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50)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1-4)

 

목숨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잘 해결해 나갈 때도 있지만 어려움에 치여 헐떡일 때도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우리 마음에 기어들 때도 있고, 구체적인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흔들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거나, 잠을 청하거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자기를 던지거나, 술의 힘을 빌리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간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시인은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린다. 그러자 은총의 날개 아래서 살아온 지난날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주님은 인생의 어둔 밤을 만난 시인의 등불이셨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적들은 마치 제 발에 걸린 듯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여전히 어려운 현실은 남아 있지만, 회복된 기억은 시인의 가슴에 든든함을 심어준다.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으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결을 불어넣어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하게 하신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시인은 노래한다.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편 27: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이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다. 신앙인이란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바람은 지친 나그네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일 때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다.

 

시인은 자기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소원이란 그 소원 이루고 나면 죽어도 좋은 것일 것이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편 27:4)

 

하나님이라는 중심에 자신을 비끄러맨 채 살고 싶은 것이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인 삶은 직립한 삶이다. 그는 허둥거리지 않는다.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당당한 이 한 마디가 우리를 붙들어준다.

 

*기도*

하나님, 힘들 때나 순탄할 때나 주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사는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할 마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붙드시고, 하늘빛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흐르는 모래에 갇히듯 세상일에 속절없이 빠져들 때 우리의 손을 잡아 건져주십시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워하는 영을 거두시고,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받드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어서 사는 길  (0) 2019.08.06
바보 같은 열정  (0) 2019.08.05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0) 2019.08.03
성찬의 신비  (0) 2019.08.01
눈 밝은 사람 라합  (0) 2019.08.01
축복의 소명  (0) 2019.08.01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10)

 

 꽃의 주인

 

주인집의 정원을 돌보는 정원사가 있었다. 그는 많은 나무와 꽃을 가꾸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그가 아끼는 꽃이 있었다. 얼마나 꽃이 아름다운지 일을 하다가도 그 꽃을 바라보면 피곤이 사라지곤 했다.

 

 


 

 

어느 날 정원을 돌보던 그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가 꺾었는지 아끼던 꽃이 보이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꺾인 꽃은 주인집 거실 꽃병에 꽂혀 있었다.


정원사는 화가 났다. 왜 꽃을 꺾었느냐며 주인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주인은 이상하다는 듯이 정원사에게 말했다.


“내가 정원을 돌아보다보니 눈에 띄게 아름다운 꽃이 있어 꺾어왔네. 뭐가 잘못됐나?”

 

정원사는 꽃을 사랑했지만, 꽃의 주인은 아니었다. 우리 가진 모든 것이 무엇 다를까, 다만 사랑할 뿐 주인은 내가 아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는 열매보다 작다  (0) 2019.08.06
첨(尖)  (0) 2019.08.05
꽃의 주인  (0) 2019.08.03
하나님 일 한답시고  (0) 2019.08.01
위장(僞裝)  (0) 2019.08.01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0) 2019.08.01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149)

 

성찬의 신비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0:16-17)

 

<안식의 여정>은 헨리 나우웬 신부가 남긴 마지막 일기이다.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세계적인 학자인 그는 인생의 절정기에 대학을 사임하고 중증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새벽의 집’에 들어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사람을 돌보며 살았다. 밥을 먹여주고, 씻겨주고, 잠자리를 보아 주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시켜주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여러 해를 그렇게 살다가 그는 안식년을 얻게 되어, 1년 동안 ‘새벽의 집’을 떠나 세계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벗들을 만났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벗들과 만나 한 가장 중요한 일이 성찬 나눔이었다는 사실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은 성찬을 나눔으로 자기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재확인하곤 했다. 그들의 사귐의 중심에는 성찬식이 있었던 것이다.

 

주후 4세기 이후에 사막의 은둔소에 머물며 기도생활에 전념하던 이들을 가리켜 헤지카스트라고 부른다. 그들도 주일이 되면 은둔소에서 나와 인근 도시에 있는 교회를 찾았다. 그것은 예배와 성찬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 가운데 성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감리교도들에게 길을 가다가도 어딘가에서 성찬식이 있음을 알면 꼭 성찬에 참여한 후에 길을 떠나라고 권고했다.  

