬다. 저물 때에 찾아온 사람들을 만난 사람, 친구는 세상 규정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속 좁은 세상을 향해 웃어 주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떠난 친구가 더욱 그리웠다. 그가 남긴 빈자리가 더욱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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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7)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 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애굽기 23:9)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잠시 집을 떠나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머물고 있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세계에서 자기의 고향을 떠나 낯선 외국인들 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 가슴 시린 일이었을 것이다.

 

‘게르’ 곧 ‘나그네’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살아가는 개종자였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어서 자기 고향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이주한 여인이다. 룻은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스라엘에 철저히 동화된 이들을 게르 체덱(ger tzedek)이라 한다. 

 

이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지만 이스라엘에 동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 토라는 이들을 게르 토샤브(ger toshav)라고 부른다.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밑바닥 수준이었다. 안식일 규정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은 안식일에 쉬어야 할 대상을 죽 열거한다. ‘너희’, ‘너희의 아들이나 딸’,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 ‘너희 집짐승’, 그리고 마지막이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출애굽기 20:10)이다. 고대 세계에서 나그네는 정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토라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 나그네, 즉 사회적 약자들에게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두려움에 떨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신다. 성결법전에서 하나님은 ‘게르’에 대한 생계 대책을 세우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신다. 곡식과 올리브 혹은 포도를 거두고 남은 것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삼년에 한 번씩 거두는 십일조도 그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나그네들을 잘 돌보라 하신 것은 그들이 나그네의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좌절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두려움과 공포를 이해할 수 있지 않던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그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 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해방자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일이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 복받는 길이기도 하다. 신명기법전은 유산도 없고 차지할 몫도 없는 레위 사람이나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들을 배불리 먹일 때 하나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신명기 14:29)

 

*기도*

 

하나님, 세상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거리에서, 직장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거침없이 내뱉는 욕설과 냉소가 우리 가슴을 멍들게 만듭니다. 가슴에 멍이 든 사람들은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함으로 보상을 얻으려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의 곤경에서 벗어날 길 없는 이들이 폭력과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하게 돌보라 명하십니다. 그 명령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받들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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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1)

 

거울

 

의식하지 않아도 보게 되는 모습이 있다. 목양실 책상에 앉으면 책상 오른쪽으로 큰 창문이 있고, 고개만 살짝 돌려도 창밖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따금씩 마주하게 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다. 정릉교회 예배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네모난 콘크리트 기둥이 서 있고, 그 기둥을 시작으로 담장이 이어지는데, 볼썽사나운 모습은 그 기둥 뒤에서 일어난다.


남자들이 문제다. 콘크리트 기둥을 핑계 삼아 벽에다 오줌을 눈다. 벽을 향해 돌아서면 기둥이 자신을 가려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지나가는 행인으로부터 겨우 자신의 얼굴만을 가려줄 정도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벽에다 대고 오줌을 누는 뒷모습이 2층에서는 빤히 내려다보인다. 벌건 대낮에 남자 망신을 사는 모습은 아주 드문 모습이 아니어서, 한 두 명이 벌이는 못된 버릇은 아니지 싶었다.

 

그 모습이 영 언짢은 것은 오줌을 누는 벽이 공터 쪽에서 보면 허름한 벽이지만, 얇은 벽 반대편은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해당된다. 저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예배당으로 들어설 때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독한 지린내에 인상을 찌푸려야 할 터,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싶었다.

 

 



 



이런 경우 몇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직설적으로 고지식하게, 이왕이면 붉은색 스프레이로 ‘소변금지’라 벽에다 쓰든지, 조금은 유머를 담아 눈앞에서부터 점선을 그은 뒤 일을 다 보기 전쯤 눈길이 멈출 만한 곳에 가위를 그려놓는 것이다.

 

생각하다가 다른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벽에다가 작은 거울을 하나 달았다. 딱 그 자리에 서면 자기 얼굴이 보일 딱 그 자리에. 그런 이유로 정릉교회 초입 기둥 뒤편 허름한 벽엔 거울 하나가 달려 있다. 허름한 공터에서 누가 거울을 본다고 벽에다 거울을 달았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 할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그곳에 서서 바지춤을 내리려던 누군가도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고 갸웃 하기를.

 

거울 때문일까, 거울을 달고 보름쯤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직은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얼굴을 무시하는 이를 보질 못했다. 그렇다고 노상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니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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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6)

 

힘을 내어라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개 2:4-5)

 

규모의 문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을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했다. 모든 가치가 숫자로 환원되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성적, 점수, 연봉, 재산, 아파트 시세에 목숨을 건 것처럼 보인다. 숫자 앞에서는 우정도 박애도 인간적 친밀함도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름다움과 몸까지도 숫자로 관리되기에 피트니스 센터는 새로운 신전이 되었다. 체중, 몸매, 체질량을 전문가의 손에 맡겨 관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하여 자본주의 질서에 확고히 포획된다.  

