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74)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

 

수필 문학을 한 차원 끌어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윤오영 선생이 들려주는 ‘방망이 깎던 노인’ 이야기는 시간에 쫓겨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어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아주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동대문 맞은 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한다. 방망이 한 벌을 깎아달라고 부탁하자 노인은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이리 저리 돌려보며 굼뜨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만 하면 될 것 같아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 했다. 차 시간이 다 되었으니 그저 달라고 해도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되나”라고 퉁 치고 말았다. 자꾸 재촉을 하다가 포기한 화자에게 노인은 말했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결국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불쾌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방망이를 본 아내는 칭찬 일색이었다. 제대로 된 방망이를 사 왔다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편지의 수신인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바친다. “영원한 언약의 피를 흘려서 양들의 위대한 목자가 되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화의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갖 좋은 일에 어울리게 다듬질해 주셔서 자기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히브리서 13:20-21a) 신앙생활의 과정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깎고, 자르고, 두드리고, 문지르는 일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성도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최선과 인간의 최선이 만나 이루어지는 법이다.

 

좋은 방망이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아내에게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응대한다. “배가 너무 부르면 힘들어 다듬다가 옷감을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 정성을 다해 깎은 방망이라야 제 역할을 잘 감당하는 법이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는 일은 죄뿐이라면서 어쩌다 선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통찰한 이의 말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일을 이루기 원하신다. 아름다운 일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생명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일임을 가르쳐주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다듬질하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은 은총의 시간이다.

 

*기도*

 

하나님, 세월의 더께가 앉은 우리 영혼은 죄에 대해 아주 둔감하게 변했습니다. 영적 민감함을 잃었기에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면서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욕망 둘레를 맴돌며 근근이 살아가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 병든 세상,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자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 그 부름에 응하고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일체의 군더더기들을 걷어내 주시고, 주님의 마음과 꿈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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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8)

 

견뎌야 하는 무게

 

창문 밖으로 건물 하나를 짓는 모습을 여러 달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모든 재료와 모든 과정들이 모여 집 한 채가 세워지고 있는 모습을 본다.

 

토요일인 엊그제도 아침부터 작업이 한창이었다. 2층에서 3층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키가 장대인 크레인이 서서 온갖 재료들을 일하는 곳까지 올려준다. 저 모든 재료들을 사람이 등짐으로 옮기자면 하세월일 텐데, 지금은 기계가 척척 감당한다.

 

오늘 올리는 짐들의 대부분은 철근이다. 크레인은 키만 큰 것이 아니어서 힘도 세다. 철근 한 다발을 들어 올리면서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도면을 든 이가 위로 올라온 철근이 놓일 자리를 지정해 주면, 다른 이들은 열심히 철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야말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일하는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만들어온 구조물 위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은 구조물은 저 많은 철근과 일을 하고 있는 자신들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누군가 남이 만든 바탕 위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바탕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은 것이 허술하다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이룬 바탕 위에서 다음 일을 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동안 어떤 바탕을 만들어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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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3)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예레미야 9:23-24)

 

예레미야는 멸망이 목전에 닥쳐왔는데도 허망한 자랑에 빠진 이들에게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렘9:23)라고 충고한다. 겸허함을 모르는 ‘지혜’는 다른 이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힘’은 자기의 의지를 타자들에게 강제하고픈 욕망으로 이어지고, ‘재산’은 과시적인 소비의 욕망을 부추긴다.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열등감이 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지혜와 힘과 재산은 그들이 중요한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이다. 반면 내면이 충실한 이들은  굳이 다른 이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적으로 내보이려 하지 않는다. 프랑스 사상가인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매개되어 있다고 말했다. 무엇을 가지고 싶다, 무엇을 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마음의 뿌리에는 그것을 이미 누리고 있는 이들에 대한 선망의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망의 감정이 지배할 때 우리는 부자유 속에 살 수밖에 없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인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삶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들이 모방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긍휼, 공평, 공의라는 세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긍휼은 몸으로 표현되는 사랑 혹은 사랑으로 가득 찬 친절함이고, 공평은 회복적 정의를 가리킨다. 공의는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견결한 태도이다. 하나님은 엄중하신 동시에 부드럽고, 상처입은 세상과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시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신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이것 뿐이다. 

