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26)

 

개치네쒜

 

 

우리가 모르는 우리말이 어디 한둘일까만, ‘개치네쒜’라는 말은 전혀 모르던 말이었다. 심지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디 다른 나라 말로 여겨진 말이었다. 우리말에 그런 말이 있는 줄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 영 아쉽게 여겨졌던 것은 그럴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에서 목회를 시작하며 독일어를 배우는 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개설한 독일어를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나처럼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모여 ‘아베 체 데’부터 배우는 과정이었다. 오직 독일어만으로 독일어를 가르쳤는데 전혀 모르는 언어를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내게는 또 다른 관심사이기도 했다. 표정이나 몸짓이 만국공통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덤으로 배웠다. 

어느 날인가 인사말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날 배운 인사말 중의 하나가 “게준트하이트!(Gesundheit!)”였다.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면 옆에 있던 사람이 건네는 인사말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말은 건강이라는 뜻의 ‘게준트(Gesund)’와 상태를 의미하는 ‘하이트(Heit)’가 결합된 말이었다. 


게준트하이트를 일러준 선생님은 수강생인 우리들에게 자기나라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인사를 하는지를 나눠보자고 했다. 미국에서 온 학생이 당연하다는 듯이 “God bless you”라고 소개를 했다. 그날 들은 인사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라마다 다양한 인사말이 있었다.  


아랍에서는 “알함둘릴라(Alhandulilla)”(신께 찬미를)이라 말하고, 러시아에서는 재채기를 한 아이에게 “부지 즈도로브(Bud’ zdorov)”(건강해라)라고 화답한 뒤에, “로스티 볼쇼이(Rosti bolshoi)”(크게 자라거라)라고, 중국에서는 아이가 재채기를 하면 “백 살까지 살기를”이라는 뜻으로 “바이 슈이(Bai sui)”라고, 이탈리아에서는 “펠리시타(Felicita)”(행복해라), 프랑스에서는 “A vos souhaits”(소원 성취하기를) 또는 “Que Dieu vous benisse”(신의 가호가 있기를)라고 인사를 한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는데 도무지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재채기를 했을 때 따로 들었던 말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는 그런 말이 없다고 하기에는 뭔가 우리나라를 미개하거나 무례한 나라로 만드는 것 같았고, 우리에겐 그런 말이 없다고 독일어로 표현할 자신도 없었다.
얼떨결에 대답했던 말이 “에헴!”이었다. 대답을 하고나자 그 말이 재밌다며 학생들이 웃었는데,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은 “에헴”이라는 말은 재채기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다. 그 말은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했던 말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아이가 기침을 하면 기침을 그치라며 어른들이 따라하라고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말에도 재채기를 했을 때 건네는 말이 있었다니! ‘개치네쒜’가 바로 그런 말이었던 것이다. ‘개치네쒜’라는 말은 영 낯설어서 마치 주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개치네쒜’의 유의어로는 ‘에이쒜’나 ‘에이추’가 있고, 강원도 방언으로는 ‘개치네시’라 했다니, 제법 널리 사용하던 말이었지 싶다. 누군가 재채기를 했을 때 “개치네쒜!” 하면 고뿔이 들어오지 못하고 물러갔다는 것이다.

모르는 단어 하나를 아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재채기 하나에도 따뜻한 관심을 갖는 의미로 마음에 새겨둘 우리말이다 싶다. ‘개치네쒜’라는 낯선 말이 어서 낯설음을 벗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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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0)

 

냄새 혹은 향기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14-17)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마음은 고린도에 가 있었다. 신생교회의 위기가 그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품고 마케도니아로 선교의 현장을 옮겼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소식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해하던 바울의 어조가 급격히 바뀐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후2:14)

 

