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32)

 

때 아닌 때
    


1981년, 그해 가을을 잊을 수 없다. 짝대기 하나를 달고 포상 휴가를 나온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군에 입대한지 넉 달여 만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꿈같은 휴가였다. 
논산에서 훈련을 마친 뒤 자대에 배치를 받자마자 배구대표선수로 뽑혔고, 광주 상무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했다. 9인제 배구였는데 나는 레프트 공격수였다. 아무리 규모가 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해도 이등병에게까지 휴가를 줄까 염려했던 것은 기우, 보란 듯이 3박4일간의 휴가를 받은 것이었으니 군 생활 중에 누릴 수 있는 기쁨 중 그만한 것도 드물 것이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 같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수원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부곡역에 내린 나는 먼저 교회를 찾아갔다.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린 뒤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려 사택에 들렀다. 사모님이 나오셨는데, 나를 보더니 왈칵 눈물을 쏟으신다. 반가움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잠시 뒤에 나오신 목사님도 마찬가지였다. 눈물부터 보이셨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더 참지를 못하고 여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질문을 받은 두 분은 당황하셨다. 모르고 왔느냐며 되물으셨다. 

막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그렇게 들어야 했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자기도 신학을 공부해서 형을 도와 목회를 하고 싶은 꿈을 가졌던, 형이 우승을 하면 휴가를 나갈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매일 밤 예배당을 찾아 기도를 드렸던, 우승을 하며 누구보다 먼저 떠올랐던, 휴가를 나오며 가장 싶었던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사고였다. 막 입대한 내가 충격을 받을까 집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막 장례를 마친 뒤였다. 포상 휴가를 받아 기쁨으로 달려온 내게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동생을 잃은 것과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잃은 것은 달랐다. 비교할 수가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생의 유일한 벗을 잃었다고 했다. 그만큼 막내는 심성이 착했고 다정다감했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나는 눈물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모르겠는 시간을 뒤로 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 때의 쓸쓸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눈물에 젖은 기도를 드렸다. ‘내 것 아닌 것, 내 것이라 하지 않게 하소서.’

 


부대에서는 포병 생활과 군종 생활을 겸하여 했는데, 어느 날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가복음 11장을 읽게 되었다.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이었다.


예수께서 베다니 지역을 지나가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6월말 7월초에 열매를 맺는 나무에게 4월에 열매를 찾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었다. 나무 잘못이 아니라 열매를 찾는 이의 잘못이었다. 동생을 보낸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당하게 여겨졌던 그 말씀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주님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요구할 수 있는 분이구나.’

며칠 전 새벽기도 시간에 만난 본문이 같은 본문이었다. 같은 본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동생을 떠올리게 되었다. ‘너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자’ 했던, 귀대하던 기차 안에서 가졌던 다짐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우리의 삶이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찾는 그분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삶이다. 시간이 우리 몫이 아닌 것처럼 항의나 원망 또한 우리 몫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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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31)

 

징검다리
    

오래 전 단강에서 보낸 시간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보와 함께 기억을 하곤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주보에 담았다. 땅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여겨졌던 일들, 그 일을 기록하는 것은 내가 이웃에게 다가가는 한 방법이었고, 내게 허락하신 땅을 사랑하는 한 선택이었다. 고흐가 그림을 통해 땅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나는 이야기를 통해 다가갔다. 주보의 이름도 <얘기마을>이었다.

지렁이 글씨로 글을 쓰면 아내가 또박또박 옮겨 썼다. 때로는 아내조차 내가 쓴 글씨를 읽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글씨를 읽지 말고 이미지를 읽으라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손으로 써서 만든 주보는 민들레 씨앗처럼 조용히 퍼져갔고, 700여 명의 독자가 있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식구들이었다.

 


 

단강을 떠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그랬다. 떠남을 얼마 앞두고 만든 주보 표지에 ‘징검다리’라는 짤막한 글을 실었다. 

내가 아니면 건너지 못한다.
나는 건너지 못한다.    

떠나는 날이 보름여 남았을 때니 단강을 떠난다는 것을 교우들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떠나는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우연히 만난 옛 주보 표지에 실린 ‘징검다리’, 나는 여전히 징검다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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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취를 경계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베소서 5:15-20)

 

 

가장 열심히, 가장 분주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영적인 잠에 빠지기 쉽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에베소서 5:15) ‘살피라는 단어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 빠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한다. 늘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있던 초대교인들은 이 말을 아주 강력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의 첫 마디는 들어라’(obsculta)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귀로만 들으면 안 된다. 먼저 머리로 다음에는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라틴어로 순명을 뜻하는 ‘oboedientia’듣다라는 뜻의 ‘audire’와 어원이 같다. 들음은 순명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에베소서 5:18) 여기서 말하는 은 좁은 의미로는 알코올 음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모든 종류의 도취를 일컫는 환유換喩로 보아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일체의 것들 곧 술, 쾌락, 마약, 오락, 권력, 소유 등이 바로 변형된 이다.

 

 

 

 

신앙이란 깨어남이다. 지금 우리 삶이 뭔가에 도취된삶인 것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삶이 생기를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8b-19)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 눈으로 보면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세상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세상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타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산다. 자기를 열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본다.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늘 낯섭니다.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늘 고민하며 길을 모색합니다.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뭔가에 도취함으로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것은 자학일 뿐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혀 살도록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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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불화를 넘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서 7:24-25)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불화의 쓰라림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5) 자각과 삶의 불일치, 이것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바울은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한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도 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는 율법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것이었다. 이런 깊은 자각이 있었기에 그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24절)라고 탄식했다.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사이의 분열 혹은 불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왜 무능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육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성 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역254)

의지의 왜곡-->육욕-->버릇-->필연-->노예 상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이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굳게 결심을 해보아도 우리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욕에 이끌려 가곤 한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이다.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습기習氣,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싶어 절규하던 바울의 어조가 바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마서 7:25a). 일렁이던 바다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 같다. 돌풍이 몰아치던 하늘에서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이 느닷없는 전환 속에 은총의 신비가 있다.

