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97)

 

사랑할 자유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3-15)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혹은 "남으로부터 규정·구속·강제·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 바울은 자신의 삶이 율법의 강제와 지배 속에서 살아온 삶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율법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이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시자 그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무엇을 해도 늘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늘 율법의 감시 아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가 이제는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 배려 혹은 돌봄이야말로 그리스도인됨의 핵심이다. 그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유를 기꺼이 유보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의 빛깔로 채색되게 마련이다. 힘이 없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굴욕감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노릇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쁨이다. 칭얼대는 손자를 업어주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할머니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服從>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노래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실체이다. 바울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14)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문으로 분류한다. 그 중에서 “∼ 하라”의 형태로 된 계명이 248개이고, “∼ 하지 말라”"의 형태로 된 것이 365개이다. 248이라는 수는 사람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의 합이고, 365는 일년을 뜻한다. 그러니까 613개의 율법 조문은 하루하루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요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샘물이 말라 버린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음성가의 노랫말처럼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저절로 되는 사랑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 노력한다 하여 싫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은 의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험한 길을 달린 수레보다 세워둔 수레가 더 빨리 망가진다 한다. 사랑도 훈련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의 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하늘 샘이 아니던가.

 

*기도*

 

하나님,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공포를 주입하기에 우리는 주저주저하며 옛 생활에 묶인 채 살아갑니다. 이제는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명랑하고 천진하게 생을 대하고, 맑고 깊은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사랑의 샘물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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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9)

 

 

잊을 수 없는 만남  
 

그날 밤 그 만남은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남아 있다. 먼 곳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차에서 급한 전화를 받았다. 권사님의 아들이 다쳐 수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는 대신 병원으로 달려갔다. 권사님을 만난 것은 수술실 앞이었다. 순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들이 기계를 청소하던 중에 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간 것이었다. 기계를 멈췄을 때는 이미 손이 많이 으스러진 상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듣는 내가 그러니 어머니 마음은 어떠실까, 수술실 앞에서 시간을 같이 보내기로 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더디 무겁게 흘러갔다. 어느 순간 중 권사님이 당신 살아오신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는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 했다. 참으로 신산(辛酸)했던 삶, 권사님은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당신이 살아오신 지난 시간을 모두 이야기했다. 얼굴이 고우셔서 누가 보아도 이 분께 무슨 근심걱정이 있을까 싶은데, 권사님의 인생은 굽이굽이 눈물어린 가시밭길이자 험곡(險谷)이었다. 권사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눈물에 젖은 내용들이었다.

 

 

 

 

아들이 수술을 받는 동안 수술실 앞에서 담임 목사에게 털어놓는 지난날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나는 권사님께 진심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다.


“부족한 사람을 믿고 이야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 마음에만 담아 둘게요. 그리고 권사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오늘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권사님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권사님은 제게 여전히 소중한 분입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이어진 이야기,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내게는 화인처럼 남아 있다. 권사님도 그러시지 않으실까 싶다. 이야기 속에는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는 법,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이 부디 상처와 아픔과 회한을 덮는 따뜻한 위로로 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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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6)

 

생명은 소명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요한복음 12:44-50)

 

마틴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존재 망각'이라 한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살기에,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 또한 없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두할 따름이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召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다. '할 일'이 뭔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면 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워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 말이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엄마가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드레싱을 끝낸 간호사 선생이 병실을 나서면서 내일 아침에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까 수유실로 내려오세요하고 말했다. 그 엄마는 다소 당황스러운 어조로 내려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기가 막힌 말 아닌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셈이다. 우리는 삶의 입구와 출구를 잘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들이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의 존재의 중핵이다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영원의 등불을 밝히셨다. 세상 길에서 방황하다가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며 그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그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 수 없다.

 

*기도*

 

하나님,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성 어거스틴이 바쳤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분주한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니 우리는 존재-망각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넘치지만 정작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죽비처럼 우리 마음을 뒤흔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삶으로 빛을 밝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등불이나마 밝혀드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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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8)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Equal-Time Point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서진교 장로님을 통해서였다. 창천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숙소에서 교회까지, 교회에서 숙소까지 나를 태워다 주신 분이 서장로님이었다. 장로님은 새벽에도 정한 시간에 맞춰 숙소로 찾아와 교회로 가는 수고를 해주셨다. 더없이 고마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는데, 덕분에 장로님과 차를 타고 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장로님은 비행기를 모는 항공기 조종사 출신이었다. 삶의 경험이 전혀 다른 분들을 만나면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다. 장로님이 들려주는 비행기 혹은 비행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했고 재미있었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들을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가 ‘불환귀점’이었다. 언젠가 읽은 글에 불환귀점이라는 말이 있었다. 청년부 수련회에서는 그 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런 말이 맞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사전에서 찾을 수가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글에서는 ‘불환귀점’을 비행기가 일정한 지역을 지나가면 남아 있는 연료의 양 때문에 출발지로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목적지로만 날아갈 수밖에 없는 한 지점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었다. 신앙적으로도 의미 있다 여겨져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EPT였다.