바울은 왜 여기서 굳이 개선 행렬이라는 수상쩍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개선 행진은 로마의 군사주의와 깊이 연루된 것이다. 로마는 이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5천 명 이상의 적을 죽이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해 황제에게 귀속시킨 장군에게 개선 행진을 허락했다. 그는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금빛 마차를 타고 로마의 주도로를 행진했다. 그의 부대가 획득한 전리품과 포로들이 행렬을 뒤따랐다. 사제들은 행렬을 뒤따르며 향을 피워 신들의 가호를 빌었다. 개선 행진은 원형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큰 원을 뜻함)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포로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로마의 개선행렬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사제들이 피우는 향기는 잔인한 폭력을 숨기는 역겨운 냄새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바울은 이런 용어를 가져다 쓰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개선 행렬과 철저히 대비되는 다른 개선 행렬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 개선 행렬은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낯설었던 사람들을 벗이 되게 하는 행렬 말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말을 택하여 로마 체제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제안한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냄새(stench)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aroma)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우리는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린도후서 2:15)

 

오늘 우리는 어떤 향기를 풍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는데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을 잘못 든 사람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기도*

 

하나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이 늘 우리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길들여진 채 살아갑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부끼다보니 우리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이 부끄러운 악순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맑은 영을 우리 속에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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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9)

 

흙가슴으로

 

다른 죄수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누가복음 23:32-34)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시간, 세상은 흑암과 절망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과 선이 잦아들고, 악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쾅쾅 쳐 못을 박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대못이 박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껏 조롱하던 이들은 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용렬함과 비겁함을 숨기려 했다. 그 어둠의 시간, 야만의 시간에도 주님은 당신께 맡겨진 일을 계속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34). 죽음의 문턱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주님은 세상의 폭력과 미움과 비겁함과 무지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다.

 

 

 

 

 

이 대목을 묵상할 때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마지막 연이 떠오른다. “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 무기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절절한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는 흙가슴이라는 표현이 이채롭다. 세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 기어이 정화시키고야 마는 흙을 닮은 마음이 바로 흙가슴일 것이다. 어느 날 외국 기자가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물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156-7쪽 요약)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대해 분노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다. 불의에 치열하게 저항하면서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미움과 증오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주님은 하늘 군대를 동원하여 원수를 없애기보다는 당신의 몸으로 세상의 어둠을 받아들여 빛으로 바꾸는 길을 택하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혁명이다.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나 더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른다.  “자기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진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바로 이 사실을 몸으로 증언하셨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면서도 참 어렵습니다. 상처 입은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모욕과 수치의 기억을 우리는 적대감으로 바꾸어 마음에 쟁여두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하는 무리를 용서하실 수 있었나요? 그 마음을 얻어 보려 노력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더 큰 세상과 잇댄 채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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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나방 애벌레

 

 

가지나방 애벌레는 나뭇가지를 흉내 낸다. 새들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자작나무에 있는 가지나방 애벌레는 자작나무 가지처럼 몸의 빛깔을 바꾸고, 버드나무에 숨은 가지나방 애벌레는 버드나무 빛깔을 띤다.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가지나방 애벌레는 벌레가 아니라 영락없는 가지로 보인다. 심지어는 줄무늬를 그려 넣은 인공 나뭇가지에 올려놓자 가지나방 애벌레의 피부에는 인공 나뭇가지에 그려놓은 줄무늬가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지나방 애벌레의 눈을 가려도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지나방 애벌레는 눈으로 빛깔을 감지하여 몸의 빛깔의 바꾸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빛을 감지해 주변 환경에 맞도록 자신의 피부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세상에, 피부로 빛을 감지하여 감지해 낸 빛깔에 자기 몸을 맞추는 벌레가 있다니.