 

 

 

 

성찬식은 어느 교회에서나 아주 엄숙하게 거행되지만 사실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은 일상의 식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찬식이 지나치게 신비화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교회의 상징은 성찬식에 사용되는 화려한 그릇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때 사용한 수건과 대야여야 한다고 말했다. 일리가 있다. 지금의 성찬식이 성직자들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으로 도구화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제자들은 성찬을 통해 주님과 함께 지냈던 때의 기억을 반추하고, 그분의 현존이 자기들 속에 일으켰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삶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고, 어찌하든지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시던 주님의 모습,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한없이 당당하시던 주님의 모습,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십자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던 주님의 모습,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자기들을 찾아와 평안을 빌어주며 새로운 사명을 주시던 주님의 모습. 주님에 대한 기억은 또한 거울이 되어서 지금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였을 것이다. 이런 성찬을 나눌 때 우리 삶이 맑아지지 않을까?

 

*기도*

 

하나님,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주님의 삶과 희생을 떠올립니다. 성찬의 식탁 앞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차별은 지워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세워놓은 분리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허무셨습니다. 우리도 장벽 허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혐오와 차별의 말이 넘실대는 세상에서 울고 있는 이들을 봅니다. 이제는 사람들 앞에 걸림돌을 놓지 않겠습니다. 가장 천대받는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추겠습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 같은 열정  (0) 2019.08.05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0) 2019.08.03
성찬의 신비  (0) 2019.08.01
눈 밝은 사람 라합  (0) 2019.08.01
축복의 소명  (0) 2019.08.01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0) 2019.07.31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149)

 

 

눈 밝은 사람 라합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에, 라합은 지붕 위에 있는 그들에게 올라가서 말하였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여호수아 2:8-9)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으로 보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인 여리고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정탐꾼들은 그 성에 잠입하여 라합의 집에 머물렀다. 성경은 라합을 창녀라고 소개한다. 다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성전에 소속되었던 제의적 창녀를 일컫는 말은 ‘커데샤’이다. 이들은 세속적 매춘행위는 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었다. 그에 비해 라합에게 적용된 단어 ‘조나zǒnā’는 세속적인 창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라합은 그 성읍 국가의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여인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엄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남성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고단한 삶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사람이었다. 

 

정탐꾼들은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정체는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정탐꾼이 왔다는 첩보는 왕에게까지 알려졌고, 왕은 라합에게 전갈을 보내 정탐꾼들을 데려오라 이른다. 그러나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로 데려가 널어놓았던 삼대 속에 숨겨주었다. 그럴듯한 말로 수색대를 따돌린 후에 라합은 정탐꾼들의 탈출을 돕는다. 그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그동안 라합은 어쩌면 단 한 번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합은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예민한 지각력으로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라합은 거스를 수 없는 그 변화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며 자신을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세웠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돌려보내며 한 말은 라합의 단단한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여호수아 2:9)

 

라합은 여리고의 상황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람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는지, 그리고 넘실거리는 홍해를 어떻게 가르셨는지, 아모리 족속에 속한 두 나라 헤스본과 바산을 어떻게 정복했는지를 다 듣고 있었다. 라합은 그런 모든 구원 행위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대세는 기울었다. 라합은 천대받던 여인이지만 눈이 밝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기도*

 

하나님, 세상을 바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표면의 질서를 알아차리기도 어렵지만, 이면에서 작동되는 힘을 이해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길을 따라 걷기도 합니다. 불안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분별해냈습니다. 밑바닥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열린 눈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역사 섭리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posted by

김기석의 새로봄(147)

 

 

축복의 소명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 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 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에게도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29:4-9)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동족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나라를 잃어 천더기 신세인 그들에게 세상은 적대적일 뿐이었다. 그들은 복역의 때가 끝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그들의 일상은 고통 그 자체였다. 조롱하는 눈빛에 상처를 입고, 무시하는 말투에 맘 상하고, 물리적인 폭력에 시달렸다. 가진 것이 없다고, 지켜줄 나라가 없다고 마치 인격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분하지만 상황을 바꿀 힘조차 없었다. 그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말한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예레미야 29:5-6)