 

신앙인들조차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가르고, 교회의 크기에 따라 목회자들의 계급 관계가 만들어진다. 큰 교회 목사들은 신앙적 깊이나 인간적 품격과는 관계없이 발언권을 독점하고, 작은 교회 목사들은 이유 없이 주눅 들어 지낸다.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했던가?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 숫자를 늘리면 그들은 유능한 목사라 인정받는다. 저마다 백향목이 되어 모든 나무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다. 겨자풀들의 천국을 가르쳤던 예수님은 오늘의 교회에서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들은 성전을 지음으로 삶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 뜻은 장했으나 척박한 땅에서의 생존이 어려워지자, 환멸이 찾아왔고 성전 건축은 뒷전으로 밀리고 말았다. 사는 것이 힘겨운 판에 성전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람들이 말할 때, 학개는 성전을 포기했기에 삶이 어려워진 것이라 말하며 성전 건축을 독려한다. 뜻이 바로 서야 삶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학개의 독려를 통해 성전 건축 공사가 재개되었다. 성전 터가 정비되고 기초가 놓일 때 옛 솔로몬 성전의 영화로움을 기억하던 이들은 그 초라한 규모를 보고 통곡한다. 그들의 울음은 다른 이들까지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건만, 사람들은 규모에 집착한다. 그때 학개를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다.  

 

“그러나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학개 2:4)

 

‘힘을 내어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여호와의 확언이다. 에스겔은 온갖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솔로몬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성전 혹은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학대받은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건재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대체 주저할 것이 무엇이랴. 세상에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이다.

 

*기도*

 

하나님, 사람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을 때 주님은 그 성전의 무너짐을 보셨습니다. 진리를 권위로 바꾸고, 거룩을 이익으로 바꾼 성전 혹은 교회는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이 두려운 진실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교회만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늘 망설이면서 실행의 시간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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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5)

 

사랑은 제자됨의 징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낳아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분이 낳으신 이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요한일서 5:1-5)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말은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셨다는 확신과 더불어,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성취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전형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 하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 의식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은 늘 깨어 있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과 대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이웃들의 고통에 민감한 분이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마태복음 9:12)는 말은 주님의 삶의 방향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주는 말이다.

 

맹자는 공자를 가리켜 ‘성지시자(聖之時者)’라 하였다(孟子, <萬章 下>). 공자는 성인 가운데 시중(時中)의 도리를 지킨 분이라는 뜻이다. ‘시중’이란 ‘수시처중(隨時處中)’이라는 말을 줄인 것으로 때에 따라 가장 적절하게 처신한다는 말이다. 어떤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삶의 핵심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이야말로 시중의 삶을 사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세상 사람들 앞에 온전히 드러내셨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現-存在’(Dasein)이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명에 대한 ‘아멘’이었다. 사랑에 근거한 순종이기에 비애가 남지 않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 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주님이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사랑이야말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다.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랑은 수고를 전제한다. 수고 없는 사랑의 고백은 허사일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지옥이란 다름 아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랑할 수 없음이 지옥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사랑에 무능한 사람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된다. 좋은 식당에 가면 웨이터들이 늘 손님들의 식탁을 주목하고 있다가 물 잔에 물이 떨어지면 곧 다가와 물을 채워준다. 낯선 나그네들을 영접했던 아브라함도 그들이 먹는 동안 서서 시중을 들었다지 않던가(창세기 18:8).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 잔을 비워낼 때 하나님은 그것을 넉넉히 채워주신다. 이런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주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기도*

 

하나님,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사랑받기를 구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속에 깃든 가장 아름다운 삶의 가능성을 깨어나게 합니다. 주님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맞아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이셨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을 누리지 못한 이들의 가슴에는 차가운 얼음이 자랍니다. 그 얼음은 두려움과 냉소 혹은 공격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주님, 따뜻한 봄볕이 만물을 깨우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세상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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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0)

 

이팝나무

 

언제부터 저리 많았나 싶게 요즘 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 중 흔하게 보게 되는 것이 이팝나무다. 눈이 부실 만큼 나무 가득 하얀 꽃을 피워낸 모습을 보면, 이팝나무만 골라 폭설이 내린 듯 눈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인다.

 

 


꽃을 볼 때면 슬쩍 군침이 돌기도 하는 것은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쑥버무리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뜯어온 쑥 위에 쌀가루를 뿌려 만든 쑥버무리, 이팝나무엔 하얀 쌀가루와 푸른 쑥이 그럴 듯이 어울린다.

 

하지만 이팝나무 꽃을 바라보는 종국엔 괜스레 눈물겹다.
저 하얀 꽃을 바라보며 하얀 이밥을 떠올렸던 배고프던 시절을 생각하면.
먹을 게 넘쳐나 이팝나무를 바라보면서도 이팝나무의 유래를 모르는 오늘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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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9)

 