가지나방 애벌레 이야기를 들으며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은 한 마리 벌레는 자신의 몸으로 주변의 색을 감지하여 자신의 몸을 일치시키는데, 오늘 우리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다 하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닮은 게 보이지 않는, 결국은 애벌레만도 못한, 우리의 한심한 한계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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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사도행전 17:22-27)

 

아레오바고에 선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매우 종교적이라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익히 알려지지 않은 신들의 노여움을 살까 무서워 사람들은 미지의 신들의 제단까지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표면적 질서 너머에 다른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낀다. 무신론자를 자처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나를 어쩔 수 없이 끌어당기는 덫이라고 말했다. 신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그는 <미지의 신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未知의 당신,/心靈 속 깊숙이 파고 든 당신을./내 목숨을 폭풍처럼 정처 없이 떠돌게 하는 당신./알 수 없는 당신, 그러면서 가까운 나의 血緣!/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몸소 당신을 섬기고 싶습니다.“ 

 

 

 

 

 

신에 대해 알고 싶지만, 인식의 벽 앞에서 사람들은 절망한다.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두려움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나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그 대상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23b)라고 말한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아테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만물의 근원(arche)을 자연 속에서 찾았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을 알고 있다. 탈레스는 ,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피타고라스는 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이런 논의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또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신전은 신을 만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놓은 상징적인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제물을 바쳐야 노여움을 푸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받음이 충격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기 이전에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에 낭비와 파괴가 일어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7:27)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사람다운 삶이 가능하다.

 

*기도*

 

하나님,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바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먼 데 계신 분으로 인식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눈을 열어주십시오. 세상 만물 속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보게 해주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기적임을 알아차리게 해주십시오. 그런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영적 빈곤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땅이 주님이 머무시는 곳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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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16)

 

저 작은 꽃들이 피어

맑은 것과 고요한 것이
사납고 거친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몇날 며칠 사나운 비 끝
저 작은 꽃들이 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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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7)

 

예언자로 산다는 것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수많은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예레미야 20:7-11)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영광과 찬탄이 아니다. 그들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폭력파멸을 외치자,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은 아주 격하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7)

 

번역이 너무 점잖게 되어 있다. ‘나를 속이셨다는 말은 원래 달콤한 말로 자기를 꾀었다는 말이고, ‘나를 이기셨다는 말은 마치 강간을 하듯 힘으로 자기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뜻이다. 불경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절박하다. 가깝던 사람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그가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늘어나는 상황을 누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다짐한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9)

 

하지만 그런 다짐도 부질없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어떤 뜨거움 때문에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타락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새로운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는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지만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길, 그것이 부름 받은 이들의 길이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이 말은 진리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 중인 사람들이 언제든 명심해야 할 말이다. 안전과 편의주의, 허영심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때, 그 때는 분명 실존적인 위기의 순간이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고양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 의회 앞에 소환되어 그동안 써왔던 모든 주장들을 철회하고 책을 불사르라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황제의 명령을 들었을 때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그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그는 자기 확신과 신념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 아스라한 장대 끝에서 허공을 향해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비로소 하나님의 품에 오롯이 안겼다. 우리는 그 길로 초대를 받은 이들이다.

 

*기도*

 

하나님, 예레미야의 탄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말이 거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마음이 시원해지곤 합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 생각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은 다 예레미야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등 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상처는 일상이 됩니다. 비록 그런 일을 겪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잠시 동안의 평안을 위해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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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6)

 

창조적인 연대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출애굽기 36:2-7)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 명하신다. 그 명령에 따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각자의 소유 가운데서 주님께 바칠 예물을 가져오라 이른다. 성막을 세우는 데는 금, 은,․ 동, 청색 실, 자주색 실, 홍색 실, 가는 모시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향품, 홍옥수를 비롯한 각종 보석 등이 필요했다. ‘과연 이런 요청에 백성들이 응답할까?‘ 모세는 반신반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경은 이것을 간결하게 보도한다.

 

 “마음이 감동되어 스스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나서서…갖가지 예물을 주님께 가져 왔다.”(35:21)

 

그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여퉈두었던 것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자재 헌납을 보도하는 대목에서 성서 기자가 거듭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원하는 사람들’,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라는 말이다. 백성들은 강요나 체면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그러한 자발성의 비밀은 ‘마음이 감동되어’라는 말 속에 담겨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인 신명이 그들에게서 이기심의 껍질을 벗겨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산다. 뭔가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다는 기쁨이 인색한 마음을 압도했다. 하나님의 일에는 강제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감격 때문인지 백성들이 바친 물품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36:7) 한다. 기적이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술과 재주를 바쳤다. 영 연방 최고 랍비인 조나선 색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든 성막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을 간결하게 비교한다. “자발적 기여로 창조된 성막은 민족을 통합시켰으나 강제 징발된 노동력의 산물인 성전은 민족을 분열시켰다.”(조나선 색스, <<사회의 재창조>>, 298쪽) 솔로몬이 죽은 후 남북 왕조로 분단된 현실을 이르는 말이다. 성전을 세운다는 미명 하에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과 부역이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성막을 세울 때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그 일에 동참했다.