 

 

 

모제스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는 중세 최고의 철학자이자 랍비였다. 그는 <당황하는 이들을 위한 지침>(The Guide for the Perplexed)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존재, 인간 인식의 한계, 악의 문제 등을 다뤘다. 주제가 어려운 만큼, 내용도 어렵다. 책의 말미에 그는 자기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그게 바로 예레미야 9장이다. 고도의 지적인 사색을 거쳐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책을 쓴 후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지혜는 하늘을 향한 발돋움이지만 결국 그것은 땅에서 바로 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해 병든 이들을 고쳐 주었고, 고민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해결책을 제시했다. 또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겼다. 그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기도*

 

하나님, ‘타인의 시선이 나를 타락시킨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참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위선적인 태도를 보이고, 가식적인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세상에 적응하느라 지쳤습니다. 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습니다. 헛된 자랑거리를 추구하던 삶에서 돌이키고 싶습니다. 긍휼과 공평과 공의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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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7)

 

 신선대

 

한국 산에 반한 규영이와 함께 도봉산 포대능선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도봉산 초입을 찾아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봉산은 손에 꼽을 만큼 우람하고 멋진 산이었다. 특히나 와이(Y)계곡은 험하기도 하고 위태하기도 하여 스릴과 함께 자유로움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지나온 길이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지 않겠는가.

 

 

 

 

정점을 찍듯 마침내 오른 봉우리가 신선대였다. 탁 터진 사방과 시원한 바람, 산을 오르며 힘들었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보상 받는 느낌이었다. 신선대 바로 앞에 솟아 있는 봉우리도 아름다웠다. 층층 쌓인 바위들이 또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빼어난 경치에 반해 이 땅을 찾은 하늘의 천사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옹기종기 얼굴을 맞대고 공기놀이라도 한 것일까? 하도 재미있어,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 다음날 다시 오자며 놀던 공깃돌 한 데 모아 쌓아놓은 듯 아슬아슬한 돌무더기. 어둠 속 사라지는 신선의 뒷모습을 누가 보았던 것일까, 이름하여 신선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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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6)

 

은퇴(隱退)와 염퇴(恬退)

 

은퇴(隱退)는 ‘숨길 은’(隱)과 ‘물러날 퇴’(退)로 된 말이다.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낸다는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 물러나 숨는 것, 혹은 숨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 은퇴였던 것이다. 물러난 뒤에도 숨지 못하는 이들이 많고, 포곡은사처럼 어설프게 나섬으로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경우들이 적지 않으니 물러나 숨는다는 의미는 얼마든지 새겨둘 만한 것이었다.

 

농암 이현보를 통해 알게 된 말 중에 ‘염퇴’(恬退)가 있다. 염퇴란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든지 출세의 길이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등지고 고향을 찾은 농암에게 어울렸던 말이 ‘염퇴’였던 것이다.

 

염퇴의 길을 나서며 농암은 시 한 수를 남긴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聾巖에 올라 감격적인 시 한 수를 다시 읊었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농암(聾巖)은 ‘귀먹바위’ ‘귀머거리바위’다. 바위치고 귀먹바위 아닌 것이 없는데, 고향의 바위 하나 자신의 호로 삼았으니 가히 은퇴와 염퇴의 길을 갈만한 삶이다 싶다. 聾巖은 남의 말에 솔깃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일 저 일에 기웃거리지도 않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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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2)

 

하와의 복권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창세기 3:17-21)    

 

성경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하와이다. 하와의 이름은 언제나 ‘선악과’, ‘타락’, ‘유혹’과 결부되곤 한다. 순진한 아담을 꾀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위반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종교학자들은 유혹과 하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신비한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란 뜻의 하야(hajja)에서 유래된 단어(라틴어 Eva)로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그 이름이 고대 히타이트 족의 천둥신의 아내인 헤바(Heba)와 연결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창세기 기자는 하와에게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영예스러운 호칭을 부여하고 있다. 타락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하와’가 복권되어야 하는 시대이다. 아담이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의미하듯이, 하와는 생명을 북돋고 살리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다. 하와는 ‘여성적 원리’를 드러낸다. 남성들이 주도해 온 세상은 지배, 정복, 경쟁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긴장과 의구심을 거둘 수 없다. 그런 세상에서 평화의 열매를 거두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들의 문화는 배려, 공감, 보살핌, 양육, 협동의 원리 위에 세워진다. 여성들을 그런 역할에 고정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여성들은 계급적으로 위/아래를 나누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일은 자비의 심성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여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훨씬 가깝다. 나희덕 시인은 아기를 낳은 후 젖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이야기를 시로 형상화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열과 수시로 찾아드는 오한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는데, 어머니가 곁에서 밤새 뜨거운 찜질로 젖망울을 풀어주려고 굳었던 가슴을 쓸어주시며 기도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의 땀이 시인의 가슴을 흔들어 깨웠고,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뭔가가 솟구쳤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사랑이 딸의 가슴에 잠들어 있던 ‘어머니 성’을 불러낸 것이다(<해빙>)