장로님 대답에 의하면 ‘불환귀점’에 해당하는 전문 용어가 있었는데, 바로 EPT였다. Equal-Time Point의 약자였는데, 이 말을 직역하여 ‘등시점’이라 옮긴 곳도 있었다. EPT는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과 출발지로 회항하는 시간이 같은 지점’을 의미하는 말로, 유사시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운항을 결정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된다. ETP를 확인하여 출발지로 돌아갈 것인지, 목적지 또는 대체 비행장에 착륙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어디로 정할지 결정하는 기준이 거리가 아니라 시간인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비행기 연료의 소모량은 거리를 기준해서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신앙이란 Equal-Time Point를 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는 이전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다만 당신께로 갈 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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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카잔차키스의 영혼

 


 

어떤 현실에도 굴하지 않는 원시적 힘을 가진 사나이 <그리스인 조르바>와 인간적 유혹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지켜낸 예수를 그린 <최후의 유혹>은 서로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 하나로 묶인다. 그건, 무수한 고난과 좌절 그리고 절망 앞에서 결국 무너지지 않은 인간에 대한 갈망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그리스 출신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세상에 충격을 준 글이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는, 터키에 지배받아왔던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가계의 자손이었다. 그는 강인해야 했고, 그 어떤 상황도 이겨내야 했다. 두려움을 정복하고, 희망의 봉우리에 올라서야 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년에 집필한  <영혼의 자서전>에서 카잔차키스가 어떻게 자신을 뜨겁게 일구어냈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서전이 얼마나 문학적이고 철학적일 수 있는가도 함께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폭우로 온 마을의 포도밭이 다 떠내려가면서 모두가 비통해하고 있었을 때, 입을 꽉 다물고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는 남아 있잖니”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카잔차키스는 이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이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평생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생명의 철학자 베르그송과, 인간의 초월적 책임을 일깨우면서 인간 내면에 있는 위대한 힘을 이끌어 낸 니체의 제자인 그는 인간의 영혼이 가진 용맹함에 대해 깊은 신뢰를 부여했다.


 



 

카잔차키스는 젊은 시절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목표를 향해 나가라. 멈추거나 소리를 지르지 마라. 너에게는 한계점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 한계점이 무엇이든 간에 너는 앞을 향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그는 고독과 우울함과 좌절에 맞서 격투를 벌어나갔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영혼에 언제나 싸워야하는 쟁투의 기운만 가득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운명하는 자리에서 남긴 이야기는 이러하다. “소와 양, 당나귀들을 잘 돌보아라. 짐승들도 인간이다. 우리처럼 영혼을 가졌지만 가죽을 쓰고 말을 못할 뿐이다. 옛날에는 다 인간이었다.(...) 올리브와 포도나무를 잘 돌봐라. 열매를 얻고 싶으면 거름과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한다. 나무들도 옛날에는 인간이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냐?“ 인간이란 삼엄하거나 가파른 산을 끝까지 올라야 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격전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영혼이 거칠어지거나 무자비해지지 않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다. 나비가 되려는 유충을 억지로 나비가 되게 하려다가 실패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면서 카잔차키스는 생명의 법칙을 넘어서 서두르지 않는 지혜를 일깨운다. 결국, 모든 것은 통과해야 할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수한 싸움을 치러 오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때로 우린, 격투에 몰두하며 사랑을 잃었고, 다급한 마음에 순서를 지키지 않고 억지를 부렸던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당장의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강인하면서 너그럽고, 멀리 내다보면서 깊이 있게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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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5)

 

주님의 위엄에 눈 뜨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시편 8:1-3)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거듭해서 이 구절을 되뇌이다 보면 우리는 일상의 잗다란 일들로부터 벗어나 우주에 가득찬 신비 앞에 서게 된다. 뭔가를 보며 !’ 하고 경탄할 줄 안다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다. 놀랄 줄 모르는 것이 타락한 영혼의 특색이라지 않던가. 뭘 봐도 그저 심드렁한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진 사람 혹은 영혼의 샘물이 말라버린 사람이다.