 

성막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각자가 기여한 바가 다르지만, 모든 사람의 헌신이 하나하나 소중히 여겨졌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져왔다. 금이나 은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실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나무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기여의 경중은 가려지지 않았다. 함께 어울려 창조적인 일을 수행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의 백성으로 세워졌지만, 그들이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절감한 것은 성막 건설을 통해서였다. 함께 한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

 

*기도*

 

하나님, 가끔 외롭다는 생각에 몸부림칠 때가 있습니다. 곁에 있는 많은 이들이 마치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질 때, 왠지 모를 스산함이 우리를 확고히 감쌉니다. 각자도생을 요구하는 사회에 살면서 외로움은 더욱 깊어가고 있습니다. 벗들과 함께 창의적인 일, 의미있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말든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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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8)

 

누가 남아 있을까 봐

 

15년차 베테랑 소방관이 순직했다. 안성의 공장 건물 화재를 진압하던 중에 순직을 한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지하실로 들어갔다가 인화물질이 폭발하여 희생을 당했다고 한다.

 

 

 


 

그가 지하실로 들어갔던 것은 혹시라도 창고 안에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였단다. 누구라도 불속에 남아 있을까 불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누가 남아 있을까 봐’


순직한 소방관을 불속으로 뛰어들게 한 한 마디가 마음을 울린다. 누가 봐도 위험한 불속으로 소방관을 뛰어들게 한 생각이 그러했다면, 목회자의 생각은 더욱 그리해야 하지 않을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까지 찾는 것이 목자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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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55)

 

잠과 식사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열왕기상 19:1-8)

 

갈멜산에서의 대결 이후 신적 분노에 사로잡힌 백성들은 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붙잡아 이스르엘 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기손 강가로 데려가 모두 죽였다. 그런 후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일곱 번 기도하자, 바람이 일고 짙은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오롯이 나타났다. 하지만 엘리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사건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은 이를 갈며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한다. 만일 그를 내일 이맘때까지 죽이지 않는다면 신들에게서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면 이런 위협 앞에 흔들릴 리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가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고 말한다.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던 엘리야에게 적용된 단어들이 낯설다. ‘두려워서’, ‘급히’,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이 아닌가? 엘리야는 영웅에서 졸지에 반(反)영웅으로 전락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인간이다. 어떤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고 난 후에는 무력감이나 공허감이 찾아올 때가 많다. 그는 쓸쓸한 도망자가 되어 뙤약볕 밑을 터벅터벅 걷다가 로뎀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주님께 하소연한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4절)

 

 

 

 

그런데 혼곤한 가운데 잠이 찾아온다. 잠은 엘리야로 하여금 두려움과 고독의 심연으로 내몰리던 마음에 틈을 만들어준다. 팽팽하게 곤두섰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그 때 천사가 그를 깨웠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리맡에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엘리야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잠에 빠졌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이른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리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감동한다.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훈계하거나 꾸짖지 않으셨다. 그의 절망과 두려움까지도 품어 안으시고 그에게 꿈조차 없는 단잠을 주셨다. 그리고 그를 위해 말없이 밥상을 차리셨다. 마치 중력처럼 그를 절망으로 잡아당기던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일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것이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이 장면을 생각한다. 우리를 위해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기도*

 

하나님,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기세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몰아치던 엘리야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은 낯설기만 합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당황스럽습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게 사람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연약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말없이 감싸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낼 수 없습니다. 비록 비틀거리며 걸을지라도 기어코 가야 할 목표에 당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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