 

이런 기적은 여성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이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홀로는 할 수 없기에 여성들은 다른 이들과 협력하는 데도 익숙하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기독교인이라면 다른 의미의 ‘하와’ 즉 ‘모든 생명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복음 10:10b)고 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하와의 마음이 아름답게 조응하고 있다.

 

*기도*

 

하나님,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지만 우리는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유동하는 공포가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친절하고 따뜻한 얼굴과 만나면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행복해집니다. 주님, 우리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하와’를 깨워주십시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이 곧 하나님에 대한 예배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오늘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도록 우리 마음을 하늘빛으로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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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1)

 

본이 된 사람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복음 13:12-15)

 

김흥호 목사는 스승을 산과 같은 존재라 말한다. “사람은 산을 보다가, 산을 걷다가, 산이 됩니다.” 놀라운 말이다. 한국의 한 등반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것을 보고 쓴 글 속에 그가 생각하는 스승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세계의 정상 히말라야 정상에 태극기가 휘날렸다. 무서운 빙벽과 고요한 빙호(氷湖)와 넘치는 빙하가 8,848m 에베레스트의 모습이다. 옛 사람은 이 산을 설산(雪山)이라 했고, 이 설산은 가끔 스승에 비유되었다. 위대한 스승에게는 빙벽과 같은 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는 무서운 정의감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얼음같이 차가운 참과 거짓을 판가름하는 고요한 진리감이 깃들어야 하고, 빙호같이 넘치는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자비감이 흘러내려야 한다. 무서운 정의와 고요한 진리와 넘치는 자비가 하나가 될 때 위대한 스승은 이루어진다.”(설교 ‘스승의 특징’ 중에서)

 

무서운 정의, 고요한 진리, 넘치는 자비가 한 존재 속에 구현될 수 있을까?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었다. 권력 앞에 당당하여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고, 진리를 구현할 뿐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슬픔을 품어 안으셨다. 예수님을 스승이라 하면 어떤 이들은 모욕감을 느낀다며 항변한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스승으로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이 아니고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스승은 길이 된 사람이고, 참 생명이 된 사람이고, 진리의 화신이다.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은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베드로가 이건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요한복음 13:8)고 말씀하신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은 채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모습은,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적시던 여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런 사랑의 행위는 모든 계층화된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을 배신할 유다의 발까지 닦아주셨다. 영혼의 깊은 어둠 속을 방황하던 제자의 번민까지도 용납하고 품어 안으신 거룩한 사랑이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 예수님은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앉으셨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요한복음 13:14). 발을 씻겨 준다는 것, 그것은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연약함과 슬픔, 못남과 허물까지도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제자의 길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이러한 비상한 실천을 통해 열린다. 주님은 말로 가르치는 분인 동시에 삶으로 본을 보이신 분이다. 본받을 이가 없는 인생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예수를 본받을 때 삶이 맑아진다.

 

*기도*

 

하나님,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애써보지만 우리는 번번이 습관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곤 합니다. 주님을 따라 살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작은 타격을 받는 순간 무너지곤 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는 다름 아닌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못났다 책망하지 않으시고 끝없이 용납하시는 그 사랑을 감당할 길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사랑으로 전복시키십니다. 이제 우리도 그 사랑을 품고 누군가의 발을 닦아줄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 속에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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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5)

 

맞은편에서 보면

 

경북북지방 연합성회에 다녀왔다. 안동과 영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경북북지방은 4개 시(市)와 6개 군(郡)으로 이루어진 지방이었다. 한 개 도시에도 여러 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 도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지방의 이 쪽 끝에서 저 쪽 끝까지 가는데 차로 3시간이 걸린다니, 29개 교회가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집회는 영주에 있는 영주성민교회에서 열렸는데,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두 시간 가량을 오가는 교회도 있었다. 두 시간 가령을 달려와 말씀을 듣고 다시 밤길 두 시간을 달려 돌아가야 하니 지극한 마음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싶었다.