 어부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농암종택을 찾기 전까지는 농암을 몰랐다. ‘어부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게 떠올랐던 것은 윤선도의 어부가뿐이었다. 자료를 대하니 농암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1542년,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종2품 '영감(참판)' 신분으로 물러났다. 인기와 여망으로 보면 '대감(판서)'도 가능하고 '정승(좌,우 영의정)'도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임금,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령했다.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를 지었다. 이 날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는 말이 나오게 했다. 퇴계 이황은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그 누구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1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 보기 드문 ‘재야재상’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1555년 6월 13일,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효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린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농암이 유일하다. 농암은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감격적인 시조 한 수를 읊었는데, 그것이 ‘농암가’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가’가 미친 영향도 컸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의 ‘속어부사’, 이형상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러워하며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선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를 찾아 읽었다. 시대와 시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뭉클 전해지는 심정이 있었다. 원문 그대로는 아니지만 ‘어부가’는 다음과 같았다. 함께 동행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호대원 목사님에 의하면 선비에게 어부의 일이란 정신세계와 세상을 이어주는 경계와 같은 일이었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몰라라

굽어보니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江湖)애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

청하(靑荷)에 밥을 싸고 녹류(綠柳)에 고기 꿰어
노적화총(蘆荻花叢)애 배 매어 두고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를 어느 분이 아실가

산두(山頭)에 한운(閑雲起)하고 수중(水中)에 백구(白鷗飛)라
무심(無心)코 다정(多情)하니 이 두 거시로다 (이 두가지 뿐이로다)
일생(一生)애 시름을 잊고 너를 좆아 놀으리라

장안(長安)을 돌아보니 북궐(北闕)이 천리(千里)로다
어주(漁舟)에 누었신들 잊은 때가 있으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업스랴

 

위의 시도 원문 그대로는 아니었는데 그것마저 이해가 쉽지 않은 터에 조금 쉽게 뜻을 풀어놓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어부생활) 속에 근심 걱정할 것 없으니 어부의 생활이로다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띄워 놓고
인간 세상의 일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겠도다

(아래로) 굽어보니 천 길이나 되는 푸른 물, 돌아보니 겹겹이 쌓인 푸른 산
열 길이나 되는 속세의 띠끌(어수선한 세상사)은 얼마나 가리워졌는가
강호에 밝은 달이 밝게 비치니 더욱 무심하구나

연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잡은 물고기를 꿰어서
갈대와 억새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대어 묶어 두니
이런 자연의 참된 재미를 어느 분이 아실까

산봉우리에 한가로운 구름이 피어나고(일어나고) 물 위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네
아무런 사심없이 다정한 것은 이 두 가지뿐이로다
한평생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너희들과 더불어 지내리라

멀리 서울을 돌아보니 경복궁이 천 리로구나
고깃배에 누워 있은들 (나랏일을) 잊을 새가 있으랴
두어라, 나의 걱정이 아닌들 세상을 건져낼 위인이 없겠느냐

 

‘인간 세사를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을 알랴’,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부디 내게도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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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4)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

 

수필 문학을 한 차원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윤오영 선생이 들려주는 ‘방망이 깎던 노인’ 이야기는 시간에 쫓겨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동대문 맞은 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한다. 방망이 한 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하자 노인은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이리 저리 돌려보며 굼뜨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했다. 차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저 달라고 해도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되나”라고 퉁 치고 말았다. 자꾸 재촉을 하다가 포기한 화자에게 노인은 말했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결국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불쾌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방망이를 본 아내는 칭찬 일색이었다. 제대로 된 방망이를 사 왔다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편지의 수신인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바친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a) 신앙생활의 과정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깎고, 자르고, 두드리고, 문지르는 일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최선과 인간의 최선이 만나 이루어지는 법이다.

 

좋은 방망이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아내에게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응대한다. “배가 너무 부르면 힘들어 다듬다가 옷감을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 정성을 다해 깎은 방망이라야 제 역할을 잘 감당하는 법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는 일은 죄뿐이라면서 어쩌다 선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통찰한 이의 말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일을 이루기 원하신다. 아름다운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생명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임을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다듬질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은 은총의 시간이다.

 

*기도*

 

하나님, 세월의 더께가 앉은 우리 영혼은 죄에 대해 아주 둔감하게 변했습니다. 영적 민감함을 잃었기에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욕망 둘레를 맴돌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 병든 세상,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그 부름에 응하고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일체의 군더더기들을 걷어내 주시고, 주님의 마음과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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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8)

 

견뎌야 하는 무게

 

창문 밖으로 건물 하나를 짓는 모습을 여러 달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모든 재료와 모든 과정들이 모여 집 한 채가 세워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토요일인 엊그제도 아침부터 작업이 한창이었다. 2층에서 3층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키가 장대인 크레인이 서서 온갖 재료들을 일하는 곳까지 올려준다. 저 모든 재료들을 사람이 등짐으로 옮기자면 하세월일 텐데, 지금은 기계가 척척 감당한다.

 

오늘 올리는 짐들의 대부분은 철근이다. 크레인은 키만 큰 것이 아니어서 힘도 세다. 철근 한 다발을 들어 올리면서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도면을 든 이가 위로 올라온 철근이 놓일 자리를 지정해 주면, 다른 이들은 열심히 철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야말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일하는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만들어온 구조물 위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은 구조물은 저 많은 철근과 일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누군가 남이 만든 바탕 위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바탕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은 것이 허술하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이룬 바탕 위에서 다음 일을 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동안 어떤 바탕을 만들어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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