 

앤터니 플루(Anthony Flew)라는 영국 철학자가 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그가 쓴 책은 무신론의 교과서로 통했다. “신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며 신을 부인했던 그가 82세에 <신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논거는 자연의 법칙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3) 하고 노래했던 히브리 시인의 마음을 그도 느꼈던 것일까? 앤터니 플루의 전향에 가장 실망한 것은 역시 과학적 합리성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던 무신론자들이다. 하지만 여든 두 살 노인의 이런 변화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후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해야 할까

 

 

 

 

구상 선생님은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마음의 눈을 뜬다.//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고 노래했다사물들을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총총한 별처럼 빛나더라는 시인의 고백이 아름답다. 이런 눈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는 우러러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장엄함 앞에 멈추어 설 줄 아는 능력,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현될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는다시인은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그는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눈에 하늘에 무심히 떠 있는 해와 달, 그것은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다. 이런 눈이 열릴 때 세상은 욕망이 진창이 아니라 신비가 깃든 땅이 된다

 

*기도*

 

하나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알 수 없는 비애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아름답고 멋지게 살고 싶은 바람이 크지만 현실은 잿빛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면 마음조차 환해집니다. 잊고 있었던 맑음의 세계와 아름다움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치유해줍니다. 세상 만물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그 신비 앞에서 경탄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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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7)

 

 

 오덴세와 조탑리  
  

독일에서 살 때 몇 분 손님들과 함께 덴마크를 다녀온 적이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로 9시간 정도를 달리자 덴마크 땅이었다. 동행한 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검색 없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너무나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덴마크를 찾은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오덴세 방문이었다. 오덴세는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클림트와 모차르트를 빼고 비엔나를 생각하기가 어렵듯이, 오덴세 또한 안데르센을 빼고는 말할 수가 없는 도시였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안데르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안데르센이 죽었을 때 덴마크의 모든 국민들이 상복을 입고 애도했을 만큼 그를 아끼고 사랑했다니 당연한 일이겠다 싶기도 하다. 


안데르센 기념관에는 안데르센에 관한 온갖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가난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가 그렸던 그림들과 종이를 오리는데 사용한 가위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밧줄도 있었는데, 사연이 재미있었다. 여행을 좋아했던 안데르센은 언제라도 화재가 나면 밧줄을 타고 탈출하려고 늘 밧줄을 챙겨 다녔다는 것이다. 


넓은 잔디밭에 조성된 야외공연장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가 뮤지컬로 공연되고 있었다.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물론 주변에 사는 이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나와 잔디밭에 편히 앉아 안데르센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날 나는 전시관에 놓인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다. 


“이야기 속에는 꿈이 있네요. 사랑도 있고요. 왜일까요, 이곳에서 권정생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건요.”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는 작은 흙벽돌집이 있다. 창고라 해도 허름해 보이는, 지극히 작고 낡은 흙벽돌집이다. 그 집의 주인은 지금 집에 없다. 방에 들어온 생쥐한테도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시골교회 예배당 종지기로 살면서 자기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것들을 눈물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빛나는 동화를 썼던, 바로 권정생이 살던 집이다. 


 


 

이번에 경북북지방 연합성회를 인도하기 위해 영주를 다녀오며 그곳 목회자들로부터 권정생 이야기를 들었다. 권정생은 정말로 비렁뱅이였다고 한다. 폐병이 든 거지여서 지금도 권정생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를 문전걸식을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종을 치는 조건으로 일직교회 구석방 하나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마음 아픈 이야기도 있었다. 권정생이 남긴 전 재산과 그 앞으로 나오는 인세 모두를 북한 어린이를 돕는 일에 쓰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마을 주민들이 반대를 하는 바람에 결국은 권정생 기념관이 조탑리에 세워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오덴세와 조탑리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극과 극처럼 다르다. 권정생에겐 차라리 덩그마니 버려진 듯 남아 있는 조탑리 흙집이 잘 어울린다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프고 슬프다. 외롭고 불쌍한 것들 품고 살더니, 끝까지 외롭고 불쌍한 권정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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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4)

 

절실함과 신뢰가 만날 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마태복음 8:5-13)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그 앞에 나아와서 간곡하게 말한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반응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성은 우리에게 다음에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말은 다소 장황하다 싶을 정도이다. 자신은 주님을 집으로 모실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셔도 종이 나을 거라고 말한다. 자기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부하들이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종의 병이 물러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신앙의 전범으로 소개한다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첫째그는 공감(sympathy, 동정)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공감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열어놓은 상태를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서보는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르다. 공감이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는 점에서는 감정이입과 비슷하지만,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감정이입은 쉽지만 공감은 쉽지 않다백부장은 종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떠돌이 유랑 설교자 앞에 나아와 간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둘째, 백부장은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무한히 신뢰한다. 예수님이라면 종의 병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종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과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결합하여 기적을 일으켰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초겨울 저녁, 술 한 잔을 걸쳐 약간 취기에 찬 그는 제자와 쌀쌀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제자는 선생께 고구마를 자시겠냐고 묻자 무위당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저기 군고구마라고 쓰인 글을 보게. 초롱불에 쓰여진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신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뜻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저 글씨는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중에 나오는 김종철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재인용)