 

예레미야는 뿌리 뽑힌 백성들에게 속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는 헛된 꿈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비록 남의 땅에 살고 있는 나그네 신세이고, 아무데도 속한 데가 없는 ‘설 땅을 잃은(nowhere)’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봄 되면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고, 또 때가 되면 돕는 배필을 만나 아들딸 낳으며 일상의 삶을 회복하고, 자식들이 장성하면 짝을 지워주라는 것이었다. 곤욕스럽더라도 중요한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수굿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권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만 보아도 치가 떨려오는 압제자들의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의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한다. 그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도, 약자의 비겁한 굴종도 아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기록한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창세기 1:28)라고 축복하셨다. 마음에 이는 증오심과 원망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승자의 오만한 여유를 즐기는 이들보다 더 큰 정신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이기는 길이고, 사는 길이다. 애굽에 팔려간 요셉, 다니엘과 세 친구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활용하여 살아남았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기독교인의 소명은 누군가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믿음의 사람들은 누구라도 다가와 친밀하게 머물고,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우정의 공간’을 만드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기도*

 

하나님,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의심이 머리를 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선하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우리가 겪고 있는 시련을 못본 체 하시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일상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라 이르십니다. 땅의 현실에 충실할 때 비로소 하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둥거리던 발걸음을 멈추고 현실 속에 하늘을 끌어들이며 살겠습니다. 믿음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김기석의 새로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찬의 신비  (0) 2019.08.01
눈 밝은 사람 라합  (0) 2019.08.01
축복의 소명  (0) 2019.08.01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0) 2019.07.31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한다  (0) 2019.07.30
나그네로 산다는 것  (0) 2019.07.29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7)

 

하나님 일 한답시고

 

여름이 되었고, 많은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빠뜨릴 수 없는 행사 중의 하나가 수련회여서, 각종 수련회가 이어진다. ‘수련’할 때의 ‘수’는 ‘닦을 수’(修), ‘련’은 ‘익힐 련’(練)이다. 더러워진 것을 닦아내고, 익혀야 할 것을 익히는 모임이 수련회인 것이다. 

 

여러 해 전 크리스천기자 수련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크리스천기자 수련회가 정확한 모임이름이었는지는 자신이 없는데, 방송 신문 잡지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기자 중 크리스천 기자들이 따로 모임을 갖는 자리였던 것은 분명하다. 글을 쓰는 목사라 생각해서 이야기를 청했지 싶었다.

 

 


 

한 가지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면서 생각해보니 크리스천 기자인 여러분과 목사인 제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점이 닮았다 싶으세요?”


오라는 데는 따로 없어도 늘 바쁘다, 늘 대기 상태다, 자다가도 뛰어나간다, 일에 끝이 없다, 언제 그만두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누가 기자 아니랄까 봐 재미있고 재치 있는 대답들이 이어졌다. 웃으며 이야기를 듣다가 더는 대답이 없을 때 내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에 우리가 닮았다 싶은 것은, 하나님 일 한답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딱 좋은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고, 곳곳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첨(尖)  (0) 2019.08.05
꽃의 주인  (0) 2019.08.03
하나님 일 한답시고  (0) 2019.08.01
위장(僞裝)  (0) 2019.08.01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0) 2019.08.01
같은 질문, 다른 대답  (0) 2019.07.31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8)

 

 위장(僞裝)

 

1978년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에 입학을 했을 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신학 자체가 두렴과 떨림의 학문이었던 데다가, 목회를 준비한다는 것은 더욱 그런 일이어서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조심스럽게 보일 때였다.


