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04 03:31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20.02.06 06:40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0)

 

나도 모르게

 

군인들이 끌고 간다. 모시고 가는 것과는 다르다. 재미 삼아 내리치는 채찍에도 뚝 뚝 살점은 떨어져 나간다. 피투성이 몰골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흥미로운 눈요기일 뿐이다. 자주색 옷으로 갈아입히고 면류관을 씌운다. 희롱이다. 희롱은 당하는 자가 가장 먼저, 분명하게 느낀다.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는다. 속옷을 나눈다. 찢기엔 아까웠던 호지 않은 옷, 제비뽑기를 위해 속옷을 벗기는 순간은 발가벗겨지는 순간이다. 나를 가릴 것은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양손과 발목에 박히는 못은 연한 살을 단숨에 꿰뚫고 들어와 뼈를 으스러뜨린다. 순간 나는 떨어지지 말아야 할 물건이 된다. 죄인들의 두목이라는 듯 두 강도 사이에 매단다.

 

악한 이들의 의도는 얼마나 교활하고 분명한지 설명이 필요 없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너부터 구원하라, 지나가는 사람으로부터 종교지도자들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조롱을 늘어놓는다. 조롱은 누군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다. 지축을 울리는 바윗덩어리처럼 조롱하는 모든 놈들을 짓뭉개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마음을 찌르는 조롱들은 옆구리를 찌르는 창끝보다 아팠을 것이다.

 

 

 

그 모든 것 중에서 어느 것 한 가지만 주어졌어도 그 자리에 보이지 않는 제자들처럼 줄행랑을 쳤을 우리를 두고, 예수는 모든 것을 다 받는다. 불어난 계곡물처럼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받는다.

 

몰약을 탄 포도주가 전해진 것은 그나마 다행일 수 있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마취용 음료, 차라리 그렇게라도 고통을 덜 느낄 수 있다면 다행 아닐까 싶은데, 예수는 그것을 거절한다. 고난의 잔은 다 받아 마시면서도, 몰약을 탄 포도주는 받지도 않는다. 고통의 끝자락에 맨 정신으로 선다. 희미함에 기대 피하지 않는다. 고통과 수치가 크면 클수록 깨어 있는 정신으로 마주하여 받아들인다.

 

예배당에 나와 십자가를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자고,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간다 입술로만 말하지 말자고, 교인입네 십자가를 목에만 걸지 말자고,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를 나도 지고 주님을 따라가자고 교우들에게 말할 때,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젖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로등을 밝히는 것은  (2) 2020.02.05
노란 손수건  (6) 2020.02.03
나도 모르게  (2) 2020.02.02
염치(廉恥)  (2) 2020.02.01
작은 십자가를 보며  (2) 2020.01.31
날 때부터 걸어서  (2) 2020.01.30
posted by

진리에 뿌리를 내린 사랑

신동숙의 글밭(69)

 

진리에 뿌리를 내린 사랑

 

사랑? 사랑이라는 글자 뒤에 나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애매한 느낌표도 찍지 않는다. 쉼표를 찍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주저앉는 순간에도 내 숨은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물음표를 찍기로 한다. 사랑은 무엇인가? 성경은 언제나 사랑을 얘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1서 1:5).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16).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12).

 
성경 말씀에서 답을 구하는 것이 가장 온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성경 말씀은 열매이기보다는 씨앗에 가깝다.

 

물론 성경책을 펼쳐서 말씀을 따라 읽는 순간 그 자체로 굶주린 영혼에겐 빛이 되고 양식이 되고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말씀은 어디까지나 씨앗의 상태와 같다. 황무지 같은 내 마음밭을 경작하고서, 한 알의 씨앗으로 심겨진 말씀이 내 삶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서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력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알의 말씀이 삶 속에서 꽃을 피우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모습을 그려본다. 내게 있어 사랑은 진리에 뿌리를 내린 사랑이다. 진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랑이, 정처 없이 떠돌때 때론 죄를 낳기도 하는 모습을 본다.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자기 나름의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사랑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고는 모호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리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때론 하나님의 은총을 자신이 저지른 죄를 덮는 가리깨 쯤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모습이다. 이 지점은 종교인이 비종교인으로부터 욕을 먹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종교인은 교회 안에서 자신이 사랑 속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는 이미 구원 받았다는 착각 속에서 의식과 지성과 영성의 성장을 스스로가 멈춘채 애매한 느낌표의 믿음과 사랑 안에서 감각과 욕망에 따른 삶을 살아간다. 그런 육신의 정욕 속에서 영혼의 맑은 숨은 실체가 되지 못한다.

 

 

 

 

나는 상대를 알기 위해서 더욱 나를 이해할 필요성을 느낀다. 자아성찰을 통한 스스로를 돌아봄 없이, 내게 있어 상대를 이해하기란 또 다른 오해를 낳을 뿐이다. 그 사실을 이제는 스스로가 먼저 인정하기로 한다. 내가 나를 통해 깊어진 만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근거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생된 개체이기에, 나를 통한 너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이해란 내 마음 거울에 비춰진 만큼만 너를 이해할 수 있는 한계선이다. 나 자신을 먼저 알고서, 나를 통해 너를 알 수 있고, 그에 합당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나를 모르고서 너를 안다는 것이 가능한가. 내 속에 없는 것을 너에게 줄 수 있는가. 맹목적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다. 맹목적 믿음은 하나님이라도 싫으실 것 같다. 하나님은 빛처럼 분명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인간을 기쁨과 사랑의 주체적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뜻이 있지 않았던가. 신앙이라는 이름 안에서 맹목적 믿음과 맹목적 사랑처럼 그저 눈 먼 사랑은 답답함으로 다가온다. 매 순간을 깨어서 마음과 지성과 영성의 눈을 뜨고서, 눈을 반짝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의 모습일 수 있다면, 그 모습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울까.

 

자아성찰은 홀로 있는 고독이다. 깊어짐이고 고요함이다. 내면으로 뿌리 내림이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혼자서는 길을 잃고 만다. 진리의 말씀이 동행이 되어야 한다. 일상 가운데 잠시 멈추고, 진리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서 침묵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고독의 사랑방에 머물기로 한다.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를 가슴에 품고서, 한 점 별빛으로 떠올리면 가슴 한 복판이 따뜻해져 온다. 울컥 눈물처럼 샘물이 솟으면 메마른 내 심령엔 단비가 내린다. 여기서부터다. 세상을 향하는 내 사랑의 첫발자국은. 그 한 점 가슴으로부터 샘물이 넘쳐 흘러 물길이 나고 그렇게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흐르는 사랑이다. 진리에 뿌리를 내린 사랑이다.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