대부분은 오지에 있는 작은 교회들, 모두가 또 하나의 단강이라 여겨졌다. 그래서 그랬을까, 말씀을 나누는 마음이 남달랐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랬고, 말씀을 전하는 나도 그랬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경계가 사라진, 드문 경험을 한 셈이었다.

 

지역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게 되어 한 시간 이상을 달려 점심을 먹기도 했다.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많아 배울 것이 많았다. 듣는 이야기마다 범상치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마지막 날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농암 이현보 선생의 집인 농암종택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목이기도 했거니와 강사에게 잘 어울리는 곳일 것 같다며 지방 목회자들이 꼭 보여주고 싶어 하던 곳이기도 했다.


첩첩산중, 들어가는 길 자체가 너무도 아름다웠다.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한 곳이기도 했단다. 퇴계 이황이 거닐었던 길이 ‘예던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어, 언제 한 번 찬찬히 걷고 싶다는 바람을 아름다운 풍광을 담듯 설레는 마음으로 담아두기도 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종택은 원래의 자리가 아니었다. 본래 있던 곳은 분천마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안동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 씨가 한 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새롭게 농암종택이 들어선 ‘가송리’는 그냥 생긴 이름이 아니었다. ‘佳松’, 아름다운 소나무의 마을이었다.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라 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강물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선 단애(斷崖), 푸른 빛 가득한 소나무와 은빛 모래가 빛나는 강변, 감탄이 아깝지 않은 절경 속에 절경을 거스르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며 감탄을 하자 동행을 했던 호대원 목사님이 내게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지역 곳곳에 서린 정신적인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목사님이었다.


“이곳도 아름답지만 실은 옮기기 전의 본래 자리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고 해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호 목사님은 강 건너편 산 중턱쯤을 가리키며 한 마디를 더 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도 아름답지만, 저곳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더 아름다워요.”

 

맞은편에서 바라보면 더 아름다운, 우리가 평생 꿈꿔야 할 삶이 그 한 마디 속에 다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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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70)

 

소나 나귀를 매개로 하여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성정이 다르고 지향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소한 차이가 관계를 어렵게 만들곤 한다. 욕정을 품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문제는 갈등이 ‘함께 함’에 대한 회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다른 이들과 등을 돌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화해의 연습이 필요하다.

 

토라는 화해를 가르치기 위해 구체적인 상황 하나를 제시한다.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들짐승의 먹이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짐승이 잘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이들의 소유라면 우리는 얼른 그 짐승을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이다.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주인을 잘 모른다 해도 그 딱한 광경을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데 만약 그 짐승의 주인이 원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가 나빠졌든, 삶의 방식이 너무 달라 비위가 맞지 않는 사이이든, 원수의 불행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원수의 것이라 해도 길을 잃고 헤매는 짐승을 보거든 반드시 임자에게 돌려주고, 짐에 눌려 쓰러진 짐승을 보거든 그냥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를 도와 나귀를 일으켜 세우라는 것이다. ‘반드시’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요구가 아니다. 우리가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마음 내키지 않는 일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그것이 치유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길을 잃거나 무거운 짐에 눌려 쓰러진 ‘원수의 짐승’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내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모습을 보면 ‘잘 됐다’,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당연한 것으로 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 마음에 고착되는 순간 인간적 성장은 멈추게 마련이다. 비록 적대감이 그와 나를 갈라놓았지만, 더 깊은 곳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를 직접적으로 돕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토라는 가여운 처지에 빠진 동물을 매개로 하여 화해를 모색할 지혜를 발휘해보라고 말한다. 꼭 동물이 아니라도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우리를 이어줄 끈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곤란에 처한 원수를 돕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돕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 즉 악한 경향을 극복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화해의 용기를 발휘할 때 우리는 더욱 커진다. 

 

*기도*

 

하나님, 마음 내키지 않는 이들과 함께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장소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마음이 무거울 때는 그런 이들이 없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 살고 싶다는 헛된 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만 지낼 수 없는 게 세상 현실입니다. 주님, 낯선 이들을 존중하는 열린 마음을 심어주십시오. 고통과 시련을 함께 감내하면서 서로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사랑에 당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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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5)

 

어느 날의 기도
    -창세기 22장을 읽다가

 

아침 일찍 길을 나섰을 뿐
누구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의견을 물어
핑계거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선물로 주신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
산산이 조각난 심장인 양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어 지고는
일러주신 곳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걸음마다 나는 죽었고,
이미 나는 제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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