그 때 만났던 사람 중에 강인호 형이 있다. 당시는 한 학년의 학생 수가 50명이었는데, 우리 학년에는 우리가 형이라 부르던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입학을 했거나, 군대를 다녀온 분들이었다. 강인호 형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나는 언제 한 번 형과 편히 이야기를 나눠본 기억이 없다. 당시 나는 여러 면에서 숙맥이었고, 선뜻 다가가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숫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 내게 강인호 형은 공부도 잘 하고, 생각도 깊고, 뭔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로 보였다. 그랬으니 나로서는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소식이 멀어진 이들이 있다. 강인호 형도 마찬가지였는데,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다른 동기들도 형의 소식을 잘 모르고 있었다. 언뜻 듣기로는 미국에서 지낸다고 했다.

 

삼가던 페이스북을 시작하면서 몰랐던 이들의 소식을 접하게 될 때가 있다. 강인호 형의 소식도 그렇게 접하게 되었다. 페북을 통해 형의 일상을 대할 수가 있었는데, 역시 자유혼을 가진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

 

 

 

 


며칠 전엔 형이 번역한 니체의 글을 만날 수 있었다. 니체가 쓴 <비도덕적 의미의 진리와 거짓>이라는 글을 형이 번역한 것이었다. 글은 소책자에 담아도 될 만큼 분량이 많았고, 니체의 글답게 내용도 쉽지 않았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걸 번역해 낸 형의 인내와 관심에도 마음이 갔다. 번역한 내용 중에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이 있었다. ‘위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지능은 개인의 자기 보존을 위한 수단이다. 그것의 주된 힘은 위장(僞裝)에서 발휘된다. 위장은 약자 혹은 덜 강한 개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그들이 생존 투쟁에서 자신들의 뿔이나 포식자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대항할 기회가 거부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장의 기술은 인간에게서 정점에 달했다. 기만, 아첨, 사기, 현혹, 뒷담화, 거짓으로 앞을 가리기,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가면 쓰기, 관습 속에 숨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 한마디로, 허영의 외로운 불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며 펄떡거리는 것이 인간들 사이에서 확고한 법과 규칙이 되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서 진리를 향한 정직하고 순수한 열망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던 가를 찾는 일은 가장 알기 힘든 일이다.>

 

기만, 아첨, 사기, 현혹, 뒷담화, 거짓으로 앞을 가리기,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가면 쓰기, 관습 속에 숨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 ‘위장’ 중에 담긴 ‘뒷담화’ ‘남에게 빌려온 영광으로 살아가기’ ‘남 역할과 자기 역할 번갈아 가며 놀기’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우리들이 쓰고 있는 가면, 우리들의 위장은 그렇게도 다양하고 다채롭고 그럴 듯한 것이었다. 진리를 향한 정직하고 순수한 열망을 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아프게 헤아리게 된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의 주인  (0) 2019.08.03
하나님 일 한답시고  (0) 2019.08.01
위장(僞裝)  (0) 2019.08.01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0) 2019.08.01
같은 질문, 다른 대답  (0) 2019.07.31
불가능한 일  (0) 2019.07.30
posted by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9)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인디언 전설에 따르면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데는 이유가 있다. 어느 날 숲속을 걷던 거북이 한 마리가 남쪽으로 가겠다는 새들을 만났다. 거북이는 자기도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거북이가 나뭇가지를 입에 물었고, 새 두 마리가 양쪽에서 나뭇가지를 발로 움켜잡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북이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황홀해진 거북이가 저 아래로 펼쳐지는 광경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지만, 새들은 그런 거북이의 마음을 모르고 날기만을 계속했다.


 

 

 

 

마침내 참지 못한 거북이가 새들에게 묻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막대기를 놓친 거북이는 한 순간에 땅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머리와 두 팔다리를 몸속에 감추고 움츠린 채 떨어져 목숨은 구했는데, 하필이면 등으로 떨어지고 말아 등짝이 온통 금이 가고 말았다.


자신이 새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거북은 금이 간 등짝을 지니고 있다고, 필립 시먼스는 그의 책 <낙법 배우기>를 통해 인디언 전설을 들려주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차츰 쇠약해지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일 한답시고  (0) 2019.08.01
위장(僞裝)  (0) 2019.08.01
거북이 등짝이 갈라진 이유  (0) 2019.08.01
같은 질문, 다른 대답  (0) 2019.07.31
불가능한 일  (0) 2019.07.30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0) 2019.07.29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