 

절실한 마음에서 진실이 나온다.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가 절박한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씨에서 장 선생님은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 온갖 필법을 연마한 끝에 써내려간 일필휘지보다도 군고구마 장사의 글씨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신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정직하고 절실한 이들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의 모태는 이런 자기 겸비와 절대적 신뢰이다. 주님은 백부장의 그런 신뢰에 대해 명쾌한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도 간결하다

 

*기도*

 

하나님, 부정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은 돌가슴으로 변했습니다. 이웃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혀를 찰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외로운 이들은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괴로운 이들은 홀로 그 고통의 심연을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종, 종교, 문화, 계급, 민족 등 사람을 갈라놓는 인위적 장벽을 넘나들며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종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백부장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과 만나자 치유의 빛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그 빛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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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56)

 

 심방  


  
심방을 시작했다. 이른바 ‘대심방’이다. (그렇다고 ‘소심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교인을 대상으로 하는 심방을 흔히 대심방이라 부른다) 요즘은 세태가 바뀌어 가정으로 찾아가는 심방이 갈수록 줄어드는 형국이다. 새로 등록하는 교우 중에서도 가정 심방을 받기 원하는 이들은 소수가 되었다.


생각하다가 가정심방을 하기로 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고 피곤도 하겠지만, 가정 심방을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싶었다. 정릉교회에 부임해서 처음으로 하는 심방, 각 가정을 찾아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서로를 잘 이해하는 길도 드물겠다 싶었다.


 

                                 사진/송진규

 

최소 인원으로 찾아간다. 나와 아내, 그리고 심방 전도사가 동행을 한다. 부목사와 속장 등도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각 가정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이야기를 나눈다. 미리 적은 기도카드를 앞에 두고 형편과 사정 등을 이야기하며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를 나누는 것이다. 어디 이야기가 따로 있고 예배가 따로 있겠는가, 이야기는 이미 예배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눈물짓는 이야기들이 있다. 응어리로 가라앉아 있는 아픔이 있고, 생채기로 엉겨 있는 일들이 있다. 남에게 내보이기 싫고 부끄러운 모습이 누구에게 없을까. 부끄러움까지 내려놓고 나누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우리가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얼마 전부터 불청객처럼 찾아온 전정 신경염으로 어지럼증이 이어지고 있다. 하루 심방을 마치고 나면 몸과 마음과 목소리가 젖은 솜처럼 가라앉는다. 하지만 나는 목사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심방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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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3)

 

억지가 없는 사람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시고 심부름꾼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이 길을 떠나서 예수를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누가복음 9:51-56)

 

예수적 삶의 특색은 비폭력 저항이라 할 수 있다. 공생애 전체가 그러하거니와 그의 마지막 순간도 그러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가해加害피해被害라는 폭력의 악순환을 훌쩍 뛰어넘은 자유인이었다. 어떤 학자는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완전히 낯선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에서 낯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누가가 들려주는 예수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상과 접촉하며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한가로운 여행이었다면, 혹은 영광을 위한 여정이었다면 굳게 결심까지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난을 향한 행진이었기에 비장한 여정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앞서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적대적이었다. 몽둥이를 들고 나왔는지, 싸늘한 눈길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예수 일행을 환대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누가는 그 이유를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라고 밝히고 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정서적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질서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다. 앗수르의 침공 이후에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옛 질서는 그들을 이방인 취급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에 불인두로 지진 상처처럼 아프게 새겨진 것은 소외감이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 일행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그들이 참 딱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라 할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더욱 딱하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반응에 분개하여 말한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누가복음 9:54) 가슴에 마치 잉걸불이라도 품은 것 같은 격렬한 반응이다. 그들은 엘리야가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진설해 놓은 제물을 활활 사르던 갈멜 산의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식식거리는 제자들이나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꾸짖을 생각도, 그들을 훈계할 생각도 없다.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향하셨다. 길이 막히면 에돌아 나가는 물과 같다. 도무지 억지가 없다. 그렇기에 비애도 없다. 이런 삶의 홀가분함을 배우고 싶다.

 

*기도*

 

하나님, 선의를 가지고 다가서도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차가운 냉대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우리 마음도 그만 겨울 왕국처럼 변하고 맙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서운함은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호의가 적대감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입니다. 바울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 일쑤 낙심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처럼 홀가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음 넉넉함을 우리 속에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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