 

*기도*

 

하나님, 인간의 자기 불화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인지요?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의 불일치는 우리 속에 깊은 자괴감을 자아냅니다. 대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고 살지만, 바울은 그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화는 오직 주님의 은총 안에서만 극복될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깊이 잠길 때,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이 녹을 때 우리는 죄의 법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그 은총으로 육욕의 노예살이를 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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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을 사는 사람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3-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성령 강림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저들의 삶은 사람들이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이다.

 

초대교회는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다. 낯선 이들이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이 익명성 속에 머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와의 친밀한 교제를 소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번거로움을 귀찮아한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받고 싶지 않기에 서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스스로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달음에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로 만든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기도*

 

하나님,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자못 따갑습니다. 경멸의 언사와 눈빛을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다면 이런 난감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실과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도와주시고, 이익이 아니라 의를 검질지게 추구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싸늘한 세상에 봄소식처럼 다가가는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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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1)

 

평화 나누기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17-21)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지침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기도 가운데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를 데려오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솔직하게 마음의 생각을 아뢰라. 왜 그를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말이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는 순간 치유가 시작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여야 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힘이 유입됨을 느낄 것이다.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야 한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율법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율법은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삶의 곤경이 오히려 원수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교회는 평화를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평화의 표징이 될 수 없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 나누기>라는 시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과제를 이렇게 밝힌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남과 북, 노동자와 사용자, 여당과 야당,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선 시대이다. 하지만 평화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믿는 이들은 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에 근거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 거친 세상에 지친 히브리의 시인은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편 55:21)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실감이 되는 나날입니다. 한 번 두 번 상처를 입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마음은 갑각류처럼 굳게 닫혔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쓸쓸함입니다. 주님, 선으로 악을 이길 힘을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우리 속에 심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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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2)

 

희망의 뿌리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이 네 모든 친척, 네 혈육,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 땅은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에스11:14-16)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있던 자기 집에서 놀라운 비전을 본다. 그가 유다 장로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하늘과 땅 사이로 그를 들어 올려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역겨운 일들을 다 보았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신다. 그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 망연하게 서 있던 에스겔은 더 놀라운 광경을 본다.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시던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에 있는 산꼭대기에 머무르는 장면이었다(에스10).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의 굴혈이 아니겠는가.

 

에스겔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지금 우리 형편은 어떤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는 많지만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계신 교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고 그분의 손과 발이 되려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희망의 빛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 끌려가 죗값을 치르고 있는 백성을 보며 마음 아파하신다.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은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땅을 차지할 생각에 온통 부풀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잡혀간 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11:16).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백성들을 찾아가 스스로 성소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때가 되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 속에 일치된 마음과 새로운 영을 넣어주시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라 살게 할 것이라 약속하셨다(에스36:26-27).

 

이 약속은 위태롭기만 한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반석이었다. 종말론적인 희망이 삶에 유입될 때 잿빛 현실은 완전히 다른 빛깔로 바뀌지 않던가. 캄캄한 밤과 같은 세월을 지난다 해도, 주님의 동행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며 걷는 것이 믿음의 행보이다. 희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는 그 희망을 살아내면 된다.

 

*기도*

 

하나님, 광야에 세워진 회막은 소박했지만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성전은 애초에는 아름다웠으나 결국은 더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권력과 탐욕이 영광의 빛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오늘 더럽혀진 이 땅의 교회들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게 해주십시오. 이제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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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28)

 

Good to Great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Good is the enemy of Great) 라는 말이 있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짐 콜린스 교수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 나오는 구절로 알려져 있다. ‘좋은 것은 위대한 것의 적이다’라는 말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어진다. “대개의 사람들은 제법 ‘좋은 삶’을 살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위대한 삶’으로의 꿈을 접는다.” 

 

 

 

 

의미로 살펴보면 ‘좋은’이라고 옮긴 ‘Good’은 ‘좋은’보다도 ‘무난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무난한 삶에 만족하여 그 너머에 있는 위대한 삶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마음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위대한 삶을 미리 포기하곤 한다. 그런 점에서 ‘Great’는 ‘위대함’보다는 ‘의미 있는’으로 옮기고도 싶다.

시간은 인간의 몫이 아니어서 때를 셈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환갑이 지나면서부터 목회의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급함과는 조금 다른, 허투루 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무난하게, 무탈하게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 없다. 그것은 최선이 아니다. 낯설고 거북해도 무난한 것을 등지고 의미 있는 것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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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29)

 

어느 날 보니

어느 날 보니
젊다는 것이 예쁘더라
푸릇푸릇
영 서툰 것이

어느 날 보니
늙었다는 것이 예쁘더라
노릇노릇
잘 익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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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27)

 

호박꽃을 따서는

우리나라의 전래동요를 모아놓은 책에 ‘호박꽃’이란 동요가 담겨 있다. 

충북 충주 지방 동요라고 밝히고 있는데, 삽화도 정겹다.

호박꽃을 따서는
무얼 만드나
우리 아기 조고만
촛불 켜주지

 


 

 

 


예뻐라, 호박꽃.
호박꽃과 같은 후덕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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