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15 19:11
  • 부럽습니다. 원주에 살고 부론에 가끔가는 양선석입니다. 조만간 기회될때 찾아뵙고 싶습니다!

    양선석 2020.02.22 11:2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0)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마음으로 가는 길이 진짜 길이다. 단강으로 가는 길은 가르마처럼 훤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여주에서 빠져나가 점동을 거쳐 남한강을 건너면 강원도의 초입 부론을 만난다. 부론을 벗어나면 이내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을 택하면 강가 길을 따라 가고, 왼쪽을 택하면 자작 고개를 넘어간다. 그렇다고 갈림길에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은 어느 길을 택해도 길은 정산에서 다시 만나 단강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부론에서 자작 고개 쪽으로 향하다 보면 길 왼쪽 편에 산수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산수골엔 언제부턴가 ‘꿈꾸는 산수골’이 자리를 잡았다. 은퇴를 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꿈꾸는 산수골을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이도형 씨가 있다. 얼굴을 보면 영락없이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인데, 그는 어색할 것도 없이 자신을 ‘좌파’라 소개한다. 한전 등에서 노조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일까를 고민했고, 꿈꾸는 산수골을 시작했다.

 

산수골엔 콩 할배, 론 할배, 꽃 할배, 짱 할배 등 몇 몇 할배들이 모여 산다. 꿈꾸는 산수골을 처음으로 찾던 날, 꿈꾸는 산수골이 꿈꾸는 꿈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꿈은 의외로 단순했고, 소박했다. 집에서 죽자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약해져 병이 들고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하는 과정도 대개가 비슷하다. 수많은 의료기기의 도움 속에서 겨우 숨을 쉬다가 그것조차 힘에 부치면 세상을 떠난다.


산수골의 꿈은 거기에서 시작이 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자리가 병원이 아니라 산수골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돌보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마지막 눈을 감게 하자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할배들은 하루하루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

 

꿈꾸는 산수골의 꿈은 릴케의 <기도시집> 한 구절을 닮았다. ‘오 주여, 그들 하나하나에게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그가 사랑, 의미, 그리고 고난을 겪은 삶에서 가버리는 그러한 죽음을’이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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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맴도는 말에게, 글방을 만들어 주는 일

신동숙의 글밭(81)

 

가슴에 맴도는 말에게, 글방을 만들어 주는 일

 

누구나 살아오는 동안, 가슴 속에 오랜 동안 맴도는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 속에 묻혀 하루 하루를 지내다가도 문득 수면으로 떠오르는 이야기. 유년의 기억이지만 흰머리가 성성한 노년이 되기까지 세월 속에 잊혀지기보다는 더욱 선명히 떠오르는 이야기들.

 

어느 분으로부터 교정 의뢰를 받았습니다. 미국에 살고 계신 80세가 넘으신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A4 10장 분량의 원고에 이야기는 6.25 동족상잔 때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오시며 만난 사람들과 부산 피난민 시절까지 이어집니다. 이제 70년이 지나는 이야기 속에는 그때 나눈 대화가 생생하기만 합니다. 마치 어제 들은 이야기처럼요.

 

권정생 선생님의 <몽실언니> 시대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원고를 쭈욱 읽어 내려오는 동안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이유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평생을 가슴에 안고서 타향살이를 하신 그 할머니의 마음을 제 가슴에 떠올리니 먹먹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무거우셨을까요. 할머니는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에, 가슴 속 오래 묵은 이야기를 작은 책자로 만들어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하신다는 뜻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이야기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씨앗을 품은 듯 기쁨도 되지만,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는, 때론 가슴 먹먹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저에게 일어난 일도 글로 남겨 놓고 난 후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에 자유함을 얻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말이 글이 되는 일, 그렇게 말에게 글방을 만들어 주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헤아려 봅니다.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를 말로만 하게 되면, 순간 후련한 느낌도 들지만 지나고나면 그때 뿐이라는 마음이 듭니다. 말을 글로 적는 일은, 마음에는 홀가분함을 주고, 언제든 글방에 찾아가서 내 얘기를 만날 수 있다는 든든함과 편안함과 궁극적으로 짐이 되던 얘기로부터 자유함을 누리는 유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의 행복에 동행이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평소에도 할머니들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는 일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 속에 익은 구슬 같은 이야기들, 글줄로 꿰어지지 않은 옛어르신들의 삶과 이야기들 속에는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마따나, 선하고 순한 마음들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에게는 유산으로 물려 받고 싶은 선한 마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어떤 모양의 책이 될지는 저도 아직은 잘 모릅니다. 그대로 하나님께 맡길 뿐입니다. 제 자신의 실력을 믿는다는 한 마음 만큼 갑갑한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이야기 구슬을 글줄로 꿰고, 글방을 만드는 과정 중에도 마음에 자유함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가슴에 맴도는 말을 글방에 내려놓는 일, 글방을 만드는 일의 걸음과 숨결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려는 한 마음으로. 일의 시작과 틈틈이 고요히 말없이 머물러 침묵에 귀를 기울리는, 시간 너머의 시간 속에서 쉼을 얻습니다. 어둠 속 고요한 가운데 한 점에서 샘물처럼 차오르는 감동의 말이 그대로 흘러 글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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